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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재벌이 왠지 친숙한 이유

드라마 속 사이코패스 악역의 태반이 재벌 2∼3세다. 모자랄 게 없는 그들이 사람을 죽이고 폭행과 강간, 마약을 일삼는 설정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는다. 돈이 있기에 쉽게 용서받는 현실을 보면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09일 목요일 제4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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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로 시작해보자.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영화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젊고 잘생겼으며 학벌 좋고 돈도 잘 버는, 성공한 상류층 백인 남성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이 툭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설정 자체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친구의 명함이 자신 것보다 더 근사하다는 이유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도끼를 휘두른다. 자기가 실패한 레스토랑 예약을 친구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죽인다. 나아가서 ‘그냥’ 사람을 죽인다. 모든 걸 다 가진 청년이 뭐가 부족하다고 저러는 걸까?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사회분석과 여피 문화의 공허함에 대한 통찰, 심리학적 분석을 더한 영화평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때는 전 국민이 IMF 관리 체제를 통과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매고 허덕이던 2000년이었다. ‘오렌지족’에 대한 사회적 질타가 있던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면 몰라도, 당장 경제적 어려움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을 지경이 몇 년째 계속되던 당시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내가 저 돈이 있으면 세상 걱정 하나 없을 텐데 공허라니 그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라며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은, 영화 제목을 다시 한번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쪽을 택했다. 아, 사이코라 그런가 보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왼쪽)은 성공한 상류층이지만 사소한 일에도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17년이 지나, 우리는 사이코패스 악역 중 태반이 재벌 2·3세인 시대를 살고 있다. 어려서는 새의 날개를 꺾으며 놀더니 자라서는 사람을 죽이며 노는 KBS <남자 이야기>(2009)의 채동건설 대표 채도우(김강우)부터 시작해, 복수심에 눈이 멀어 살인·협박·정보통신망법 위반을 저지르고 다닌 SBS <유령>(2012)의 세강증권 대표 조현민(엄기준), 1인 시위를 벌이던 운수노동자에게 체불 임금을 받아가려면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싸워보라고 시키는 영화 <베테랑>(2015)의 신진그룹 기획조정실장 조태오(유아인), 20부작 내내 마약과 살인과 폭행과 강간을 일삼던 SBS <리멤버-아들의 전쟁>(2015~2016) 속 일호생명 상무 남규만(남궁민), 툭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손찌검을 하더니 끝내 15년 전 저지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 구속되는 tvN <기억>(2016)의 한국그룹 부사장 신영진(이기우)까지.

가장 최근 이 리스트에 합류한 재벌 3세는 엄기준이 연기하는 SBS <피고인>(2017) 속 차명그룹 부사장 차민호다.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 우발적으로 쌍둥이 형을 살해하고 형의 신분을 빌려 살아가는데 그 사실을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쾌속의 살인 행보를 선보였다.

불행히도 2017년의 우리 중 그 누구도 “돈도 있겠다, 권력도 있겠다 뭐가 아쉽다고 사람을 죽이고 다니냐?”라고 묻는 사람은 없다. 재벌 3세 사이코패스 악역이 조금 질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있을지언정, 재벌이 사람을 죽이는 설정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피고인> 사이의 17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걸까?

처벌 피할 수 있으니 안 때릴 이유가 없다


자기 아들이 클럽에 갔다가 종업원들에게 맞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수 전기충격기와 쇠파이프를 든 장정들을 데리고 북창동으로 쳐들어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이 2007년에 일어났다. ‘회장님’이 몸소 나서 청계산과 북창동을 왕복하며 밤새도록 꼼꼼히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김 회장이 법정에서 제 범죄 사실을 무용담 들려주듯 당당하게 증언하자 더 큰 충격이었다.

SBS <피고인> 속 차명그룹 부사장 차민호(엄기준)는 살인 혐의를 벗기 위해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권투하듯이, 아구를 몇 번 돌렸지”라거나 “내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애들 시켜서 대신 때리게 했거든” 따위 증언은 자신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수감 기간 중 건강을 사유로 병원에 입원해서 보낸 시간을 빼면 실제 감옥 체험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김 회장이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에겐 대형 로펌의 거물급 변호사들을 고용할 돈이 있고, ‘대기업 회장에게 실형이 가해지면 국가경제에 큰 타격이 올 것’이라는 논조로 지원사격을 해줄 보수 언론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1996년 8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그마저도 1년1개월여 만에 사면되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또한 배임 및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은 2000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승연 회장도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1994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설령 실형을 선고받더라도, 신병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되고 병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으리라. 비슷한 시기, 사위에 대한 집착과 오해로 애먼 사람을 살인교사하고도 멀쩡하게 VIP 병실에 입주한 채 때때로 외출까지 일삼은 영남제분 전 회장의 아내 윤길자 사례도 있었으니까.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돈이 있어 모자란 것이 없으니 사람을 해칠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돈이 있어 처벌을 피해갈 수 있으니 사람을 해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재벌이 사이코패스 악역으로 그려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쩌다 예외적인 한 명이 사고를 친다고 하기에는 사례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2010년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SK그룹 계열사 M&M 최철원 대표의 맷값 폭행 사건이 벌어졌고, 2014년에는 그놈의 마카다미아 때문에 기내에서 사람을 때리고 고성을 지르더니 결국 비행기를 회항시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등장했다. 심지어 운전할 때 기사가 감히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게 싫다며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접은 채 운전할 것을 강요하고, 폭언과 욕설을 일삼으며 “사람을 종이컵보다 더 쉽게 버리”느라 1년에 운전기사 40여 명을 갈아치웠다는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사임도 하지 않았다. 경영철학이 ‘사람을 존중하고 성장하게 하는 경영’인 회사의 후계자가 벌인 일이다.

대중문화 속 재벌이 백마 탄 왕자와 청춘의 꿈을 실현해줄 무대에서 차츰 사람을 체계적으로 말살하는 공간으로, 나아가 평범한 우리와는 도덕 체계가 다른 사이코패스적 인격체로 그려지게 된 내막이다. 돈이 있기에 사회적 합의로 도출해낸 윤리규범을 따라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돈이 있다는 이유로 ‘사회지도층’이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더 쉽게 용서되는 존재들. 우리는 수많은 베이트먼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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