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은 가득 찼고 질문은 쏟아졌다

뜨거운 2시간 30분이었다. 지난 1월7일 오후 7시~9시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강당에서 〈시사IN〉 신년강좌 제1탄 ‘박원순에게 하승창이 대안경제를 묻다-위기의 경제, 위기의 사회, 그 대안과 해법을 상상한다’를 진행했다. 이날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은 긴 시간 흐트러짐 없이 놀라운 집중력과 지적 호기심을 보여주었다. 주최 측이 중간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밤새워 이어졌을 듯한 질문 세례에 박원순 변호사는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사IN 한향란질문자로 나선 하승창 위원장(오른쪽)은 박원순 변호사(왼쪽)에게 비판만 하지 말고, 유례없는 경제 한파를 이겨낼 대안과 해법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날 청중의 면면은 다양했다. 오직 〈시사IN〉 강좌를 듣기 위해 전북 김제에서 기차를 타고 온 부부 독자가 있는가 하면 새로 사귄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강연장을 찾은 독자, 중·고생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이 출동한 부부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강좌 신청이 일찌감치 마감되는 바람에 강좌를 신청하는 데 실패했지만 서서라도 강의를 듣겠다며 무작정 강연장을 찾은 열혈 독자도 있었다. 〈시사IN〉은 2월 중순까지 이어질 신년 강좌의 핵심 내용을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주


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를 잇달아 ‘창업’한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사회 운동의 ‘대부’다. 그러나 이번 강좌에서 그에게 던져진 숙제는 위기에 처한 시민사회 단체의 진로가 아닌, 바로 먹고사는 문제다. 질문자로 나선 하승창 시민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전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은 조심스럽게 “경제 전문가도 아니신데…”라며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박 변호사는 “내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라고? 오히려 진정한 (경제) 전문가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그의 자신감은 전라남도 광양에서부터 캐나다 밴쿠버까지, 시골 할머니부터 내로라하는 영국 기업의 CEO까지 발로 뛰며 찾은 그만의 비책이 담긴 수첩에서 비롯된다.

이날 박 변호사가 제시한 대안은 ‘작지만 현장인 지역에 뿌리를 둔 사회적 기업’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과연 가능할까? 소기업 창업 컨설턴트로 변신한 그의 수첩에 담긴 비책을 다섯 가지 열쇠말로 정리했다. 

▒ 사회적 기업

“2006년 다보스 포럼에서 가장 주목받은 이들은 누구일까?” 박 변호사의 물음에 객석에서 ‘각국의 정치 지도자’ ‘대기업 CEO’이라는 답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기업가들이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기업이 ‘사회주의’ 기업이냐고 묻기도 하더라. 사회적 기업은 자선이라는 가치를 기업적 방식으로 실현하는 회사인데, 바로 아름다운재단이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윤을 창출하면서 좋은 일까지 하는 기업이 있을까?’라는 의문에 박 변호사는 발로 뛰며 조사한 영국의 사례를 보여줬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 무려 5만5000개 활약하고 있는데, 이들 기업은 전체 일자리의 5%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의 한 해 매출액이 50조원에 달해 국내총생산액(GDP)의 1%를 차지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영국 정부는 사회적 기업의 효용에 눈을 떠 지난 2006년부터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자원을 재활용해 사회적 기업이 만든 제품도  얼마든지 ‘명품’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며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을 표방하며 유럽의 ‘신상족’을 사로잡은 프라이탁 가방이 대표적이다. 폐기처분되는 시트나 안전벨트 등을 재활용해 만든 프라이탁 가방은 투박하지만 우리 돈 30만원이 넘는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이뿐인가. 박 변호사는 지역 자체를 재활용해 대박을 터뜨린 사회적 기업도 소개했다. 영국 콘월 지역의 에덴 프로젝트사다. 이 지역은 우리의 강원도 정선과 똑같이 ‘지나가는 개들도 파운드를 입에 물고 다녔을 만큼’ 광산업이 성행했지만 폐광 지역으로 바뀌면서 쇠퇴했다. 영국은 폐광 지역에 우리처럼 도박 산업인 카지노를 세운 게 아니라, 에덴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돔 형식의 실내 식물원에는 개장했다. 2001년 문을 연 식물원은 첫해에만 관광객이 무려 1억9600만명이나 찾았다. 

