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라’더니 이제 ‘그만하라?’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 칼럼에 영화 〈터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검열이었다. MBC 라디오에서 〈푸른 밤 종현입니다〉를 녹음할 때였다. 3년 넘게 ‘미드나잇 스포일러’라는 코너에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영화는 〈터널〉이었다. 한참 줄거리를 소개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터널〉은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터널〉과 세월호의 유사성을 말하면서 소심해진 건 오직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게 속 편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월호는 자기 ‘무지’를 인정해야 혁신이 보인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디지털 에디터를 따로 뽑았더니 편집부 안에서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일어났어요.” 귀가 쫑긋했다. 〈에스콰이어〉도 디지털 에디터를 뽑을 계획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에스콰이어〉는 상대적으로 디지털의 조류에서 비켜나 있었다. 살 만했다. 게을렀다.강둑이 터진 듯했다. 어느 날 갑자기 〈에스콰이어〉 편집부로 디지털 물결이 범람해 들어왔다. 그동안 미뤄뒀던 숙제들을 한꺼번에 해치워야 하는 고3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글과 사진을 포스팅하는 게 월간지에 기사를 쓰고 화보를 찍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돼 공감해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요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얼마 전에 연인과 크게 다퉜다.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언성이 높아졌다. 그녀는 도로 한복판에서 뛰어내려버렸다. 〈곡성〉 때문이었다. 원래 무서운 영화를 힘들어한다. 2003년인가 시사회장에서 〈장화, 홍련〉을 보다가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다. 그때 공포 영화도 가리지 않고 봐야 하는 영화 전문 기자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이번에도 〈곡성〉만은 가능하면 피해보려 애썼다. 일 때문에 맞닥뜨리고야 말았다.〈곡성〉을 보는 내내 진저리가 쳐졌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씹듯이 내뱉었다. “쓰레기네.” 〈곡성〉이 쓰레기는 아니다. 인간은 두려우면 미 군에서 온 그대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뒷북 인생이다. 철 지난 〈태양의 후예〉에 이제야 빠졌다. 〈태양의 후예〉는 지난 4월14일 종영됐다. 1회부터 16회까지를 폭식했다. 뒤늦게 드라마 속 군대 말투를 따라 하다 왕따를 자초하고 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대답한다. “고백할까요? 사과할까요?”작심하고 보게 된 건 〈태양의 후예〉를 제작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후부터다. NEW의 김우택 대표다. NEW는 〈변호인〉과 〈연평해전〉을 만든 콘텐츠 회사다. 김우택을 처음 만난 건 2000년이었다. 당시는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스마트한 비즈니스맨들이 영화계로 유입되 [스포트라이트]의 기자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고백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건 대단한 기자라서가 아닙니다. 정말 여기에 와야 하는 기자들은 취재하느라 이런 자리에 올 시간조차 없거든요.”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관객 시사회장이었다. 관객과의 대화라는 걸 진행하게 됐다. 요즘 유행이다. 영화 내용과 연관된 사람이 영화에 대해 해설을 해주면 입소문 효과가 커지기 때문이다.〈스포트라이트〉는 저널리즘 영화다. 그렇다면 기자가 해설해주는 게 맞다. 어쩌다 그 자리에 불려나갔다. 순전히 TV에 얼굴을 좀 비추고 기사 몇 개가 좀 읽히면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난 기자라는 이유에서다. 성공은 우연을 대하는 태도에 달렸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우연이었다. 김정주는 지나가던 길이었다. 이승찬이 컴퓨터 앞에서 꼼지락대는 걸 봤다. 명색이 넥슨의 사장인데 김정주가 모르는 게임이 넥슨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저 퀴즈를 푸는 게임일 뿐인데 묘하게 재미있었다. 넥슨의 전설적인 게임 개발자 이승찬의 첫 작품 〈퀴즈퀴즈〉는 그렇게 넥슨의 차기작이 됐다. 십수 년 전 일이다.우연은 계속됐다. 사람들은 돈 내고 게임을 하는 건 싫어했다. 돈 내고 게임 속 아바타를 꾸미는 데는 아낌이 없었다. 우연한 발견이었다. 넥슨은 게임은 무료로 하되 게임 속 아이템은 돈 주고 사는 과금 체계를 만들 명품 ‘에르메스’는 왜 서울에서 패션쇼를 열었을까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2015년 12월17일 에르메스가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2016 S/S 패션쇼를 열었다.” 누군가한테는 어마어마한 뉴스다.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울에서? CEO 악셀 뒤마까지 왔다고? 크리스토퍼 르메르의 후임 디자이너 바니 시뷸스키의 런웨이 무대는 어떨까? 반면에 누군가에겐 뉴스도 아니다. 