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엇국 만드는 재료를 뭐라고 해요, 동태라고 하나요?”

영상통화 화면 속 양영희 감독이 물었다. 황태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감독이 ‘국물을 많이 먹는다’는 근황을 전했다. 지난해 한국에서 일본에 들어올 때 황태와 미역을 많이 사왔다. 미역을 볶는다는 감각 자체가 없는 일본에서 양 감독 부부는 미역을 볶아 미역국을 끓인다. 지난해 개봉한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양 감독의 어머니는 사위에게 백숙을 대접한다.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던 어머니가 마늘을 잔뜩 넣고 끓이던 백숙 레시피가 그의 남편 아라이 가오루 씨에게 전수되었다.

ⓒ공동취재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강정희씨(오른쪽)가 일본인 사위 아라이 가오루 씨와 백숙을 만들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양영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평생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활동에 헌신한 아버지와 남편 대신 기꺼이 생계를 꾸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가 여섯 살 때, 10대였던 오빠 세 명이 북한에 갔다. 1959년부터 9만명 이상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집단 이주한 북송 사업의 일환이었다. ‘부모의 의지’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섞인 결정이었다. 10년이 넘어서야 양 감독은 가족을 보러 평양에 갈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던 그는 30대에 카메라를 갖게 되었고 렌즈는 가족을 향했다. 조총련 활동가 아버지를 다룬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이 개봉한 후로는 더 이상 북한에 갈 수 없었다. 평양에 사는 오빠네 식구 이야기를 그린 〈굿바이, 평양〉, 제주 4·3을 겪은 어머니 강정희씨의 사연이 담긴 〈수프와 이데올로기〉까지 ‘가족 다큐’ 3부작이다. 최근에는 그가 쓴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가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조총련이 운영하는 민족학교, 그중에서도 ‘민족교육의 최고 전당’이라는 조선대학교 이야기다.

양영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2세로 평생 조총련 활동에 헌신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마음산책 제공

1980년대, 조선대학생 박미영은 숨 막히는 기숙사 생활을 피해 도쿄 시내로 연극을 보러 다니며 ‘다른 꿈’을 품는다. 통금 시간은 기본이고, ‘어디 여자가?’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데다 매일 참회해야 하는 (총화) 분위기의 대학에 동화될 수 없었다. 조선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지척의 일본 대학 남학생과 연애를 ‘감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정한 진로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픽션이지만 양 감독 본인의 조선대 시절 경험이 반영되었다.

카메라로 가족을 마주한 지 26년, 마침내 자유로워졌다는 양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20대이던 감독은 50대가 되었다. 그사이 큰오빠와 아버지는 죽고 그는 한국 국적을 얻었다. 한평생 자식과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짐을 꾸려 보내던 어머니는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아들의 북송 사실조차 잊고 한 집에 같이 살고 있다는 ‘행복한 착각’ 속에 살다 돌아가셨다. 알츠하이머 때문이다. 양 감독이 사는 도쿄와 서울은 시간도, 오후 햇살의 정도도 비슷했다. 그의 오빠 가족이 있는 평양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사진. 앞줄 여자 아이가 양 감독이다.
ⓒ마음산책 제공

조선대학교 이야기를 소설로 쓴 이유가 있나?

제안이 왔고 기회는 놓치면 안 되니까. 아주 유명한 감독이라야 선택하는 거고 나는 차려진 데 맞게 출력하는 편이다(웃음). 전부터 재미있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디어 평양〉을 만들 때부터 재일동포, 자이니치 이야기 말고 다른 게 없냐는 질문을 받을까 봐 좀 겁이 났다. 나는 내 이야기가 소재 자체로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또 재일조선인 7세까지 태어났는데 그쪽 커뮤니티의 이야기가 너무 안 나왔다. 좀 비판적으로 그리면 항의가 올까 봐 그런 것도 있는데, 그렇게 (재일조선인 사회가) ‘언터처블’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아 아주 불편했다. 재일조선인은 대대로 일본 사회의 구성원이었고 일본 역사의 한 부분이며 세금도 내고 있다. 일본에서는 그런 역사를 안 가르치고, 조총련은 비판에 공격적이라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재일조선인의 삶이 그려진다.
항상 질문받는 삶이었다. 명함을 내밀면 한국 이름을 보고 ‘일본말을 왜 그렇게 잘 하느냐’ ‘부모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일본 이름은 없냐’고 묻는다. 본명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느냐고 오히려 되묻고 싶었다. 친구와 동료도 마찬가지다. 악의는 없는데 대대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가 투명인간 같았다. 최근에는 시대가 좀 변했지만 젊을 때는 한마디 할 때마다 질문이 100개씩 따라붙었다. 더 이상 답하기 귀찮아서 이 작품을 쓴 것 같다.

‘작가의 말’을 보면 북한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에서 나고 자랐는데 그런 환경에 의문을 품게 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고 했다. 학창 시절의 ‘진로 지도’ 때문이라고?

