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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에, 망월동에 묻힌 푸른 눈의 목격자들

독일 기자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세상에 알렸다. 그에 앞서 캐나다인 스코필드는 1919년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들은 죽어서도 한국에 남기를 소망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8월 24일 목요일 제5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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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5년 5·18 민중항쟁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고립된 1980년 광주에 잠입해서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던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도운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택시운전사>가 화제다. 힌츠페터의 영상은 생매장된 광주의 아픔을 바깥세상으로 가늘게 그러나 끈질기게 흘려보냈던 숨구멍 같은 존재였어.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불태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었지. 그날 광주로부터 61년 전 4월의 봄날, 또 한 명의 서양인이 우리 피맺힌 역사의 정직한 목격자가 되었단다.

1919년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이후 터져 나온 만세 시위는 마치 가을철 단풍이 남하하듯, 이른 봄 꽃길이 북상하듯 식민지 조선 전체로 퍼져 나갔어. 서울에서 가까운 수원 지역에서는 3월 중순 이후 시위가 불붙었지. 수원 인근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는 3월30일과 4월5일 격렬한 만세 운동이 벌어졌고, 일본 경찰은 역시 격렬한 매질로 이에 대응했다. 치열하게 전개되는 수원 지역 만세 운동에 맞닥뜨리면서 일본 당국은 한번 ‘본때’를 보여줄 생각을 하고 그 불운한 타깃을 결정했지. 제암리 마을이었어.  

4월15일 일본군 수원 주둔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부대가 제암리에 도착했어. 아리타 중위는 주민들을 교회에 모은 후 문을 봉쇄하고 창문을 통해 총탄을 퍼부어버려. 참혹한 학살 와중에 한 여인이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창밖으로 아이를 내밀었지만 일본군들은 사정을 돌보지 않고 찔러 죽였다고 해. 또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의 초가지붕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른 뒤 인근 마을에서도 살인극을 펼쳤지. 이날 교회와 그 부근 마을에서 죽어간 사람만 29명이었어.

이 말문이 막히는 야차들의 행동을 숨죽여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전동례라는 여성이었지. 그 남편 안진순은 열흘 전 시위에 동참했다가 흠씬 얻어맞고 몸져누워 있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군에게 교회로 끌려가서 죽었다. 밭고랑에 숨은 전동례는 일본군의 만행을 똑똑히 지켜보았어.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살육의 현장에서 전동례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겠니. 그런데 사건 이틀 뒤인 4월17일 한 푸른 눈의 서양인이 그들 앞에 나타나. 프랭크 스코필드라는 기독교 선교사이자 수의학 박사였지. 영국에서 태어난 뒤 캐나다로 이주해 토론토 대학에서 수의학 박사를 받은 그는 1916년 조선에 왔다.

조선에 온 지 1년 만에 우리말을 마스터할 정도로 노력파였던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조선 이름을 썼어. 스코필드는 3·1운동 상황을 해외에 알리고자 안간힘을 썼어. 만세가 터져 나오고 흰옷 입은 사람들의 파도가 종로를 휩쓸 때 그는 사방을 누비며 역사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지. 좁은 골목에서 일본 헌병들이 조선 시위대를 공격하려 들자 이걸 찍으려고 남의 집 2층에 올라갔는데 하필이면 일본인의 집이었다는구나. 일본 여자는 날카롭게 “도로보!(도둑놈)”를 부르짖었지. 스코필드는 급한 김에 조선말로 “누님 저 도둑놈 아닙니다” 하면서 셔터를 계속 누르다가 빗자루 몽둥이에 두들겨 맞기도 했어.  