심지어 암호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들이다. 명품 브랜드가 서울에서 패션쇼 한 번 연 게 대수야? 에르메스? 먹는 건가?에르메스가 지닌 위상을 모르지 않는다. 에르메스의 영향력은 단순히 패션업계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취향을 지배하는 “방송에 우리 책 좀 소개해달라”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모두가 방송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요리하고 먹는 시대잖아요. 도대체 누가 책을 소개하는 방송 같은 걸 보겠어요?!” 몇 개월 전 〈비밀독서단〉에 출연해달라고 요청이 왔을 때 제작진에게 반문했다. 〈비밀독서단〉(tvN)은 CJ E&M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출연자 다섯 명이 카메라 앞에 둘러앉아서 책을 두고 토론한다. 매주 한 가지씩 고민거리를 놓고 해결책이 될 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어쨌든 매주 책 서너 권이 방송을 타게 되는 구성이다.그런데 웬걸, 〈비밀독서단〉이 요즘 세간의 화제인 모양이다. 급기야 〈비밀독서단〉이 소개한 ‘나만의 집’… 설계비 확 줄여주는 리빙큐브로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30분쯤 대화를 나눴을 때다.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말했다. “나는 집을 몰라요. 그러나 집을 짓고 싶어요. 그러니 당신을 믿겠습니다. 계약서를 씁시다.” 건축주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계약금을 송금했다. 서로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건축주와 건축가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원주 젓가락집은 그렇게 한달음에 지어지게 됐다.원주축산농협에 근무하는 건축주 이주훈 상무는 오래전부터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한가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었다. 종갓집이라 친척들이 와도 여유로운 집에서 사는 게 꿈이었다. 고질병인 비염도 이유였다. 일단 원주 네 명의 예술가 가족이 사는 집 ‘NO.9’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24년 전이다. 결혼 1년차 부부인 두 사람은 경기도 남양주 능내역과 다산유원지로 소풍을 왔다. 남한강가에 있는 능내역은 풍광이 수려했다. 두 사람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사실 세 사람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는 딸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뒤로도 부부는 아들딸과 함께 넷이서 가끔씩 능내역을 찾곤 했다.일곱 번째 아파트에 살던 어느 날이었다. 부부는 20년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만의 집을 짓기로 결심한다. 예술을 위해서다. 아빠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고, 엄마 역시 화가다. 딸은 동양화를 전공하고, 아들은 건축학도다. 네 명의 막걸리의 본고장 사람 사는 향기 나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한울타리집에서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에 금정산성마을 전체가 진동할 지경이다. 한울타리집은 각기 다른 주택 4채가 한 울타리에 둘러앉은 집이다. 정희네, 민서네, 악동이네, 평상풍경집이다. 그중에서도 악동이네는 금정산성마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다. 집 안에 계단 언덕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열댓 명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우르르 오르내리면 우당탕 쿵쾅 소리가 금정산성마을 전체에 울려 퍼진다.한울타리집에서는 아빠들이 밤새 퍼마신 금정산성 막걸리 냄새도 진동한다. 금정산성마을은 금정산성 막걸리의 본고장이다. 마을 서울의 옆모습을 품고 시간을 견뎌내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제대로 지어진 집이 아니었다. 누군가 설계한 집도 아니었다. 우연히 그곳에 생겨나버린 집, 어쩌다 보니 60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꿋꿋하게 버텨낸 집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9-541번지에는 1958년 무렵에 생겨난 이름 없는 2층집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집짓기를 체득한 목수들이 이화장과 낙산 한양성곽 사이의 이화동 산비탈에 지어놓은 여러 채 가운데 하나였다.경사가 45°나 됐던 낙산 아래 산동네는 이내 슬럼화됐다. 난개발의 시대가 시작됐다. 서울 중심가에서 밀려난 서민들이 산동네로 흘러들어 오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 집 짓는 나무꾼이 꿈꾸는 건축 공동체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건축사무소 아백제(a0100z)의 성상우 소장은 요즘 몸에 없던 근육이 붙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오기 때문이다. 성 소장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지난해 12월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 집으로 이사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에 위치한 ‘문턱이 닳는 집’이다. 중정이 있는 ㄷ자형 2층 가옥이다. 성 소장은 집 한쪽에 구태여 황토방을 하나 만들었다. 아궁이에 땔감을 넣어서 구들장을 데우면 아랫목부터 서서히 뜨거워지는 구식 황토방이다.