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와 박정희. 두 사람은 숙적이었다. 한 사람은 일본군을 탈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 사람은 일왕에게 혈서로 맹세하고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장교가 됐다. 그리고 만주에서 광복군과 싸웠다.

‘일본군’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장준하는 박정희의 ‘친일’과 ‘독재’에 대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한·일 회담, 베트남 파병, 10월 유신 등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결국 장준하는 서른일곱 번 체포되고 아홉 번 투옥당한다. 〈장준하 평전〉을 펴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당시 박정희의 정치적 라이벌이 김대중이었다면, 사상적 라이벌은 장준하였다”라고 회고했다.

1975년 8월17일 장준하는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라고 발표했다. 장준하의 몸에는 긁힌 흔적이 없었다.
지난 8월1일 장준하 유족이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오른쪽 뒤에 지름 6~7㎝ 구멍을 확인했다. 장준하 타살 의혹이 다시 점화됐다. 37주기 추모식이 열린 8월17일, 장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63)를 만났다.

 

ⓒ시사IN 윤무영장호권씨는 “부친의 사인을 조사하러 다니다가 테러를 당해 턱뼈가 부서진 일도 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가?
수신(修身)은 하셨는데 제가(齊家)는 안 하셨다. 가족보다는 나라를 사랑하시는 분이었다. 한창 힘들 때는 (아버지가) 어디 계시는지 알면 안 되는 처지였다. 24시간 도청을 당했다. 권력의 충견들이 미친개처럼 아버지를 물고 늘어졌는데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3족을 멸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이사를 서른여섯 번 했다. 어떤 곳에서는 2개월 만에 쫓겨난 적도 있다. 기관원들이 전세를 준 주인에게 압력을 넣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는 어떻게 지냈나.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직도 모이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직장을 얻으려고 돌아다녔는데 아는 분들이 미안하다고만 했다. 어렵게 취직을 하면 기관원이 사장을 협박했다. “장준하 집안을 왜 고용했느냐”라고. 

박정희 정권이 왜 부친을 탄압했다고 보는가?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 때 이런 말을 했다. “대한민국 백성이면 누구나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 딱 한 사람만 안 된다. 박정희다. 박정희는 민족반역자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란군 대령을 부친에게 보냈다. 대령이 봉투를 내미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돈 봉투였다. 부친이 봉투를 찢고 대령 뺨을 때렸다. 그래서 박정희는 요즘 말로 ‘섭외가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언제부터 박정희와 사이가 나빴던 건가?
박정희에게 아버지는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운 털이었다.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 대위가 됐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를 나왔다.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 후, 일본 육사교장에게 혈서를 보내면서 완전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 오카모토는 일본 낭인들을 데려와서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 육군 중위 이름이다. 이건 친일 정도가 아니라 충일(忠日)이다. 유신도 일본 놈들에게 배운 거다. 그는 완전히 일본인이 되고 싶어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시신을 보았는가? 〈문익환 평전〉을 보면 “높은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가 메고 있던 마호병이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포천 이동파출소 앞에 기관원들이 잔뜩 와 있었다. 시신이 누워 있었다. 보는 순간 ‘이게 뭐야’라는 말이 나왔다. 얼굴이 깨끗했다. 긁히고 뼈가 부러진 흔적도 없었다. 오른쪽 귀 뒤쪽에 피가 좀 나왔다. 살짝 구멍이 나 있었다.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밝힐 수가 없었다. 국가기관에 의뢰하면 시신을 어떻게 할 줄 모르니 맡길 수 없었다. 의사 세 명이 문상객으로 위장해 시신을 봤다. 귀 뒤쪽 뼈가 2㎝ 정도 함몰됐다. 성냥개비를 넣으니 다 들어갔다. 소 잡는 정으로 가격한 것으로 추측했다. 

부친의 사인을 밝히려 들지 않았나.
부친의 사인을 조사하고 다니다가 테러를 당해 턱뼈가 8조각으로 부서진 일도 있다. 6개월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로 야반도주했다. 박정희 사망 뒤 귀국했다가 전두환 정권에 쫓겨 다시 싱가포르로 떠났다. 2004년 24년 만에 귀국했다.

 

 

 

 

ⓒ시사IN 백승기장준하공원 제막식 및 37주기 추모식이 8월17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열렸다.

 


1994년과 2004년에도 진상조사를 했는데.
대통령이 진짜 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수사권을 줘야 했다.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권으로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수사할 수 없다. 그들이 협조해줄 리도 없다. “진상조사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두 번 다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부친의 유골을 관에서 꺼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새누리당에서는 부친의 죽음을 야당이 대선에서 이용하려고 한다는 말이 나온다.
작년 홍수로 아버지 묘가 붕괴되었다. 이장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친일파들이 묻힌 국립묘지에 모실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파주시장이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해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장준하 공원묘지를 만들었다. 왜 하필 대선을 앞두고 이장을 하게 되었냐고? 나는 ‘숙명’ ‘천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7년 박근혜 의원이 사과를 표했다.
2004년에 귀국했을 때 박근혜 쪽 사람에게서 한 번 만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쪽의 필요에 의해 한 번 이용당해준 것으로 끝이 났다(박 의원은 2007년 7월11일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씨가 살고 있는 서울 일원동의 아파트를 찾아 이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위로드린다. 장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뜨거우셨고, 민주주의 열정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저의 아버지와는 반대 입장에 계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고 믿고 있다.”-편집자)

그 뒤로는 다른 이야기가 없었나?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인간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일 뿐이다.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장준하가 타살이 됐더라도 박근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런 책임을 묻는다면 연좌제다. 그러나 박근혜가 정치를 한다면 다르다. 박근혜는 친일-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그 세력과 뭉쳐서 다시 집권하려고 한다.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과 같이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장준하의 죽음은 진행형이 된다. 박근혜가 아버지 죽음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내놓아야 한다.

유골이 공개되면서 타살 가능성이 제기됐다. 박근혜 의원은 이에 대해 “그거는 뭐 진상조사위에서 현장 목격자 등을 통해 조사가 쭉 이뤄지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개념이 없는 거다. 박근혜가 구더기들과 섞여서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 한다. 대통령에게 재조사를 요청할 거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범국민진상규명운동본부를 만들 것이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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