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들이 일제히 반(反)재벌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4대 재벌(삼성·현대차·SK·LG)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하자, 박원순 서울시장은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공격했다. 문 전 대표가 지난해 4대 재벌 경제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를 살리는 데 여전히 재벌 대기업이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몇 달 전부터 “재벌 체제 해체”를 공언하고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전은 자칫 ‘내가 재벌에 더욱 적대적이다’라고 과시하는 경연장이 될 수도 있다.

재벌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 기득권이다. 경제 부문은 물론 정치·사회 부문에도 유착과 매수를 통해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사회를 바꾸려면 재벌 체제 역시 바꿔야 한다. 다만 변화의 방향은 현재보다 우월한 쪽이어야 한다. 선거판의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재벌이라는 앙시앵레짐을 철저히 ‘타도’하겠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시사IN 신선영2014년 6월5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숙 시위를 하고 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재벌 총수

재벌은 ‘창립자 일가’가 여러 대기업을 하나의 그룹으로 운영하는 기업집단을 의미한다. 쌍용자동차나 GM코리아처럼 단독으로 운영되는 업체는 대기업이지만 재벌로 불리지 않는다. 총수 일가는 주요 기업에 다수 지분을 확보한 뒤 그 기업들이 다른 계열사에 지분을 갖게 하는 방법(순환출자)으로 그룹 전체를 일관되게 지휘한다.

총수 일가가 직접 가진 지분은 그룹 전체 주식 가치의 5% 내외다. 흔히 재벌 일가를 ‘오너(소유자)’라 부르지만, 전체 계열사 차원에서는 극히 적은 지분을 가졌을 뿐이다. 5% 소유로 100%를 지배하니 재벌 그룹을 가리켜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배권을 상속시키기 위해 경제범죄에 가까운 짓도 서슴지 않는다.

재벌 개혁(해체)은 대체로 총수 일가의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는’ 체제를 종식시키자는 것이다. 주로 총수 세력 이외 다른 주주들(소수 주주)의 경영 개입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식이다. ‘소수 주주’는 국내 소액 투자자는 물론이고 수백억 달러를 운영하는 거대 해외 펀드까지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동안 재벌 총수는 주주들에게 당장 배분할 수 있는 돈을 장기 투자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다. 소수 주주의 권한이 강화되면 총수가 함부로 투자하는 행태를 차단할 수 있다. 그룹 차원에서 움직이던 기업들이 각각 자사 주주들을 위해 운영되는 독립 대기업으로 해체될 것이다.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은 “30대 재벌 체제를 깨고 300대 기업 체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연합뉴스재벌 개혁 의지를 밝히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재벌은 중소기업 약탈, 저임금, 비정규직 확산, 노동조합 탄압 등의 원흉으로 지목되어왔다. 재벌을 해체하면, 대기업들이 하청 중소기업에 납품 대금을 제대로 지급하고 정규직화에 앞장서며, 노동운동을 용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재벌 해체(개혁)는 대기업 주주,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 등 거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과제다. 야권의 주요 공약이 될 만하다.

한국 경제 생태계에서 대기업의 위상

다만 재벌 대기업을 건드리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공식적인 재벌 그룹의 정규직 외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소득, 소자영업자들의 생계가 대기업에 사슬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 등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국내 최대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데이터의 자료를 활용해 추적한 연구(〈거래 네트워크로 본 한국의 산업생태계〉)에 따르면, “대규모 기업집단에 소속된 소수의 대기업들이 (기업 간) 거래 네트워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은 1차 협력(하청)업체들로부터 부품을 매입한다. 1차 협력업체 역시 다른 중소기업(2차 협력업체)으로부터 중간재를 공급받는다. 대기업을 근원으로 하는 원·하청 연쇄고리는 때로 10차 협력업체 이상까지 복잡하게 뻗어나간다.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표본으로 활용한 5만4114개 기업(2011년 기준) 가운데서는 45.5%에 해당하는 2만4600여 개 업체가 대기업 중심의 거래 네트워크에 편입되어 있다. 극소수 대기업에 납품하는 업체가 전체 중소기업의 절반 정도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LG전자 등이 포함된 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 협력업체가 모두 8809개에 달했다. 현대차·기아차 등 자동차 업종의 협력업체는 5886개다. 적어도 ‘삼성이 망해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한국 경제에서 재벌 대기업들의 비중이 작지는 않다.

