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출연자 24명이 직업별로 팀을 이뤄 무인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는 예능 프로그램 〈사이렌:불의 섬〉의 한 장면.ⓒ넷플릭스 갈무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2장. 오디세우스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세이렌들을 만나고, 마녀 키르케의 조언대로 그들의 노래에 현혹당하지 않기 위해 선원들의 귀에는 밀랍을 넣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묶는다. 그 덕분에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무사히 세이렌의 섬을 지나갈 수 있었고, 남성들을 유혹하지 못한 세이렌들은 무력감에 자살을 선택한다. 신화는 이것을 오디세우스의 승리담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세이렌’이란 존재에 주목했던 여성들은 이를 여성과, 여성의 목소리에 대한 남성들의 혐오와 공포로 해석해왔다.

세이렌은 ‘님프(Nymph, 정령)’로 엄연히 신적인 존재인데, 인간인 남성을 유혹하지 못해 자살을 택한다? 아무리 신화라지만 남자들의 환상을 너무 노골적으로 풀어낸 것이 아닌가…. 이처럼 세이렌은 여성의 목소리가 가진 힘 자체를 상징하고 동시에 도구화된 여성과 그 여성이 받는 억압을 드러내는 페미니즘의 유구한 기호였다. 지난 5월30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사이렌: 불의 섬〉(이하 〈사이렌〉) 역시 이렇게 재해석된 신화 속 ‘세이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이렌〉은 밀물 때 육지와 단절되는 무인도를 배경으로 최후의 우승팀을 가리는 ‘팀 대항 전투 게임’을 담았다. 게임은 원형경기장에서 제시된 미션을 수행하는 ‘아레나전’과 상대의 기지를 전략적으로 급습해 깃발을 제거하는 ‘기지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6개 팀 24명의 출연자는 자신들의 실제 직업인 경찰관, 소방관, 군인, 운동선수, 경호원, 스턴트 배우의 명예를 걸고 상금도 특전도 없는 게임에 참여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상징하는 제복, 유니폼을 입은 채 등장해서 ‘개인이 아니라 팀을 위해, 돈이 아닌 명예를 위해 싸운다’는 필사의 각오를 드러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끌리지 않을 수 있나? 그것이 설령 나와는 무관한, 아니, 내가 경계하는 권위에 관한 것일지라도. 그들이 눈을 빛내며 자신의 직업적 자부심을 드러낼 때, 거리를 두려던 나의 모습은 일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그들의 삶과 일에 대한 호기심만이 강렬하게 남는다.

‘불의 섬’에 여섯 개 팀이 모두 모이고 제대로 탐색전을 할 새도 없이 바로 사전 게임이 시작된다. ‘출발’이란 두 글자가 들리는 순간, 출연자 24명은 앞다투어 달려 나간다. 호텔이나 연회장의 ‘웰컴 푸드’는 들어봤지만 ‘웰컴 게임’이란 건 생전 처음 보는 단어였다. 대체 누가 환영의 의미로 걷기도 힘든 갯벌 1㎞를 질주하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60㎏이나 되는 쇠 깃발을 든 채로…. 그런데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 일상인 이 특별한 출연자들은 별다른 내색도 없이 서로를 다독이며 목표까지 묵묵히 달린다. 단합력이 좋고 ‘완전군장 행군’에 익숙한 특전사 출신 군인팀이 선두로 들어오고, 약체로 평가되었지만 끈기와 지구력이 강한 스턴트팀과, 체력과 인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소방팀이 뒤를 이어 들어온다. ‘피끓는 전우애’ ‘슛, 레디, 액션’ ‘언제나 늘 현장처럼’ 각 팀의 직업관이 드러나는 구호가 아레나를 쩌렁쩌렁 채우자 운동선수팀, 경찰팀, 경호팀도 차례로 입성한다. 그렇게 아레나에 모두 모인 출연자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해제하고 그저 이 레이스를 완수한 서로에게 엄지를 치켜올리며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낸다. 게임 시작 전부터 적에게 응원을 보내는 기묘한 광경에 왠지 뭉클함이 느껴진다. 그러다 깨닫는다. 이 전투 게임의 참가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꽤 큰 의미라는 것을.

총 10부작인 〈사이렌〉의 에피소드 제목은 출연자들이 게임 중 직접 뱉은 말로 구성되어 있다. “악바리는 자신 있거든요”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몸 하나 믿고 가보자” “결과로 입증해야지”. 가슴이 저릿할 만큼 멋지지만, 막상 이 대사들이 나온 상황들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남성의 비율이 높은 직군에서 수많은 편견을 이겨내며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이들에게 그러한 ‘악바리’ 정신과 끈질긴 태도는 몸에 밴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출을 맡은 이은경 PD는 제작 발표회에서 “여성이 아닌 개인의 능력을 봐달라”고 당부했고, 실제로 출연자들을 ‘여성’으로 특정하지 않는 연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돌발 상황에서 출연자들의 말과 행동에 투영되는 직업관, 견제와 적대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며 발휘하는 동료애와 협동심을 보면 시청자들은 구태여 애를 쓰지 않아도 여성들이 받는 사회적 억압과 폄하를 독해할 수 있고, 〈사이렌〉은 별다른 부연 없이 그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며 연출자의 당부 뒤에 단단히 자리 잡은 메시지를 드러낸다.

