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죽어서 국강상에 묻혔으며, 크게 나라를 넓혔고, 백성을 평안케 한 왕 중의 왕이라는 어마어마한 시호가 붙은 고구려 19대 왕 담덕. 〈삼국사기〉는 그를 광개토왕이라 했고 중국에서는 호태왕이라 했다. 그가 요즘 화제다. 그의 생전에 제작되었다고 믿어지는 비석이 지난해 7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서 발견됐다. 총 218자가 새겨진 이 비석은 지금까지 고구려인 당대에 새겨진 언어로는 최고(最古)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를 쓸 때 당대인이 새긴 금석문은 1차 사료로 중요하게 취급받는다. 고대사에 대한 원사료가 부족한 우리네 사정을 감안할 때 이번에 발견된 비석의 중요성은 신문 1면감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호들갑은 고사하고 차분하고 냉정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이 비석이 현실적으로 우리 땅이 아닌 저 멀리 중국 지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지리적 거리감과 결국 현실 국가에서 우리 것이 아닌 중국의 것이라는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중국이 동북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를 변방의 종속된 정권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이와 관련된 모든 것에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우리 학계의 의심도 한몫을 했다. 실제 비가 발견되자마자 조작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서 떠났다. 직접 그 1600년 된 고대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이뤄지는 집안 박물관. 3년 만에 재개장 했다.
ⓒ이상엽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이뤄지는 집안 박물관. 3년 만에 재개장 했다.

중국 셴양에서 비행기를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퉁화를 거쳐 지안으로 갔다. 압록강변의 도시 지안은 유리왕 21년(AD 2년)에 도읍을 정한 뒤 장수왕 15년(AD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중심이었다. 북한과 압록강을 마주한 이곳은 남쪽으로 너른 평야가,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악지대가 펼쳐져 2000년 전에는 수도로 삼기 딱 좋았을 것이다. 버스터미널 근처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한 30분쯤 지났을까? 방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중국 공안(경찰)이었다. 전부터 이 지역에서 고구려 관련 유적들을 찍다가 공안에게 발각되어 추방됐다는 주변 동료 사진기자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던 터라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그냥 관광하러 온 것이다.”
“기자는 아닌가?”
“사진 찍으러 왔다.”
“한국인인데, 그럼 뭘 찍을 건가?”
“그냥 고구려 유적을 볼 거다.”
“그렇다면 압록강에 나가서 북한은 찍지 마라. 문제 생긴다.”
“알았다.”

지안에서 한국인은 도착하면서부터 감시를 받는 셈이다. 이곳이 국경도시니 ‘그쯤이야’ 할 수도 있지만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곳까지 왔으니 고구려의 현장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카메라를 챙겨 비석이 발견된 마셴을 찾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마선하 지구 적석총 무덤군. 이 지역에만 고구려 왕과 귀족 무덤 1000여기가 존재한다.
ⓒ이상엽 마선하 지구 적석총 무덤군. 이 지역에만 고구려 왕과 귀족 무덤 1000여기가 존재한다.

“원래 강바닥에 박혀 있던 돌”

마셴은 지안 중심에서 서쪽으로 5㎞ 정도 떨어진 향촌으로 고구려 시대 왕과 귀족의 무덤 1000여 기가 흩어져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이곳 마셴을 관통하는 마셴허를 서천이라 해 고구려왕 이름 중에 ‘서’자나 ‘천’자가 붙은 왕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일단 비석이 발견된 현장을 찾으려 했지만 간단치가 않았다. 중국 쪽에서 발표한 자료도 구체적이지 않을뿐더러 국내에서는 이곳을 방문한 취재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왕릉급 고분인 천추총에서 시작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탐문을 했다. 결국 상류 400m 지점, 마셴허 옆 옥수수 밭을 경작하는 종씨라는 사람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들었다.

“원래부터 강바닥에 박혀 있던 돌이라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건 줄은 몰랐지.”
“그것을 빨래판으로 사용한 겁니까?”
“아니. 그냥 비석 머리만 삐죽 튀어나온 상태였소.”
“그럼 어떻게 비석인 것을 알아본 겁니까?”
“동네 사람이 글자 흔적을 보고 문물국에 신고한 거지. 그런데 박물관에 저렇게 전시하는 것을 보면 무척 중요한 건데 보상금이 형편없었나 봐.”