재벌 해체 이후 독립 대기업들의 경쟁력은?

기업집단의 장점은 계열사끼리 서로 지원하면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거나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첨단산업에 뛰어들 때도 유리하다. 그룹의 유명 브랜드를 내거는 것 자체가 경쟁력이다. 그룹 내에 축적된 판매 조직을 활용할 수도 있다. 삼성전자는 삼성전기, 삼성SDI 등 계열사로부터 부품을 조달받기 때문에 애플과 달리 여러 규격의 제품을 유연하게 선보일 수 있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비교우위다. 대기업이 그룹에서 독립하는 경우, 경쟁력이 더 강해질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독립 대기업에서는 소수 주주의 권력이 강해질 것이다. 재벌 일가의 의지를 떠받드는 다른 계열사의 지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재벌 일가는 산하 계열사를 사실상 자신들과 후손의 소유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해당 기업 자체의 성장·발전에 관심이 많다. 일가의 사회경제적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기업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기업 내에 쌓인 자금을 주주들에게 배분하기보다 그대로 유보하거나 투자에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최근 낸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삼성전자는 매출액의 7.5%를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글로벌 차원에서 최고 수준이다. 같은 시기 애플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4.4%에 불과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뒤 주주들의 힘이 강력해졌다. 소수 주주들의 최고 목표는 기업의 성장보다 금융수익 확보다. 재벌 해체의 조짐이 보이면 신속하게 대기업 주식을 매집해놓는 것이 좋다. 주가가 올라 큰 재미를 볼 수 있다. 다만 해당 기업 노동자나 하청업체들까지 좋아할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재벌은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인가?

재벌은 이른바 ‘천민자본주의’의 표상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비정상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증거로 활용된다. 선진국에는 재벌 같은 기업조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룹(기업집단) 경영은 세계적으로 보편적 현상이다. 대다수의 글로벌 우량 기업들은 ‘복합기업 그룹(conglomerate·재벌처럼 여러 업종의 기업이 집단적으로 운영되는 형태)’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보잉, 듀퐁, GM(이상 미국), 바이엘, 지멘스(독일), 르노(프랑스), 네슬레(스위스) 등이 있다. 가족경영 체제로 성공한 독립 대기업도 많다. 미국의 월마트, 일본의 도요타, 룩셈부르크의 아르셀로미탈, 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 프랑스의 PSA 푸조 시트로엥, 독일의 BMW 등이다. 한국의 재벌처럼, 가족이 ‘복합기업 그룹’을 경영하며 자녀에게 승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미국의 포드, 이탈리아의 피아트, 독일의 베르텔스만, 일본의 산토리, 프랑스 루이비통, 스웨덴 악셀 존슨, 캐나다의 파워코퍼레이션오브캐나다 등이다. 정경유착 등 한국적 부작용을 빼고 기업 운영 형태로만 보면, 재벌은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그룹 경영과 독립기업 혹은 가족 경영과 ‘월급 받는 피고용 경영자’ 가운데 어느 쪽이 나은지에 대해서는 국제 학계와 실무 측에서 일치된 견해가 나온 바 없다.

한국 재벌의 ‘소유 없는 지배’도 비판 대상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국 재벌만의 현상은 아니다. 주식회사 제도 자체가 문제다. 주식회사에서는 20%든 30%든 다수 지분만 확보하면 경영 지배권을 통째로 갖는다. ‘소유 없는 지배’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의 〈경제민주화… 일그러진 시대의 화두〉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차등의결권(경영자의 주식에 일반 주주의 주식보다 훨씬 많은 의결권을 부여) 제도를 통한 ‘소유 없는 지배’가 자행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슐츠버그 재단이 지분 0.6%로 100% 의결권을 행사한다. 워런 버핏은 (버크셔해서웨이에서) 자신의 1주에 대해 200개 의결권을 갖는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업은 창업자가 1주에 10개 의결권을 행사한다. 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차등의결권은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월스트리트식 경영 간섭에 제한받지 않고, 장기적인 기업 전략의 수립 및 경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싫다면 구글에 투자하지 말라’고 말했다.”

재벌을 해체하면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형편이 나아질까?

