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저 웃거나 황급히 고개를 외로 꼴 뿐이다. 찰나의 탐색이 끝나고 질문이 이어진다. “어디서 오셨어요?” “무슨 띠세요?”

4월26일 서울 강남구 상록회관. 54명이 동그란 테이블 아홉 개에 나눠 앉았다. 꽃분홍 원피스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여자, 연두색 형광 넥타이를 매고 백구두를 신은 남자의 패션이 유난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레깅스와 브로치, 정장 속 조끼까지 저마다 의상에 신경을 쓴 눈치다. 모두 혼자 사는 60세 이상 노인이다. 이들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마련한 ‘희로애락 노년의 행복한 사랑 만들기’ 행사에 모여 짝 찾기에 나섰다.

노인들 ‘사랑 만들기’에 지원자 대거 몰려

 

ⓒ조우혜

 


묘한 긴장감과 화기애애함이 뒤섞인 세 시간이 지난 뒤 선택의 순간이 왔다. 각자 마음에 드는 상대를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적어 냈다. 성사된 커플에게만 개별 통보한다고 알린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용기 있게 공개 프러포즈를 할 사람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남성 두 명이 나섰다.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을 느꼈습니다”라고 외친 70대 남성이 60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정신숙 인구보건복지협회 고령화대책팀장은 “강원도에 사는 분이 참가하겠다고 문의 전화를 해올 정도로 행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실제로 오늘 부산에서 온 분도 있다. 노인들 사이에 이런 만남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지난해에 처음 행사를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올해는 ‘사랑 만들기’를 네 차례 진행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인천시도 ‘합독(合獨)제’를 펼쳤다. “목민관은 혼자 사는 노인들이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의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착안한 사업이다. 100명 모집에 15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려 자녀 동의서를 제출한 노인을 먼저 뽑았다.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반기에 한 번 더 행사를 열기로 했다. 합독제에 참가한 70대 남성은 “20년째 혼자 살았는데, 다녀와서 깨친 바가 많다. 이번에 잘 되지 않았는데 다음에 꼭 다시 나와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인천시 노인정책과 담당자는 “현장 반응이 엄청났다. 그날 26쌍이 맺어졌고, 한 달이 지난 요즘도 10쌍 정도가 만나고 있는 걸로 파악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정도이고,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을 것이다. 남녀 사이라는 게 ‘딱 사귄다’ 이렇게 규정하는 관계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조심스레 만나시는 분도 꽤 있는 걸로 안다”라고 귀띔했다.

연애하는 노인들, 삶의 활력 넘쳐

 

 

 

 

 

 

ⓒ조우혜새로운 ‘짝’을 만나고 싶은 노인들이 ‘합독제’에 참석했다. 현장은 젊은이들 미팅장 못지않게 뜨거웠다.

 

 

혼자 사는 노인(65세 이상) 100만 시대. 사별·이혼 등으로 혼자가 된 이들에게 사랑은 옛 추억만이 아니다. 노인종합복지관, 노인대학, 산 등에 다니며 만난 새 인연과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노인이 늘고 있다. 노인의 사랑을 그린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소리 소문 없이 관객 150만명을 넘어섰다. 2월에 개봉했는데 5월13일 현재 아직 상영 중이다. 장기 상영이 가능한 비결을 두고 〈그대를 사랑합니다〉 배급사 N.E.W의 담당자는 “젊은 사람이 주로 찾는 극장에 어르신도 많이 오셨다. 다양한 연령대 관객에게 꾸준히 사랑받았다”라고 말했다(20쪽 인터뷰 기사 참조). 그만큼 노년층의 공감을 얻었다는 말이다. 이제 노인의 사랑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남편과 사별한 지 7년이 된 김선영씨(가명·65)도 5년째 연애 중이다. 상대는 산악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성이다. “정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남편의 죽음 이후 우울증을 앓았던 그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조차 않던 때 찾아온 사랑에 다시 가슴이 뛰었다. 길을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남편과 연애하던 20대 이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자식들에게 ‘연애를 해 집안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더 부지런해졌고, 생활에 긴장감도 생겼다. 김씨는 기자와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해 말하다보니 보고 싶다”라며 연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연애가 노인에게 주는 긍정적 효과에 대해 〈사별한 여성 노인의 연애 체험〉(2011년)이라는 논문을 쓴 윤옥종 박사(이화여대·간호학과)는 이렇게 말한다. “노인복지관 관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유달리 활력이 있고 자신감에 차 있는 분들이 있더라.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연애의 활기가 어떻게 삶의 열정으로 분출되는지 분석하기 위해 연애하는 65세 이상 여성 10명을 만나서 인터뷰했다. 연애를 통해 참여자들이 적극 삶을 계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애가 삶의 활력소가 되기는 20대나 70대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거만 해도 노인은 ‘무성(無性)의 존재’인 양 취급받곤 했다. 노인들은 성적 욕망이나 이성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여겨졌고, 노인 스스로도 그것을 드러내기 께름칙해했다. 점잖지 못하다거나 남세스럽다고 여겼다. 하지만 요즘 노년층의 연애 풍속은 달라지고 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60대면 한창’이라는 농이 노인들 사이에 오간다. 성경원 한국성교육연구소장은 “예전처럼 60대는 노인이 아니다. 정년퇴직을 해서 할 일은 없어졌지만, 신체는 건강하다. 그러다보니 은퇴 후에도 적극 자신의 인생을 찾으러 나선다. 재미난 일을 찾아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지낸다.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난 일이 연애 아닌가. 그러다보니 연애로 에너지가 몰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치관도 변했다. 과거에는 자신보다는 가족을 먼저 고려하며 감정을 억눌렀다면, 지금은 무조건적 희생보다는 자신의 행복도 함께 생각하는 분위기다.