인터뷰를 통해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비석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원래 서 있던 곳은 어디였을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된 호태왕릉. 중국 현지 관광객에게 고구려 왕릉은 그저 지방정권의 왕 무덤일 뿐이다.
ⓒ이상엽 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된 호태왕릉. 중국 현지 관광객에게 고구려 왕릉은 그저 지방정권의 왕 무덤일 뿐이다.

4월13일 서울 고려대에서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열린 ‘신발견 지안 고구려비 종합 검토’ 학술회의에 참석한 겅톄화(耿鐵華) 퉁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원 교수는 이 비석을 광개토왕이 그의 아버지 고국양왕의 능인 천추총에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미 광개토왕비를 통해 알려진 그의 행적에 따라 문헌사적으로 고증한 것이다. 하지만 높이 5m가 넘는 광개토왕비와 달리 사람 키밖에 되지 않는 비를 묘주로부터 400m나 멀리 세웠을 리 없고 천추총 앞에 세웠다면 비석이 제 발로 마셴허를 거슬러 상류로 올라갔다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국내 학자들은 겅 교수의 이야기를 반박하지 못했다. 현장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구려사 연구가 장벽에 놓였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이제 발견된 곳을 확인했으니 바로 그 비석을 볼 일이다. 지안에서 발견되어 지안 고구려비라 이름 붙여진 고구려비 외에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충주 고구려비와 지안 장군총 앞에 세워진 광개토왕비가 있다. 이번 비석은 앞서 발견된 두 비석에 선행하는 최고의 비다. 3년 전 문을 닫고 보수해서 재개관한 지안 박물관에 이 비가 세워졌다. 행정관청이 밀집한 시내 중심에 자리한 박물관은 지난 4월 초에 개관하면서 비석을 공개했다. 대외적으로 사진 한 장 공개하지 않으면서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로 공개하는 것이 신기했지만 가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새로 발견된 고구려 비석이 최근 전시되고 새로 문을 열었다. 일체의 사진 촬영이 불가한 것은 물론 도록도 없다.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이상엽 새로 발견된 고구려 비석이 최근 전시되고 새로 문을 열었다. 일체의 사진 촬영이 불가한 것은 물론 도록도 없다.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일단 박물관 입장료가 예상보다 비쌌다. 우리 돈 1만4000원. 대부분의 중국 성·시급 최고 박물관이 무료인 것에 비해 고가의 입장료를 징수했다. 입장할 때는 모든 소지품을 카운터에 맡겨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관람하면서 늘 뒤에 선 공안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특히 박물관 중앙에 설치한 지안 고구려비 앞에서는 휴대전화는커녕 메모장도 꺼내들 수 없었다. 사진을 찍지 못한 억울한 마음에 별도의 사진 자료나 안내문이 있는지 문의했다. 돌아온 답변은 일절 그런 것이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공개할 의지도,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문을 연 까닭은 뭘까? 동북공정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것은 아니다. 박물관을 돌아봤을 때 과거에 비해 더 심해졌다는 인상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인을 배려하는 듯한 인상도 있다. 이 의문은 지안에서 관광업을 하는 조선족 최 아무개씨를 만나며 풀렸다.

“4월이면 백두산에 들꽃 피는 계절 아닙니까. 한국에서 오는 모든 백두산 관광객은 이곳 지안에 들러 고구려 유적을 봅니다. 박물관은 이때가 돈을 벌 시기인 거죠. 70위안이나 되는 입장료를 낼 관광객은 한국 사람밖에 없습니다.”

결국 박물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 발견돼 연구 중인 비석을 반쯤만 공개하면서 한국인 관광객을 잡으려는 중국식 비즈니스인 셈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집안 최고의 관리중점 유물로 지정된 장군총.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에는 무장 공안까지 배치되어 있다. 한국은 고사하고 중국인들마저 불편한 시선을 느낀다.
ⓒ이상엽 집안 최고의 관리중점 유물로 지정된 장군총. 광개토왕 또는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에는 무장 공안까지 배치되어 있다. 한국은 고사하고 중국인들마저 불편한 시선을 느낀다.