아무래도 아빠 엄마가 조총련 활동을 하고 오빠도 다 북한에 있는 집의 딸이니까 아주 센 진로 지도를 받은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조선대의 진로 지도와 똑같은 걸 받았다. 한마디로 ‘조직 위탁’이다. 내 인생을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고 조직이 하라는 대로 한다는 의미다. 수업에도 안 들여보내고 교장실, 교무실에 불려다니며 진로 지도를 받았다. 억울해서 계속 울었다. 꿈을 가지라고 가르쳤으면서 꿈을 가지면 비판받았으니까. 주변 어른들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렇게까지 싫다는데 억지로 강요해서 할 필요가 있나.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대학에서도 차원이 다른 사상 교육을 받았다. 철저히 세뇌시키고 의문을 품는 것조차 죄악시했다.

1980년대 배경이고 픽션이지만 자유로운 분위기의 일본 대학과 조선대는 너무 다르다.

당시 학교 규칙이나 사람들의 발언 등은 사실에 충실하다. 과장한 내용이 거의 없다. 남학생들도 그런 말(성차별적인 말)을 많이 썼다. 대학까지 가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다. 일본 사회의 차별과도 싸워야 하는데 커뮤니티 안의 봉건적인 분위기와도 싸워야 해서 질식할 것 같았다. 잘도 버텼다. 도쿄대에 입학하는 것보다 조선대에 떨어지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정의감만 있으면, 조직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지금은 조총련 자체의 규모가 줄고 학교 수도 줄어서 진로 지도가 필요 없을 것이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

교사들이 ‘얘는 좀 다르다’고 인식을 한 것 같다. 조선대에서 3분 거리에 살아도, 무조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도 금지되었다. 신주쿠나 롯본기에 연극을 보러 다니려면 차비도 필요하고 티켓 값도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교사와 자주 부딪쳤다. 학교 규칙을 강조하며 연극이 뭐냐고 해서 ‘내가 문학부 학생인데 연극이 뭐냐니, 많이 보라고 하셔야지’ 이렇게 싸웠다. 학생위원회에 소속된 오빠 친구를 찾아가서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금지해 연극·영화를 보지 말라고 하면 탈출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특별 허가를 받았다.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 칠순 잔치는 평양에서 열렸다. ⓒ마음산책 제공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 칠순 잔치는 평양에서 열렸다. ⓒ마음산책 제공

소설 속 미영은 일본 대학생과 연애를 하는데.

소설 속 연애는 망상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정말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개 대학이 붙어 있었다. 교실 창문에서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볼 수 있었다. 이쪽이 동독, 저쪽이 서독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궁금한 것처럼 저 대학생들도 우리를 궁금해할까? 같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는데 이렇게 총화만 하면서 사는 똑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까? 궁금했다. 버스를 타면 조선대 학생은 복장부터 달랐다. 조선인, 일본인을 무슨 기준으로 나누는지 궁금했다. 피부색도 얼굴도 닮아 있었다. 왜 나만 이렇게 고민을 하지? 나는 조총련 부모를 가진 딸이라는 틀에서 탈출하고 싶은데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까? 궁금했다.

북한에 간 미영의 언니 이야기를 쓰면서 감독의 오빠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다.

학교 안에서는 전체주의 교육을 받지만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철저하게 ‘인디비주얼(개인주의적인)’ 문화였다. 계속해서 양쪽이 공존하다가 진로 지도를 거치면서 어느 쪽 사회를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전체주의 안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대학에서 4년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한 건 ‘4년 기한이 있어도 이렇게 답답한데 오빠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였다. 정신 상태(건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2009년 사망한 그의 큰오빠는 조울증에 시달렸다). 미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청춘을 일본 도시에서 보낸 사람이 북한에 갔다. 원래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과도 다르다.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오빠와 조카. 평양에 산다. ⓒ마음산책 제공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오빠와 조카. 평양에 산다. ⓒ마음산책 제공

미영과 달리, 고급학교(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아주 열심히 했다. 교사가 되고 보니 눈앞의 학생들은 죄가 없더라. 주변 교사를 보면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젊은 여자 교사가 아주 적었고 지금이라도 ‘미투’를 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한 일들이 많았다. 2년 반 정도 되었을 때 교통사고가 났다. 이쯤 하면 됐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결혼도 했고 부모와 학교 의사를 존중해 하라는 걸 다 했다. 이혼하면서는 정말 하고 싶은 대로만 살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오빠들처럼 되면 안 되겠다, 내 인생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난해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극 활동을 할 때 재미있었다. 영화는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멀게만 보였는데, 카메라를 가지게 됐고 미디어 저널리스트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받아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북한에 가서 느낀 점, 가족에 대해 느낀 점을 토해내고 싶은데 표현 방법이 뭘지 20대에 혼자 궁리를 많이 했다. 카메라를 가지면서 이걸로 뭔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무슨 창작이냐, 차라리 북한에 가서 하라’고 했다는 일화를 봤다.

