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르티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된 것은 쿠바인 가이드 말루(본명 루이사 마리아·30) 덕분이다. 말루는 쿠바 관광청 산하 국영 여행사인 ‘쿠바난 컴퍼니’ 직원이다. 쿠바에는 국영 여행사밖에 없다. 관광산업이 국가 전략산업이기 때문이다. 최대의 외화벌이 사업이자 외국인 전용 화폐 쿡(CUC)을 만질 기회가 많아서 유능한 인재가 몰린다. 말루는 초·중학교 때 수학과 화학 경시대회를 휩쓸어 쿠바 최고의 영재학교인 레닌고에 입학한 재원이다. 회계사 자격증이 있고, 아바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의 베트남어 통역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베트남 하노이 대학에서도 2년간 공부했다.

ⓒ시사IN 남문희아바나 시내에 있는 쿠바의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 동상.

호세 마르티는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시인·대문호로 쿠바를 넘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가냘픈 몸매에 약간은 선병질적으로 보이는 그를 쿠바 사람들은 왜 그토록 떠받드는 걸까.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 역시 말루를 통해서였다. 여행 사흘째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는 중부의 해안도시 시엔푸에고스로 향하고 있었다. 시엔푸에고스는 트리니다드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도시다. 트리니다드가 스페인 점령 초기인 16세기 노예무역으로 번성했던 데 비해 이곳은 1800년대에 조성된 신도시였다. 쿠바에서 가장 큰 프라도 거리(도로 사이에 공원이 있는 거리)가 있고, 아바나의 말레콘 방파제보다 더 아름다운 방파제가 있으며, 스퀘어(광장)를 먼저 조성하고 성당과 행정기관을 그 주변에 배치하는 스페인식 도시 건설의 전범을 보여주는 곳이다. 쿠바 혁명의 군사지도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이 바뀌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주도한 1959년의 쿠바 혁명에 이르기까지 쿠바의 독립운동은 3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라는 인물이 스페인을 상대로 벌인 10년 전쟁(1868~1878년). 대부호였던 그는 다른 부호들까지 설득해 농노들을 해방시킨 다음 민병대를 조직해 독립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다음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호세 마르티였다. 1853년생인 그는 17세에 이미 세스페데스의 1차 독립전쟁에 참여했다가 두 차례나 스페인으로 끌려갔다. 그 후 멕시코를 거쳐 뉴욕에서 망명 생활을 한 15년 동안 미국 사회를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이때의 문제의식으로 라틴아메리카인의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1892년에는 직접 쿠바 혁명당을 조직해 행동에 나섰고 그 귀결이 바로 제2차 독립전쟁(1895~ 1898년)이었다.

ⓒ시사IN 남문희쿠바인 가이드 말루.

‘쿠바 혁명의 두뇌’였던 호세 마르티

말루는 호세 마르티의 2차 독립전쟁과 피델 카스트로의 1959년 쿠바 혁명(3차 독립전쟁) 사이에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호세 마르티의 전략을 피델이 쿠바 혁명에서 그대로 계승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호세 마르티야말로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피델 카스트로가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쿠바 혁명의 두뇌’였다고 극찬했다.

쿠바에는 호세 마르티 이전에 세스페데스의 10년 전쟁 외에도 여러 차례의 독립 시도가 있었으나 다 실패로 돌아갔다. 호세 마르티는 이전 독립운동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대안을 마련했다. 실패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자금 부족으로 식량과 무기가 바닥나는 경우. 둘째, 스페인계 백인과 흑인, 혼혈 등의 복잡한 인종 구성 및 빈부 격차 등으로 단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셋째, 전쟁의 패턴이 매번 똑같아서 상대가 쉽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 대책으로 호세 마르티는 국제사회에 호소해 무기와 식량을 마련할 만큼의 자금을 먼저 확보했다. 그리고 ‘쿠바는 하나’라는 단결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문맹퇴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심지어 병사들로 하여금 ‘우리는 하나의 쿠바다’라는 문구를 써서 갖고 다니게 했다. 그러면서 쿠바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전쟁 방식을 창안했다. 바로 산악에서 시작해 도시로 포위해 들어가는 게릴라 전술이다. 스페인은 점령 초기부터 전국에 7개 도시를 건설해 이를 중심으로 쿠바를 지배했다. 대신 동남부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 등 산악지역에는 행정력이나 군사력이 미치지 못했다. 호세 마르티의 계획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도시로 포위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최종 목적지는 수도 아바나. 쿠바의 혁명 경험에서 유래해 서구의 6·8혁명으로 확산된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이 출발한 곳은 바로 호세 마르티였던 것이다.

1892년 쿠바 혁명당을 창당해 때를 기다린 호세 마르티는 1895년 4월1일 동지 5명과 함께 배를 타고 도미니카공화국을 출발했다. 목적지인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이 있는 쿠바 동부 해안에 상륙한 것은 4월11일. 그러나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늘 대열의 선두에 섰던 그는 한 달 뒤인 5월19일 스페인군의 매복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2세. 그가 불길을 댕긴 2차 독립전쟁은 그의 유지를 받든 고메즈 장군과  안토니오 마세오 장군에 의해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스페인군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미국이 1898년 메인호 사건을 조작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며 개입하지만 않았다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시사IN 남문희시엔푸에고스는 스페인식 도시 건설의 전범을 보여준다.