〈사이렌〉은 신체능력 및 전투 서바이벌이라는 측면에서 〈강철부대〉 〈피지컬:100〉 〈최강체대〉 등과 맥을 함께한다. 사진은 〈피지컬:100〉. ⓒ넷플릭스 〈피지컬:100〉 화면 갈무리

유혹보다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한 세이렌들

〈사이렌〉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허투루 만든 흔적이 없는 밀도 높은 쇼다. 전투 게임의 스펙터클을 탁월하게 포착하면서도 출연자 개개인의 개성, 인물 간 관계를 큰 줄기의 서사로 능수능란하게 이용한다. 3만 평의 무인도에 설치된 카메라 총 354대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지만 단 한순간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내리는 판단,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 팀의 시선을 교차하는 편집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한다. 호각, 경보음 등을 이용한 각 팀의 테마 곡은 출연자들의 직업을 동물로 상징해 만든 팀 마크만큼이나 웅장하면서도 섬세하다. 이처럼 〈사이렌〉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운 쇼다.

그중에서도 시청자를 확 끌어당기는 트랩 같은 장면은 4화의 소방팀 에피소드다. 위험하고 힘든 것은 모두 자신이 도맡았던 소방팀의 리더 김현아가 나무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자, 팀의 에이스인 정민선은 ‘짧은 시간 자신에게 너무 큰 존재가 된 선배 소방관’의 막중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자신이 모두 짊어지기로 결심한다. 부상 이후 바로 펼쳐진 아레나 게임은 정민선의 그런 각성이 투지로 발휘되는 전쟁 고지였다.

팀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홀로 장작 30개를 패고, 두 팀에게 공격당하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소방관의 정신으로 상대 팀의 화점에 정확히 방수하며 홀로 힘겨운 싸움을 펼친 소방관 정민선. ‘수시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한 팀의 든든한 막내는 결국 그날 영웅이 되어 팀에 승리를 안겼다. 서로 의지하던 팀원들은 물론 경쟁하던 상대 팀마저 존경의 박수를 보내자, 시청자들은 승자와 패자에 관계없이 ‘승부’라는 과정의 기쁨과 감동을 느낀다. 방송의 말미 패자부활전에서 출연자들이 스스로 외쳤던 “대한민국 여자 멋있다!”라는 슬로건은 이처럼 작품의 곳곳에서 팀원 간의 희생과 의리, 패배한 팀의 깨끗한 승복 등으로 더없이 멋지게 확인된다.

〈사이렌〉은 기존 예능과 견주었을 때 두 가지 계보에 모두 해당한다. 여성의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소재로 하는 〈노는 언니〉 〈오늘부터 운동뚱〉 〈골 때리는 그녀들〉에 속할 수도 있고, 신체능력 및 전투 서바이벌이라는 측면에서 〈강철부대〉 〈피지컬:100〉 〈최강체대〉 등과 맥을 함께할 수도 있다. 신체적 강자가 우위를 갖는 서바이벌의 잔인한 강자 독식 시스템을 비판하고, 군대·경찰 등 남성의 얼굴을 한 국가권력의 콘텐츠화를 줄곧 경계한 내게 〈사이렌〉은 엄청난 문제작임이 틀림없다.

생존 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사이렌〉에 이만큼 열광할 수 있었을까? 실은 국가권력이나 집단에 대한 충성심, 폭력성 등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게 아닐까? 자문은 이어지지만 모두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것은 〈사이렌〉이 콘텐츠 소비 윤리에 대한 개인의 갈등까지 모두 아우르는, ‘여성 예능’의 모범적인 가이드이자 앞으로 ‘여성’을 다루고자 하는 모든 콘텐츠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에피소드. 제일 끝까지 살아남아 모든 기지를 점령한 최종 우승팀이 자신들의 명예만이 우뚝 선 아레나에서 서 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건 상금이나 메달이 아닌 ‘출발’이라고 적힌 카드 한 장. 〈사이렌:불의 섬〉은 그들이 다시 앞만 보고 달리는 모습에서 작품의 막을 내린다. ‘시즌 2’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란 해석도 좋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여성 예능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져 가슴이 벅찼다. 더 이상 남성을 유혹하지 않는, 어떤 오해와 편견도 스스로 극복하는 세이렌들의 거친 항해를 위해서.

기자명 복길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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