할아버지 차지하려고 ‘사랑싸움’까지

 

 

 

 

 

 

 

ⓒ조우혜노인들이 서울시 서대문구 어르신 전용 ‘청춘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연애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은 뭘까.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노인은 ‘마음이 잘 맞고 친구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과 같이 추상적인 이상형을 내놓았다. 가끔 솔직한 속내를 비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 강서구청 앞에서 만난 70대·80대 두 남자는 “(여자가) 열 살은 어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천에 사는 이순이씨(가명·72)는 ‘차 있는 남자’를 꼽았다. 이씨는 “50대 후반에 운전면허를 땄는데, 자식들이 위험하다며 시내에서만 운전하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차가 있어 기동력이 있는 분과 만나고 싶다. 고속도로를 다니면서 데이트를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멜로드라마에 순정 코드만 나오는 게 아닌 것처럼 노인의 로맨스에도 ‘사랑싸움’이 등장한다. 5년 전 혼자가 된 이창수씨(가명·82)는 지난해 동네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두 여자에게 구애를 받았다. 이씨는 “정작 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었는데, 두 사람이 워낙 극성이어서 결국 다니는 복지관을 옮기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 달 동안은 두 사람이 돌아가며 전화를 해 혼이 났다”라고 말했다. 한 노인 성상담가는 “성교육 강의를 다니다보면 여러 노인복지관을 가게 되는데, 한 복지관에서만 2년 동안 세 번의 싸움을 봤다. 여자 두 사람이 한 남자를 놓고 정말 머리채 잡고 싸웠다. 한 움큼 빠진 흰머리를 본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내 복지관의 한 사회복지사도 “복지관 내 당구장이나 탁구장 같은 곳에서 일어난 싸움은 이유가 어찌되었건 징계 사유다. 그래서 ‘복지관 출입 정지 일’ 이렇게 징계를 내리고 나서 나중에 이유를 들어보면 삼각관계가 얽힌 경우가 많았다. 남자 어르신은 적고, 여자 어르신이 많다보니 생기는 일 같다”라고 말했다. 2010년 통계청이 발표한 남자 평균 기대 수명은 77세, 여자는 83.8세다.

사랑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황혼의 사랑도 예외가 없다. 김효식씨(76·가명)는 1년 전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친척 소개로 만난 여자였다. “죽은 집사람을 닮아 정감이 갔다”라고 한다(그의 연애 이야기 시작은 다른 남성 노인들이 연애 경험을 털어놓으며 말하던 도입부와 똑같았다). 상대방도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처음 만난 날, 가볍게 술을 마시고 여자의 집까지 데려다 준다며 걷기 시작한 게 한 시간.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3개월 동안 경기도·충청도로 놀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이별 선언을 했다. 찻집 한 테이블에 앉아 김씨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지만 더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자가 떠난 이유를 경제적인 문제라고 짐작했다. 사별하고 자식 하나 없던 여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집 한 채 없는 자신보다는 여유가 있는 누군가라고 여겼다. 김씨는 요즘도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인생 종착역’이 코앞이라 더 애틋

젊은이의 사랑과 노인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인생의 종착역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서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만큼 더 조심스럽고, 더 애틋하다.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병실에 입원했을때 차철수씨(가명·76)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곁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상처하고 10년 넘게 혼자 산 차씨는 자녀와 경제적 부분에 대한 부담으로 재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를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기회가 되면 곁을 지켜줄 사람을 찾고 싶다고 했다. 남은 인생이 길지 않은데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충실하고 싶어졌다.

5월3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 있는 어르신 전용 ‘청춘극장’은 〈노틀담의 꼽추〉를 보러 온 노인 300여 명으로 붐볐다. 2000원에 영화와 음료수·팝콘까지 즐길 수 있어서 노인들에게 인기 있는 공간이다. 갓 영화를 보고 나온 한 커플은 극장 입구에 붙은 옛날 포스터를 보면서도 손을 잡고 있었다. 10년째 만난 사이라는 두 사람에게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인 같다”라고 기자가 너스레를 떨자, 여자는 “늙으나 젊으나 사랑하면 다 똑같다”라고 웃었다. 잠시 손을 놓았던 남자가 여자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들도 사랑을 한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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