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0일 정오께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5반 창현군의 아버지 이남석씨는 국회 본청 앞에서 경비원에게 가로막혔다. “화장실 좀 같이 쓰자!”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빽빽하게 선 경비원 뒤로 문이 열렸다. 국회 관계자가 점심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씨를 위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날 단원고 유가족 10여 명은 한뎃잠을 잤다. 등산용 매트를 깔고, 두툼한 이불에 겨울 점퍼를 입었다. 입김은 여전했다.

하루 전날인 10월29일 오전 11시15분께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실종자 가족 100여 명은 외쳤다. “살려주세요!” “수빈아!” “예지야!”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200일 전에도 담요와 핫팩을 깔고 노숙했다. 지금처럼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정부와 국회는 귀를 닫았다.

5월8일, KBS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막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밤을 새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리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라고 한 유가족은 말했다. 시작일 뿐이었다. 5월27일, 국정조사 계획서 채택을 요구하며 국회에서도 밤샘 농성을 했다. 7월12일, 세월호 사건 조사 및 보상에 관한 입법 TF에 유가족을 참여시킬 것을 요구하며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시사IN 이명익10월27일 저녁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앞두고 국회에서 노숙 농성에 들어갔다.


정부가 외면하는 동안 유가족은 거리로 나섰다. 7월14일 국회와 광화문광장에서 유가족 15명이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다음 날 생존 학생도 도보 행진에 나섰다. 7월23일, 세월호 100일을 하루 앞두고 부모도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서울시청 분향소까지 진상 규명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염원하는 발걸음이었다. 폭우 속에서 유가족은 경찰에 막혀 갈 길을 잃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세월호 특별법에 합의했지만…

그에 앞선 7월8일, 단원고 2학년8반 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승현군의 누나 아름씨, 2학년4반 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가 38일간 750㎞ 도보 순례를 했다. 유민양 아버지 김영오씨는 40일 단식 끝에 8월22일, 병원으로 이송됐다. 한뎃잠을 자고, 걷고, 굶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유가족은 서울 국회, 광화문광장,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농성장, 안산 분향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9월22일 이후 서울 시내 18개 대학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했다. 현재 하루 10건 이상 신청이 들어오면서 내부에서 소화하기가 벅찰 정도라고 한다. 지금까지 세월호 특별법 서명에 참여한 국민은 530여만 명에 이른다.

10월31일, 6개월 동안 싸웠던 세월호 특별법이 사실상 합의되었다. 세월호 참사 199일 만이다. 2학년7반 민우군 아버지 이종철씨는 “어떻게 내 자식의 운명이 달라졌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거리에서 있어야 할지 모른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후 유가족이 지속적으로 요구한 건 진상 규명이었다. 진상 규명은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했다. 이제 시작이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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