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미숙은 뜨거운 사람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뜨거워진다. 멋지고 그럴싸한 뜨거움은 아니다. 찌질하고 못생긴 뜨거움이다. 그럼에도 양미숙은 그걸 감출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다. 이 지점에서 양미숙이 앓는 안면홍조증이라는 질병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속내를 감추거나 가장할 수 없으니, 감정이고 욕망이고 모두 솔직하게 드러내버리는 것이다. 단지 드러내는 것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양미숙의 희소성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게 참 좋았다. 모두가 쿨하고 싶어하는 시대다. 이 나라가 쿨 에너지로 움직인다고 역설하는 학자도 있지 않는가. 속내를 그럴싸하게 감춰 태연하고 냉정하게 행동할수록 사회물 잘 먹은 어른이라고 평가받는 세상이다. 꽁꽁 싸매 잘 감추고 짙은 화장술로 덮어낼수록 그(녀)의 시장가치는 상한가를 친다.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는 모습은 평가절하된다. 누군가의 절박함은 한줌의 실소로 무마되기 일쑤다. 이 안에서 ‘아이고 난 내가 창피해’라고 솔직하게 칭얼거렸을 때, 사랑받고 싶어서 노골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그 광경은 하나의 파격이 된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그런 환기와 파격을 끊임없이 안겨준다.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이 환기는 웃음으로 호감으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가 양미숙처럼 살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사람을 가려내 인정하고 아낄 수 있는 눈 정도는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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