1858년 늦여름.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두 남자. 폐지를 한 바구니 안고 선 청년 추지(간 이치로)에게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가 깐족댄다. “그거 팔면 얼마나 쳐줘? 얼마 벌지도 못하겠네.” 약이 올라 되묻는 추지. “그러는 넌. 그거 팔면 얼마나 받는데?” “종이 따위론 돈이 안 되는구나?” 씨익 웃으며 넌지시 속을 떠보는 야스케. “내 동료가 그만뒀는데 말이지….”

이어지는 장면. 한적한 시골 오솔길. 야스케가 끄는 수레를 추지가 밀고 있다. 폐지 장수 그만두고 야스케의 동료가 되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수레에 가득 실려 있는 것. 그들이 도시에서 가져다 시골에 되파는 것. 똥. 사람의 똥.

“관객이 즐겁게 웃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문제를 접할 수 있게”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다양한 시간대 속에서 ‘좋은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화로 담아” 후세에 전하는, 일명 ‘좋은 날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 될 거라고 했다. ‘지속 가능한 세계’와 ‘순환경제’라는 개념을 영화로 꼭 표현해달라는 프로듀서에게 감독은 똥 이야기를 꺼냈다. 에도시대(1603~1868) 분뇨업자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모든 게 부족했던 그때는 배설물도 자원이었다. 도시의 똥이 야스케와 추지 같은 사람들의 지게와 수레와 배에 실려 시골에 거름으로 팔렸다. 그걸 밭에 뿌려 농작물을 길러 다시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회. 역사에 기록된 완벽한 순환경제의 표본. 문제는, 똥을 보러 극장에 올 관객은 없다는 것. ‘보면 좋을’ 이야기는 맞지만 ‘보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방법이 없을까? ‘관객이 즐겁게 웃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똥 이야기에 빠져들 방법이?

봄이었다. 순환하는 계절의 봄. 약동하는 인생의 봄. 그러니까, 청춘(靑春). 그걸 제대로만 그려낸다면 관객은 똥지게가 엎어져도 꽃향기를 맡게 될 것이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맨발의 청춘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될 것이다. 그게 원래 영화가 하는 일이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이야기’를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로 기어이 만들어내는 일. 〈오키쿠와 세계〉에서 사카모토 준지 감독이 해낸 것처럼.

그래서 다시 1858년 늦여름. 두 남자가 비를 긋는 장면. 아까 얘기 안 했는데 사실 그 처마 밑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뒤늦게 비를 피해 달려온 오키쿠(구로키 하루). 두 청년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딸. 도시의 공동주택에 살고 있어서 추지를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 세입자가 많아 금세 똥이 차는 곳이어서 추지와 더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된다. 집이 가난해진 덕분에(?) 찾아온 인연이었다. 가진 게 없어서 늘 초라한 삶이었는데 남몰래 연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비로소 든든해진 오키쿠였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우물쭈물. 성큼성큼. 그렇게 봄이 오는 이야기. 마음껏 청춘을 살아내는 세 사람. 흑백영화인데 세상의 모든 색깔을 품고 있다. 이 영화로 나의 겨울은 미리 봄이 되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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