유적 둘러싼 국가주의와 장삿속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중국은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두 해 전 북한이 단독으로 추진했던 것을 무산시켜가며 고구려를 둘로 나눈 사건이다. 중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지안의 고구려 유물을 정비하고 보완했다. 지금도 장군총과 광개토왕비는 중국 국가급 유물 유적인 AAAA급으로 분류돼 보호된다. 이 둘은 한국인이 지안에 들르면 꼭 보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백두산이 열리는 봄철이 오면 한국인 특별 관리를 위해 두 유적에는 공안이 배치되어 감시한다. 하지만 아파트촌에 둘러싸인 국내성이나 환도산성의 적석총들, 마셴허 지구의 고묘들은 방치되고 있다. 도시민들이 배출하는 쓰레기가 쌓이고 농민들은 적석총 여기저기서 돌을 빼다가 자신의 집 돌담을 만든다. 동북공정과 고구려 유적의 현실은 모순의 간극 속에 놓여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무색한 국내성의 풍경. 동네 주민들의 장터가 되어버렸다. 정겹긴 하지만 보호되지 못한다.
ⓒ이상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무색한 국내성의 풍경. 동네 주민들의 장터가 되어버렸다. 정겹긴 하지만 보호되지 못한다.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가 제기할 이야기는 많지 않다. 영토와 역사가 분리된 마당에 ‘밤 놓아라, 감 놓아라’ 했다가는 전처럼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고구려의 역사가 온전하게 한국으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힘들다. 고대사의 재발견과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에는 꽤 먼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헌 중에서 광개토왕비를 언급한 것은 1445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로, 금나라 황제의 성에 비가 서 있고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고 썼다. 이는 고려 공민왕 때 압록강을 넘어 지안을 통과했던 이성계가 본 것이다. 그곳이 바로 500년 가까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당시 누구도 몰랐다. 이는 조선조 내내 그랬다. 17세기에는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지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청조 말에 느슨한 틈을 타 19세기 말부터 다시 사람이 살면서 지안의 광개토왕비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문헌에 나오는 고구려이며 지안이 고구려 국내성이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광개토왕비. 비석을 보호하는 누각은 유리로 둘러치고 안에는 공안이 경비를 선다. 내부에서 일체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이상엽 광개토왕비. 비석을 보호하는 누각은 유리로 둘러치고 안에는 공안이 경비를 선다. 내부에서 일체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이 근대의 발견을 통해 한·중·일은 서로 다르게 고구려를 해석했고 지금도 그 논쟁은 학계를 넘어 국가 간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일제는 광개토왕 비문의 신묘년 조를 들어 한반도 남부는 일본이 장악해 고구려와 맞섰다며 지안의 비석을 도쿄에 가져와 전시해야 한다고 했고, 대한민국은 그 복제품을 만들어 독립기념관에 전시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이성시 교수(동아시아 역사 전공)는 “광복 후의 한국사 연구는 그 이전의 일본사 연구가 근대국가 형성기의 일본을 고대에 지나치게 투영하여 읽어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한국의 민족의식을 투영한 역사 해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광복 후 한국인에 의한 이른바 한·일 관계사 연구에서는 일본 민족에 대한 한민족의 우월성을 고대사 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의문의 여지없이 시도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중국은 여지없이 한조의 영향을 받은 지방 봉건정권이라 규정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상엽〈/font〉〈/div〉집안의 상징 삼족오. 고구려의 도시를 공공연하게 천명하지만 독립적인 고구려가 아닌 한나라 지도하에 유지된 지방정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상엽 집안의 상징 삼족오. 고구려의 도시를 공공연하게 천명하지만 독립적인 고구려가 아닌 한나라 지도하에 유지된 지방정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국가는 시간에 따라 확대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지리적 변경에 위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포함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 확고부동한 역사는 신기루이며 당대인의 이야기만이 진실에 근거한다. 고구려 최전성기를 누린 광개토왕비가 세워진 지 내년으로 1600년이 된다. 광개토왕비가 그의 아들 장수왕의 이야기라면 이번에 발견된 지안 고구려비는 광개토왕 본인의 이야기다. 새로 발견된 이 비석을 통해서는 차분하고 진지하게 담덕, 광개토왕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기자명 중국 지안·글/사진 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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