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앙시장에는 돼지곱창 노점이 많았다. 돼지 소창을 삶고 고춧가루 양념을 넣어 철판에 볶아 내는 요리다.ⓒ시사IN 조남진

우리 때는 중3이 되면 연합고사 준비를 했다.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15년 연속 기출문제집〉 같은 걸 사서 보곤 했다. 나는 그때부터 좀 이상한 애여서 영어며 수학 쪽보다는 ‘가사’와 ‘가정’ 편을 열심히 보았다. 당시엔 남학생은 상업이나 공업(또는 농업, 수산업, 광업 등 실용 학문) 중 하나가 연합고사 시험과목이었고 여기에 기술은 필수였다. 그러니까 여학생은 가사와 가정, 남학생은 기술과 상업, 공업을 공부했다. 나는 당연히 가사와 가정을 볼 필요가 없었는데 그 기출문제집은 남녀 구별이 없어서 함께 묶여 있었다.

가사와 가정은 정말 신세계였다. 이렇게 재밌는 과목이 있다니. 세상에 흥미로운 글이 음식 글이다(당신이 보고 있는 이 칼럼처럼). 오므라이스, 샌드위치, 건포도와 사과 넣은 월도프 샐러드 만드는 법이 시험문제라니!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는 다같이 요리도 만들었는데, 중학생만 되면 남녀를 구분했다. 요즘은 알아보니 실용 과목에서 남녀를 가르지 않는다.

연합고사도 수능처럼 점수를 냈다. 서울 지역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 커트라인이 대개 200점 만점에 120점 내외였다. 연합고사란 수능처럼 지역별로 고교 입학시험을 통합으로 보고, 그 점수에 따라 고교 입시를 가르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건 당시 실업계 커트라인 점수가 굉장히 높았다는 점이다. 어떤 학교는 180점이 커트라인이었다. 특히 여상의 점수가 엄청나게 높았다. 그때 부모들은 살림 봐가며 여식의 진학 여부를 결정하곤 했다. 반에서 1, 2등 하던 우리 누나도 실업계를 갔다. 누나는 원서를 쓰고 온 날, 울지도 않고 담담하게 내게 말했다. “내가 얼른 돈 벌어야지 뭐.”

그 시절엔 그랬다. 중학교 한 반에 70명이면 10명 이상은 실업계를 갔다. 서울시내 학교는 대개 비슷했다. 남중의 실업계 지망생 10명 중에 다섯은 상고, 나머지는 공고였다. 가난한 나라였고, 대학보다 당장 먹고살 수 있는 실업계가 인기가 있었다. 집안은 가난한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

내 친구 진규도 그랬다. 아마도 그의 집이 먹고살 만했다면 인문계열의 고등학교를 가서, 명문 대학을 가는 코스를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공고를 선택했다. 1학기 말이던가, 담임선생님이 진규 부모님을 불러 면담을 했다. 진규 부모님은 집안 형편에 대해 단호하게 설명했고, 담임선생님도 물러섰다. 진규는 서울의 명문 공고에 갔다. 학교 앞에서 라면을 같이 먹던 우리도 각자 다른 길을 찾아 헤어졌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서울 중앙시장 근처였다. 비닐 천막을 친, 매운 고춧가루 양념 타는 냄새가 행인을 부르는 돼지곱창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트럭 배터리로 불을 밝히는 환한 전구 너머로 아는 얼굴이 보였다. 진규였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가슴팍에 군복처럼 주름 잡힌 큰 주머니가 두 개 달린 누런 작업복. 공고를 나와 울산의 어느 조선소에서 일한다는 말을 들었던 진규를 서울에서 보다니.

“사람 살 데가 아니더라. 엄청나게 큰 배 안에서 용접하는 일을 했어. 한낮에 일하려면 죽음이야. 배는 쇠로 만들지? 그게 달궈지면 어떻게 되겠니. 계란 깨서 올리면 바로 프라이가 된다고. 그 안에서 일하는 거야.” 진규는 그 일을 ‘철판야키’라고 했다. 당시 고급 요리로 인기 있던 일본식 뎃판야키. 한낮에는 배 안이 50℃를 넘는다고 했다. 그의 동료 중에는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다녀온 선배들이 많았는데, 사우디보다 더 힘든 게 대한민국 조선소라고 했다. “돈은 아주 조금 줘. 우리 회사가 하청에 하청이거든.” 조선소니 하청이니 하는 게 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적당히 술집과 학교를 오가는 룸펜급의 복학생이었다. 그는 식은 돼지곱창에 소주를 털어넣고 말했다. “조선소 떠나서 요샌 서울에서 설비 배운다. 냉동창고 같은 데 기계 고치는 일이야. 나중에 먹고살자면 이게 낫겠다 싶어서. 배 일 안 하니 살 것 같다.”