재벌이 양극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압도적 시장지배력을 무기로 하청 중소기업들을 약탈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들은 혁신에 투자해야 할 잉여이익을 재벌에 빼앗긴다. 자사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다.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 양 부문 노동자들 간의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 정론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견들이 등장하고 있다. 정승일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 이사는 재벌 시스템 자체로 인해 약탈이 자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산업생태계 연구팀’이 선도 기업(원청 대기업)과 공급 기업(협력업체)의 영업이익률(2011년)을 정리한 그래프(오른쪽 표)를 제시한다. 원청 대기업이 하청 협력업체를 심하게 쥐어짤수록 양측의 영업이익률은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실제로 건설, 유통, 통신, 시스템통합(SI) 등 내수 서비스업에서는 원청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반면 협력업체들의 그것은 바닥을 기고 있다. 반면 수출 제조업에서는 양상이 크게 다르다. 전자 업종의 경우,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1차 협력업체에 비해 미세하게 높을 뿐이다. 자동차 업종에서는,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1차 협력업체보다는 조금 높지만 2, 3차 협력업체에 비하면 오히려 낮다.

정승일 새사연 이사는 이런 현상을 업종의 차이 때문으로 해석한다. 수출 제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그래서 본사는 물론 협력업체의 능력까지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 협력업체들의 기술 수준 및 품질관리 능력이 고도화되면서 원청인 삼성전자와의 납품 단가 협상 등에서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종합건설사인 삼성물산이 수주한 업무는 전문 건설업체인 1차 협력업체들을 거쳐 여러 차례 하청된다(다단계 하청). 협력업체들은 하청 비용을 낮게 불러야 일을 맡을 수 있다. 유통, SI 같은 업종도 비슷하다. 내수 서비스업의 핵심적 경쟁력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인건비 저하를 통한 비용절감 능력(하청 약탈)이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모두 재벌 계열사다. 그러나 하청업체와의 관계에서는 크게 다르다. 재벌 여부가 아니라 업종에 따라 약탈 강도가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정승일 새사연 이사는 원·하청 문제의 대안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 지원 및 노동조합 강화 등을 제안한다(42~43쪽 기사 참조).

한편 재벌에 대한 경제력 집중을 해체해서 ‘30개 그룹을 300개 독립 대기업으로’ 만들면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와 임금이 오르고, 해외로 나간 생산공장들이 복귀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이 중단될까? 재벌 계열사에서 독립 대기업으로 바뀐 쌍용자동차, 르노삼성자동차, 한국GM 등이 하청업체나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친절하다는 증거는 없다. 주주들을 위해 운영되는 독립 대기업들이 재벌 계열사와 다른 행태를 보이기는 할 것이다. 주주들은 위험한 장기 투자보다 당장의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선호한다. 비용을 줄여야 주가와 배당금이 높아지는 판국에 협력업체 납품 단가를 올리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질 나쁜 헤지펀드 주주라면 단기 수익에 예민한 기관투자가들을 업고 독립 대기업에 이사를 침투시킨 다음, 정리해고 및 연구개발 투자 취소 등으로 비용을 줄여 주주 가치를 높일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회사를 쪼개거나 다른 기업과 합병시키면서 자산 매입·매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떼돈을 벌기도 한다. 정부가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을 강행하려 하면 ISD(투자자·국가소송제)로 맞설 수도 있다.

정확한 문제 분석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삼성 공격에 대한 우려를 ‘민족주의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기업 경영 관행의 문제다. 주주 가치 높이기냐, 기업의 성장이냐는 대기업 경영진의 선택에 따라 고용과 테크놀로지 등 국가경제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총수 일가와 기업집단을 분리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가의 범죄는 법치주의에 따라 엄하게 단죄하되 수많은 글로벌 우량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그룹 경영을 한국에서만 포기할 이유는 없다. 총수 일가를 혼내주기 위해 그룹 분리를 선택한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클 수 있다.

재벌 일가와 소수 주주(외국계 펀드 포함) 가운데 양자택일할 문제는 아니다. 국가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대기업이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부터 구상한 다음 구체적인 재벌 개혁 방안을 만들어가면 된다. 투자와 혁신을 추진하고 하청 중소기업과 함께 성장하며 비즈니스의 핵심 자원인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경영 주체라면, 해외 자본이든 국가든 은행이든 상관없다.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들도 착취와 불평등의 원인을 정확히 분석한 바탕 위에서 적절한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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