ⓒ시사IN 한향란박원순 변호사(위)는 신년강좌 참석자 모두에게 ‘희망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 현장의 틈새

사회적 기업이라는 취지는 좋은데, 약육강식의 룰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버텨낼 재간이 있을까? 박 변호사는 “어디든 틈새는 있기 마련이다”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으면 아무리 찾아도 틈이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녹색 뉴딜’도 그가 보기에는 책상에 앉아서 내놓은 대책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 지하벙커에 모여 비상대책을 논의해서 나온 대책이라는 게 결국 대기업인 ‘건설족’의 배만 채우고, 지역에서는 단순 일용직 일자리만 창출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변호사는 ‘현장’에서 틈새시장의 가능성을 찾았다. 그는 “틈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발아래 있다”라고 강조했다. 물론 현장을 찾는다고 해서 틈새가 저절로 보이는 건 아니다. 역발상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가 예로 든 역발상은 러그마크 인증제다. 네팔·인도·파키스탄 지역에서 생산하는 카펫이나 축구공은 대표적 제3세계 아동 착취 제품이다. 하지만 러그마크를 새긴 카펫은 ‘아동의 노동으로 만들지 않았다(No Child Labor)’는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가 러그마크 회원사는 일부 수익금을 이 지역의 아동 교육이나 복지에 쓰고 있다. 최근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러그마크 인증 카펫 200만 장이 유럽 등에 수출되기도 했다.

‘생산자에게는 희망을, 구매자에게는 기쁨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박 변호사가 직접 운영하는 공정 무역 중 하나인 ‘아름다운 커피’도 틈새를 노린 경우다. ‘아름다운 커피’의 월 매출액은 현재 1억원을 넘어섰다.

▒ 지역 그리고 농촌

그렇다면 역발상이 가능한 틈새는 어디에 많을까?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발아래는’ 바로 지역, 특히 농촌이야말로 사회적 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이라고 그는 제시했다. 박 변호사는 “지역과 농촌이야말로 블루오션이다”고 정의했다.

박 변호사는 블루오션을 개척하며 맹활약하고 있는 선각자들을 소개했다. 예컨대 3대에 걸쳐 70년간 국내 굴지의 매실농원을 가꿔온 ‘매실 명가’인 전라남도 광양 청매실 농장의 주인 홍쌍리 여사 등이 그들이다. “홍 여사께 한 해 매출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매출액이 언론에 노출될까 봐 말하지 않더라. 여러분의 상상 이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홍 여사는 희귀한 존재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경우 수많은 ‘홍 여사’가 지역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소시지 먹을거리와 관련한 브랜드만 4000개. 이들은 탄탄한 지역 브랜드로 미국의 대기업에도 끄떡없이 맞서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향토 기업의 뿌리가 탄탄하다. 우리는 전국 어디를 가든 라면이나 과자가 단일 제품이기 일쑤지만, 일본에 가보면 작은 시골역이나 지방 공항에도 지역 특산품이 즐비하다.

현재 일본에서는 4000곳이 넘는 지역의 특산 명주가 생산된다. 그는 “JAL 항공을 타면 승객들에게 일본 전통주를 주는데, 우리의 KAL 항공을 타면 위스키와 포도주만 준다. 이것이 지역 경쟁력을 상실한 우리의 현실이다”라고 꼬집었다.

▒ 창의성

틈새가 널려 있는 지역, 농촌으로 내려가도 대안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박 변호사는 대기업 유치에만 목매는 지역 자치단체의 전략을 질타했다. 이들 기업은 수지가 맞지 않는 순간 철수하는 ‘메뚜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는 레드오션을 블루오션으로 바꾸는 처방전은 ‘창의성’에 있다고 제시했다.

창의성이라는 처방전이 가장 잘 통하는 분야로 문화와 관광을 꼽았다. 박 변호사는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슈메이너스를 예로 들었다. 한때 흥행하던 제재업이 볼품없이 쇠퇴하던 이 마을은 1982년부터 지방단체와 주민들이 손잡고 자신들의 마을 역사를 집집 담장마다 벽화로 담았다. 벽화 하나 덕에 이 마을은 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박 변호사는 “한국적이면서, 지역에 퍼져 있는 한옥을 숙소로 활용하는 창의적인 발상만 하면 훌륭한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끼’로 뭉친 젊은 디자이너들이 모여 있는 홍대앞 문화 거리 역시 정부나 지방 자치단체에서 지원을 보탠다면 세계적인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는 곳이다.

▒ 소기업

“1만명을 고용한 기업을 한 개 유치하기는 어려워도 한 명을 고용한 1만 개 기업을 유치하기는 쉽다.” 일본 도쿄 인근에 있는 미타카 시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내건 슬로건이다. 미타카이즘이야말로 정부와 기업 민간단체가 손을 잡고 지역도 살리면서, 사람도, 기업도 살리는 대안이라고 그는 말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박 변호사는 꿈이 하나 있다고 말했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을 뜯어고치자는 것이다. “헌법을 개정하되, 1조1항을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소기업 사장이 될 수 있다’로 바꾸자.” 그의 말에 청중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박 변호사가 퍼뜨린 ‘희망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되는 순간이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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