그의 말 중에서 기억하는 건 악몽에 관해서였다. 자다가 자주 진땀을 흘리고 이불을 적시는데, 영락없이 한여름 폭염에 절어 배 안에서 용접하는 꿈이라고 했다. “작업하다가 종종 작업복을 벗어 비틀어 짜면 땀이 흘러내리거든? 진짜야. 3교대도 아니고 우린 2교대야. 조선소는 24시간 돌아가거든. 우리 같은 하청들은 교대 개념도 없다. 돈내기(도급)라고. 하여간 일을 마치고 다들 옷 갈아입는데 등에서 소금이 떨어져. 반장님이 그랬지. 한 달만 소금 모으면 김장도 담근다고. 그러면 다른 선배가 거드는 거야. 밤에 구내식당 사람들이 라커에 와서 소금 걷어간다고. 초짜들 놀리는 말이었지만 처음엔 진짜인 줄 알았지. 맛을 봤더니 맛소금보다 더 짜.”

녀석이 돼지곱창을 추가로 시켰던가. 그때 중앙시장 근처에는 돼지곱창 노점이 정말 많았다. 가까운 마장동에서 돼지 소창을 사다가 바락바락 빨아서 삶은 후 고춧가루 양념 넣고 철판에 볶아 내는 요리다. 원래는 왕십리가 원조였다고 하는. 얇은 장방형 스테인리스에 수북하게 담아 냈다. 이놈이 식으면 맛이 묘해진다. 당면이 불어서 검불처럼 엉키는데 매운 양념이 들러붙어 떡이 진다. 이쯤에 아줌마에게 부탁해 한 번 더 볶는데 손님들이 먹다 남긴 소주병을 뒤집어서 아낌없이 붓는다. 떡 진 양념과 당면이 술술 풀려서 또 먹을 만하게 된다.

“없이 하는 장사로는 최고다”

냉동창고 일도 만만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여름에 솜 넣은 미군용 ‘돕바’를 입고 일한다고 했다. 오리털 파카 같은 건 구경할 수 없던 때였다. “요새는 얼어 죽는 꿈을 꾼다. 아주 팔자가 희한하다.” 진규가 냉동창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혼을 했고, 다들 밥벌이하느라 바빴다.

페이스북이 진규의 소식을 알려왔다. 다시 중앙시장에서 만났다. 30년 만이던가. 돼지곱창 안주였다. 여전히 매웠고, 아린 속에 찬 소주를 붓는 방식으로 마셨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주 도수만 25°에서 18°로 낮아졌고 우리는 늙었다. 진규는 어쩌다가 그 골목에서 돼지곱창 노점을 인수해서 한동안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한 사람 건너 식당 차리고 카페나 술집 하는 나라다운 일이었달까. 기술자였던 진규는 곱창을 볶고, 글 쓰던 나는 파스타를 볶는다. 다들 볶고 있으니 사먹는 건 누구의 몫인지. 하기야 식당 주인들이 돌려막기 하듯 다른 식당 밥을 팔아주며 서로 버티는 건 아닐까.

진규는 어찌어찌 매물로 나온 돼지곱창 노점을 인수했다고 했다. 장사가 제법 되었다. “그 자리가 애매하게 남의 땅덩어리랑 물려 있었는데 수십 년간 장사해오던 자리니까 믿고 인수했지. 웬걸, 반년쯤 됐을까, 그 가게 뒤를 다 허물고 땅을 파더니 아파트를 짓는 거야. 가게 한쪽 절반이 싹둑 사라졌어. 허허.”

게다가 풍물 중고시장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손님이 줄고, 매기가 사라졌다. 한동안 그 자리는 아파트 터를 파놓은 벼랑 옆에 붙어서 장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결국 손들고 나왔다. 다 정리하니 남아 있는 게 일수 찍는 공책이었단다. 사채도 얻어 썼던 것이다. 곱창볶음은 식었고 소주만 줄어들었다. 진규는 배 만드는 도시로 가서 품을 팔다가 일거리가 없어져서 손을 놓았다. 다시 사채라도 꿔서 돼지곱창집을 해볼까 궁리 중이라고 했다.

“그래도 없이 하는 장사로는 돼지곱창볶음이 최고다. 원가 싸지, 맛있지. 그치 친구야?” 아직도 한 접시에 1만원짜리 술안주다. 허기와 매운 갈증을 채워주던 서울 변두리 음식의 작은 역사를 진규가 다시 이어갈 모양이다. 네 아버지가 널 인문계 보내고 번듯하게 대학 갔더라면 어땠겠니,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기자명 박찬일 (셰프)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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