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극우 세력들이 대법원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이 나라의 입헌 정치 시스템을 뒤엎으려 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이들의 준동을 우려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 노동계와 경제계, 시민들은 파업과 거리 시위 등 다양한 수단으로 맞서고 있다.

7월24일 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극우 연립 정부의 대법원 무력화 법안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REUTERS
7월24일 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극우 연립 정부의 대법원 무력화 법안 통과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REUTERS

7월24일(현지 시각),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대법원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패키지 법안들 중 하나를 통과시켰다. 통과된 법안에 따르면, 대법원은 장관 임명 등 행정부가 ‘합리적이지 않은’ 정책 결정을 내릴 때 이를 무효화하는 권한을 상실하게 된다. 베냐민 네타냐후(리쿠드당) 총리가 이끄는 극우 연립 소속 의원 전원(64명)이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동안 야당 의원들은 격렬하게 항의하며 퇴장했다. 크네세트는 단원제 의회로 의원 정수는 120명이다. 이로써 이스라엘 극우 행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사라졌다.

유대 근본주의 세력이 장악한 행정부

지난해 11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과반 의석(64석)을 얻으며 집권한 ‘우파 블록’의 구성을 보면 ‘대법원의 무력화’가 이스라엘은 물론 중동 지역과 세계에 얼마나 위험한 사태인지 알 수 있다. 우파 블록 64석 중 32석을 점유한 리쿠드당(네타냐후 총리 소속)은 우파 민족주의 성향이지만 시장과 국제관계를 비교적 중시하는 정당이다. 정교일치도 노골적으로 추진한 바 없다. 그러나 나머지 32석을 배분하고 있는 토라유대주의연합, 독실한 시오니즘당, 샤스 등은 당명에서 드러나듯이 유대교(민족) 근본주의 집단이다.

우파 블록이 집권한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중동 이웃 나라들에 대해 거의 의도적으로 보이는 도발을 연이어 감행했다. 엄연히 팔레스타인 정부가 통치권을 갖고 있으나 이스라엘군에 점령되어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을 의도적으로 확장하고, 이로 인한 분쟁엔 이스라엘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제압했다. 재무장관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공언했다. 국가안보장관, 재무장관, 치안장관 등이 수천명 규모의 유대 근본주의자들을 이끌고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민 거주 지역으로 행진하면서 ‘아랍인에게 죽음을’ ‘너의 마을이 불타오르길’ 같은 노래를 부르고 폭력을 행사했다. 인종차별주의자로 자처한 인사를 미국 총영사로 임명해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7월24일, 대법원 무력화 법안에 표결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들어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중앙) ⓒEPA
7월24일, 대법원 무력화 법안에 표결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들어서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중앙) ⓒEPA

이런 이스라엘 행정부의 작태를 그나마 견제할 힘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 대법원이었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지난 1월 네타냐후가 임명한 내무‧보건부 장관을 해임하라고 행정부에 명령했다. 그의 탈세 범죄 전력 때문이었다. 또한 대법원은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관련 법적 소송에서도 가끔 극우세력에겐 못마땅한 판결을 했다. 유대인 정착촌을 서서히 넓혀나가는 방식으로 국제법상 이스라엘 영토가 아닌 서안지구를 장악하려는 극우세력에게 대법원은 ‘매국노’로 보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헌정 위기

이스라엘 극우 연정이 지난 1월 이른바 ‘사법개혁안’으로 대법원을 무력화시키는 법안을 내면서 이 나라는 헌정 위기에 봉착했다. 최고 수십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충직하기로 소문난 이스라엘 예비군 수천명은 해당 법안이 계속 추진될 경우 자원 복무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영국 등 이스라엘의 동맹국들도 ‘야당과 협력하라’는 권고를 통해 사법개혁안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극우 연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법안이 의회에서 심의된 7월24일, 병원에서 심장 박동기 삽입 시술을 받고 의사당으로 들어온 네타냐후 총리가 표결 절차를 수개월 뒤로 연기하려 시도했으나 야리브 레빈 법무장관, 이타마르 벤 그비르 국가안보장관 등 강경파들에게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표결이 완료된 뒤 레빈 법무장관은 “사법 시스템 정비를 위한 역사적인 첫 조치를 시행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머지 패키지 법안들도 통과시키겠다는 의미다. 극우 연립은 오는 10월 열리는 크네세트에서 자신들이 지배하는 입법부가 대법관 임명권을 갖도록 하는 법안 등을 통과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 법안들에 따르면, 대법원의 판결을 의회가 과반수 의결로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네타냐후도 못 막는다”

수만명 규모의 이스라엘 시민들은 7월24일 새벽부터 의회 밖 도로를 점거하는 수단으로 법안 표결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민들은 표결이 끝난 뒤 예루살렘 중심부와 텔아비브 등에서 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였다. 주요 기업들이 사업장 폐쇄로 항의를 표시했으며, 노동조합들은 파업을 고려하고 있다.

7월24일, 이스라엘 경찰이 예루살렘에서 시위 중인 군중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REUTERS
7월24일, 이스라엘 경찰이 예루살렘에서 시위 중인 군중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REUTERS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자 네타냐후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이스라엘이 정교일치 ‘종교 국가’로 전락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이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이며 모든 시민의 개인권을 지키는 나라로 남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스라엘은 (정교일치) 율법 국가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며 법원은 독립성을 유지할 것이다.”

의회 재적에서 절반을 약간 웃도는 의석(64석)으로 사법부 무력화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 중인 극우 연립 수장의 연설로 믿기지 않는 발언이다. 이스라엘 시민들과 국제 사회는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네타냐후가 표결 연기를 관철하지 못한 것은 극우 연립 내에서 그의 지도력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며 “민족주의 및 종교 근본주의 정당 연합의 극단주의자들이 법률 부문은 물론 더 넓은 범위에서의 변혁을 추진할 때 누가 막을 수 있는지 불명확하다”라고 평가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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