황토방을 온전히 데우려면 하루 종일 걸린다. 산에서 나무를 해온다. 장작을 팬다. 불을 ‘두산대학교’의 봄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은 서울 가는 버스를 타러 우르르 본관 쪽으로 몰려갔다. 이제부터 캠퍼스는 적막강산이다. 2000년 봄 학기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 있었다. 어찌어찌 중앙대학교 영화과로 학부 편입을 했다. 안성의 밤은 시리도록 외로웠다. 적잖은 학생들이 최소한의 시간만 캠퍼스에서 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일주일치 수업을 하루에 다 몰았다. 수업만 끝나면 도망치듯 서울로 떠나가 버렸다. 그해 여름 자퇴했다. 학생 공동체도 지역 공동체도 없었다. 교수도 학생도 철새처럼 왔다만 가는 캠퍼스에서 문화가 피어날 턱이 없었다.안성의 작은 집에 산다는 건 동화가 아닙니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김동희 KDDH 건축사무소 소장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2년쯤 전에 경기도 동탄 투이재(透貳齋)의 건축주 가족을 처음 만났을 때다. 노부부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을 해 자식들을 키웠다. 김동희 소장을 처음 찾아온 건 막내아들이었다. 막내아들은 독일계 자동차 부품 회사의 고위 임원이었다. 독일 본사 발령을 받은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 노부모와 누나 부부를 위해 집을 지어주고 싶어 했다.김동희 소장과 가족회의를 열었다. 어머니는 직접 해온 수수떡을 내놓았다. 노부모는 집이 주는 위로 그 아늑한 토닥임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아내는 겨우내 고뿔 탓에 아팠다. 남편은 일을 나가야만 했다. 홀로 남겨진 아내를 간호해준 건 집이었다. 장종철 부부는 지난해 추석 무렵 새로 지은 연희동 주택에 입주했다. 살아보니 직접 지은 집은 단순한 삶의 도구가 아니었다. 겨우내 아픈 아내 곁을 지켜준 수호신이기도 했다.아내는 2층 침실에 누워 지냈다. 사실 2층 침실은 건축주 부부와 건축가 서승모 ‘사무소 효자동’ 소장이 마지막까지 승강이를 벌였던 곳이다. 서 소장은 2층인 연희동 주택의 내부 문을 다 없애버렸다. 작은 집인데 구획까지 하면 옹색해진다는 이유에서다. 아내는 집 안에서 만나는 하늘과 우주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태린이는 우주에서 온 아이다. 매일 밤 3층집 꼭대기 다락방에 올라가 천체망원경으로 저 멀리 우주를 바라본다. 가끔은 1층 영화감상실에서 영사기로 아빠가 좋아하는 〈스타워즈〉를 같이 볼 때도 있다. 3층에 있는 태린이 방은 〈토이 스토리〉의 우주비행사 버즈 라이트이어로 장식돼 있다. 친구들이 책상에 코를 박고 숙제하기 바쁠 때 태린이는 우주를 올려다보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끊임없이 상상한다. 태린이는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별 헤는 집’에서 산다.별 헤는 집은 조남호 솔토건축사사무소 대표가 지은 단독주택이다. 조남호 대표는 용인 투표 않는 당신에게 생길 수 있는 일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편의점 체감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어요. 반면에 아르바이트 시급은 그대로거든요. 친구들끼리 정치나 경제 얘기를 나누는 법은 거의 없지만 소비세 인상에 관해서는 속으로 불만들이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설날 연휴에 도쿄 신주쿠의 편의점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일본 청년은 이렇게 토로했다. 한 세기 전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를 한 일본에는 음력 설날이 없다. 신주쿠에는 한국과 중국 관광객만 즐비했다. 청년은 신주쿠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왔다고 했다.지금 일본 가진 게 ‘추억’뿐인 1990년대 세대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논산훈련소에서 걸그룹 SES를 처음 봤다.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는 경이로운 영적 체험이었다. 그렇다고 사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1998년 늦겨울이었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결딴날 판이었다. 환란을 피해 부랴부랴 군 입대로 도피한 신세였다. 바깥세상은 요정이 날아다니는 지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서 다시 SES를 봤다. 목까지 잠근 셔츠에 통이 넓은 긴바지를 입은 SES의 모습은, 위아래를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르겠다 싶은 요즘 아이돌과는 확실히 달랐다. 텔레비전 속에선 다 혁명은 말잔치가 아니다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300명이었다. 많으면 하루 3만명도 보던 블로그였다. 일주일 동안 겨우 300명이었다. 사람들은 개헌 논의에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개헌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개헌 논의 자체를 무시했다.팀 블로그란 걸 시작한 지 6개월쯤 되었다. 둘이서 토론을 벌이는 팀 블로그를 만들었다. 한국은 갈등 사회다. 당연히 토론거리 천지다. 생산적인 토론은 드물다. 각자의 견해만 확인하고 끝나기 일쑤다. 이래서는 뺄셈 토론이다. 덧셈 토론을 해보고 싶었다. 결론은 안 나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기꺼이 설득당해보고 싶었다. 잡담하듯 토론하면 가능하겠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