최근에 오사카 출신의 김시종 시인과 대담을 했다. 조총련의 모체가 되는 조직에 있다가 나온 분인데 〈화산도〉를 쓴 김석범 선생과 함께 4·3 관련 작가로 유명하다. 그분이 “예전에 양영희씨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다”라고 하더라. 아버지는 조총련에 비판적인 사람과도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한잔 하자고 하는 편이다. 김 선생을 찾아가 “딸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일본에서 책도 냈으니 영화계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딸에게 소개해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더라. 너무 놀랐다. 오사카 신문에 미디어 저널리스트로 내가 소개됐을 때도 어머니가 신문을 사러 갔더니 ‘아까 어떤 아저씨가 따님 나왔다며 다 사갔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 집 안을 뒤졌더니 옷장에서 신문이 나왔다.

ⓒ공동취재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 양공선씨(왼쪽)와 양 감독. ⓒ마음산책 제공

한때 집 1층에는 평양 가족 사진이, 2층에는 김일성 사진이 있었고 3층 본인 방에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고 했는데. 그런 환경이 창작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

여섯 살에 갑자기 오빠 세 명이 사라졌다. 트라우마이기도 하고 물음표가 많이 남았다. 오빠들이 어디 갔지? 왜 안 돌아오지?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한다면서도 엄마 아빠의 표정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림이 동영상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거기(북한)가 지상낙원이라고 하는데 오빠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눈으로 보기 전에 못 믿겠더라. 옛날부터 직접 보고 만진 게 아니면 납득을 못했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 북한에 가보고, 나는 정말 여기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상이 많은 게 싫었다. 우상화가 싫었다. 모든 종류의 우상을 싫어해서 아이돌도 싫어했다.

자라온 공동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면서 결국 가족에 천착하게 됐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천천히 응시한다고 할까. 벗어난다는 말만 하고 전혀 못 벗어나는 사람을 많이 봤다.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한국 이름을 열심히 감추는 식이다. 내가 해방되고 싶다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니다. 20대의 고민도 그거였다. 어떤 그릇에 무엇을 담을까. 카메라에,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를 해부하듯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작하고 보니 26년이나 걸려버렸다. 이제 정말 벗어난 것 같다. 지금부터는 재일동포에 대해 그리더라도 픽션으로, 소재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유로워지는 데 26년 걸렸다.

예전에 가족 다큐가 끝나야 내가 정말 일곱 살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여섯 살 때 오빠와 헤어졌으니까 이제 겨우 일곱 살이 된 거다. 엊그제 〈더 글로리〉를 보니까 주인공이 (학폭에 대한 복수를 한 다음에야)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 됐다고 하던데, 그래서 같은 말은 못하겠다(웃음).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부모의 삶이나 선택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제주 4·3을 경험한 어머니를 통해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불편해졌다고 했는데.

엄마를 탓할 수 있으면 좋은데 이해하게 되면 불편하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써야 할 에너지가 많아져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 잘 해줬던 것만 기억난다. 사상이나 가치관은 안 맞았지만 아버지와 아들, 나를 위해 열심히 사는 엄마였다. 인스턴트 라면을 먹지 말라며 항상 요리를 해줬고 생일에는 내 나이 숫자만큼의 장미꽃을 방에 놓아두었다. 연극·영화를 보러 다닐 때 아빠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해준 사람도, 미국 갈 때 지지해준 사람도 엄마였다. 필요할 때는 내 편에 서주었다. 어머니가 나중에 4·3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면서 듣고 많이 놀랐다.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왼쪽)가 딸 부부와 함께 제주도를 방문해 4.3의 기억을 되짚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왼쪽)가 딸 부부와 함께 제주도를 방문해 4.3의 기억을 되짚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가족 영화를 만들면서 북한의 가족을 만날 수 없게 됐다. 잃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텐데.

내가 작품을 안 해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고 잃었다고 생각은 안 한다. 만나지 못해도 생각을 많이 하고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면서 만들었다. 내가 죽은 후에라도 조카 선화나 선화의 아이들이 이런 문제아에, 이상한 고모가 있었다고 웃으며 작품을 봐주면 고마울 것 같다.

소설 속 미영의 언니처럼 ‘즐거운 건 뭐든 다 해, 행복해지는 게 네 의무야’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나.

실제로 오빠가 한 말이다. 선화 아빠가 나랑 제일 통하는 오빠인데 100번 결혼하고 이혼해도 좋으니 재미있게만 살라고 했다. 가고 싶은 데 다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보고 싶은 걸 보라고. 돈이 없기 때문에 못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 자격이 없다면서(웃음). 남편과 재즈를 자주 들으러 간다. 해외에서 오는 재즈 뮤지션들은 50대라도 아직 아기라고 하더라. 그때부터 조금 맛을 낼 수 있다고. 체력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더 많이 (활동을) 해야 할 것 같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