3·1 항쟁의 숨 가쁜 현장을 주름잡던 어느 날, 수원 인근에서 일본군이 만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그는 자전거를 둘러메고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소아마비 때문에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썼으나 스코필드는 수원역에서 제암리까지 돌투성이 진흙탕의 시골길을 한쪽 발로만 페달을 밟으며 달렸어. 제암리 현장에서 그는 “분노로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제암리 사건은 역사 속의 실체로, 일본 제국주의 만행의 대표 사례로 영원히 남게 됐지. 예배당 안에 숯덩이가 되어 뒹굴던 21구의 시신과 불에 타다 남은 두 여인의 시신을 수습해 공동묘지에 매장한 것도, 다시 마을을 찾아 공포에 질린 생존자들을 위로했던 것도 스코필드였어. “박사께서 참상을 말하라 해도 무서워 함구했습니다. 떠는 나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생존자 김희순의 증언, <한국일보> 1970년 4월14일).” 그때 김희순을 비롯한 생존자들에게 스코필드는 어떻게 보였을까.

제암리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스코필드는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다름 아닌 매국노의 대표 격인 이완용이었어. 그는 스코필드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선교사 양반. 기독교 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그러자 스코필드는 이렇게 쏘아붙여. “먼저 2000만 국민에게 사죄부터 하시지요.” 대한제국의 옛 총리대신이자 이른바 ‘대일본제국’의 후작으로서 조선 천지에선 머리 숙일 일이 별로 없었을 이완용의 얼굴은 그만 흙빛이 되고 말았단다.  

이완용을 면전에서 비난하기도


광주항쟁을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가 1986년 광화문에서 시위 현장을 촬영하다가 사복 경찰들에 의해 목뼈와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던 것처럼 일제도 ‘제암리’ 같은 자신들의 추악한 면모를 세상에 드러낸 이 얄밉기 그지없는 서양인을 가만두지 않으려 했지. 스코필드는 암살 위협 끝에 이 땅을 떠나게 돼. 해외에 나가서도 독립운동을 도왔고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지. 그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의 호텔에서 대나무로 된 쓰레기통을 보고 울컥했다고 해. “아 이거 조선 사람들이 많이 쓰던 건데.” 반가움에 막상 쓰레기통을 들어보니 ‘Made in Japan’이야. 그런데 스코필드는 또 ‘아 일본에서 얼마나 조선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을까’ 생각을 하며 가슴을 쳤다지. 그가 얼마나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고 애틋해했는지 알 수 있지 않니.

1958년 스코필드는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았고 수의학자로서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한국에 정착한단다. 증오의 대상이던 일본 제국주의는 물러갔지만 스코필드에게 한국의 독재정권, 그리고 심해져만 가는 빈부격차는 또 하나의 고민거리였지. 그는 격렬하게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고 부끄럽게도 한국 정부는 스코필드의 신학기 강의를 중단시키고 거처하던 숙소를 비우라는 명령까지 내렸단다. 다행히 4·19 혁명이 일어나 우리 스스로 우리 은인을 내치는 과오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말이야. 1970년 4월 세상을 떠날 때 유산은커녕 유품도 거의 남기지 않을 만큼 한국에 모든 것을 바쳤던 스코필드의 유언이자 묘비명은 이렇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을 맡아주세요.”

그의 타계 소식이 제암리에 전해졌을 때 제암리 학살의 생존자였던 전동례는 하던 일을 작파하고 교회로 달려가서 미친 듯이 종을 쳤다고 해. “삽시간에 들에서, 집에서 일하던 제암리 부락민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여러분, 제암리의 구세주 할아버지 스코필드 박사가 운명하셨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빕시다.’ 교회 안에는 울음 섞인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한국일보> 1970년 4월14일).” 그리고 장례식장에는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동요 <따오기>가 울려 퍼졌어.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연합뉴스
2015년 2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공원에 세워졌다.

우리를 도왔던 외국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젖어오는구나. 그들은 그들 인생의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한국에서 겪었고,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묻히기를 소망했고 그 소원을 이뤘다. 스코필드는 국립현충원에, 그리고 힌츠페터의 유해 일부는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5·18 옛 묘역)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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