말루의 얘기를 힌트 삼아 피델 카스트로와 호세 마르티의 관계를 조사해봤다.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 법대 대학생 시절 미군이 호세 마르티 동상을 군홧발로 밟고 올라서는 것에 격분해 항의 시위를 주동할 만큼 열렬한 호세 마르티 숭배자였다고 한다. 피델이 주동해 나중에 쿠바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53년 7월26일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 역시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항거였다. 당시 체포된 피델에게 누군가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의 정신적 지도자는 호세 마르티라고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1956년 11월24일 피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를 포함한 82명의 대원과 함께 그란마(Granma·할머니라는 뜻)호라는 낡은 요트를 타고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잠입함으로써 혁명의 불길을 일으킨 사건이야말로 60여 년 전인 1895년 4월1일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호세 마르티에 대한 ‘오마주’였던 셈이다.

말루의 힌트가 아니었다면 쿠바 혁명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대 젊은이 82명이 허름한 요트를 타고 돈키호테처럼 해안에 상륙했다가 정부군의 공격으로 다 죽고 고작 17명이 살아남아 3년 후 거짓말처럼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마치 만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호세 마르티라는 인물을 대입해 생각해보니 비로소 현실감이 느껴졌다. 쿠바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카스트로라는 인물에 의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세대의 경험과 교훈의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호세 마르티의 진가는 혁명 이후에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사상과 철학 속에 혁명 이후 쿠바 사회에 대한 설계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쿠바 사람들은 오늘날 쿠바를 특징짓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인종차별 철폐 등이 그로부터 비롯했다고 여긴다.

쿠바에서 돌아온 후 호세 마르티의 저서나 그에 관한 책이 있는지 찾아봤다. 유감스럽게도 국내에는 아직 그에 대한 책이 없었다. 논문 몇 편이 있을 뿐인데, 크게 세 가지가 눈에 띈다. 19~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우리의 적은 미국도 유럽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며 자신들의 현실에 절망했다. 차라리 ‘미국과 유럽이 되자’고 부르짖을 정도였다. 미국은 범미주의를 내세우며 라틴아메리카를 자신의 영향권 아래 묶어두려 했다. 이때 호세 마르티는 〈우리의 아메리카〉라는 책을 통해 ‘우리의 아메리카와 우리가 아닌 아메리카’를 구분하며 미국과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그가 강조한 ‘우리의 아메리카’ 안에서 ‘모두 다 형제이며 가족’인 개별 국가들이 가장 절망했던 문제가 바로 스페인 식민통치에 의해 초래된 ‘혼종’, 즉 여러 인종의 뒤섞임이었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런 다양성과 혼종을 극복해 조화롭고 예술적인 영혼의 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백인·혼혈·흑인을 초월한 존재이며 쿠바인 또한 백인·혼혈·흑인을 초월한 존재’라는 그의 명제 앞에서 인종차별 정책이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그는 미국과 ‘우리의 아메리카’의 차이는 ‘내부의 비유럽계 타자(흑인과 인디오 등 원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인종차별 철폐를 라틴아메리카 정체성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렸다. 혁명 후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추진된 인종차별 철폐는 바로 ‘모든 차별은 평화의 적’이라고 규정한 호세 마르티의 현대적 철학에 의한 것이다. 그런 호세 마르티의 철학을 쿠바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가르친다. “그는 100년 전 사람이고 나는 2016년 사람이지만 우리는 호세가 생각한 대로 생각한다.” 말루의 얘기를 들으며, 한 나라의 국부, 즉 정신적 지주는 바로 호세 마르티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쿠바 여행 4일째,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향했다. 산타클라라는 1958년 12월 100명도 안 되는 체 게바라 군이 매복해 있다가 게릴라군의 본진이 있는 시에라마에스트라를 치기 위해 열차를 타고 가던 바티스타군 408명을 제압함으로써 혁명의 물줄기를 바꾼 곳이다. 체 게바라 추모관과 기념관이 있어 그를 기리는 전 세계인에게는 성지와 같다. 말루는 “산타클라라에 갈 때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매번 전율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남문희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를 기리는 세계인의 성지다. 위는 체 게바라 기념관.

정치적 자유를 넘어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인 체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게릴라 훈련을 같이 받고 1956년 그란마호에 동승한다. 애초에는 종군 의사 자격이었으나 의사 가방 대신 총을 들면서 탁월한 군사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발휘해 카스트로에 이어 2인자 지위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쿠바인들은 그의 인간적 면모에 더욱 감동했다. 게릴라 활동 중 지병인 천식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칠까 봐 숨이 막힐 때까지 참았다든지, 전투에서는 항상 남보다 앞에 섰고, 전투에서 돌아오면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의사로서 환자를 돌봤다. 혁명 후 피델이 총리를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산업부 장관이 되어 노동자·농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헌신하다 쿠바에서는 할 일을 다했다며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갔다가 최후를 맞은 것 등 쿠바인의 눈에 비친 그의 삶은 초지일관 ‘남을 위해 살다 간 삶’이었다. “쿠바 혁명의 여러 영웅이 국민들 삶에 영향을 줬지만 체의 영향이 제일 크다. 그는 우리 어머니 세대뿐 아니라 우리 세대 그리고 쿠바의 모든 사람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쿠바 사람들은 모두 체 게바라처럼 살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남을 돕는 것이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를 넘어 영혼이 자유로운(freedom of  spirit) 삶을 사는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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