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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의 약진 그리고 숙제

2016년에는 여성 주인공들이 활약한 영화가 약진하고 여성 영화감독의 귀환 혹은 데뷔도 활발했다. 하지만 영화 편수나 감독의 비율을 보면, 큰 의미가 없다. 그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30일 금요일 제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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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의 통합전산망 집계 기준으로, 2016년 최고의 흥행 영화 다섯 편을 차례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행>(관객 1156만명), <검사외전>(970만명), <밀정>(750만명), <터널>(712만명), <인천상륙작전>(704만명). 올해 관객들을 가장 많이 웃기고 울린 영화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모두 화제를 일으킨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제성을 보자면, 한국에서는 드문 좀비물이자 재난 영화인 <부산행>과 숱한 이견과 해석을 낳았던 <곡성> 옆에, <비밀은 없다>와 <아가씨>를 나란히 올려두어야 한다. 또한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미씽:사라진 여자>까지 세 영화 모두 여성 캐릭터들이 중심이며, 남성 질서와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강제하는 억압에 맞서 싸우면서, 계급 혹은 권력관계가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와 공감을 이룬다. 또한 여성끼리의 로맨스가 노골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배치돼 있다. 여기에 <죽여주는 여자> <굿바이 싱글> <연애담> <우리들>까지 떠올린다면 2016년은 여성 주인공들이 활약한 영화가 약진한 해로 보인다. 게다가 여성 감독들의 귀환 혹은 데뷔가 그 어느 해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이끌어가는 서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비밀은 없다>(위)나 <미씽> <연애담> 같은 영화가 주목을 받았다.
이것은 사실일까? 여성 캐릭터 및 배우들이 전면에 나선 영화 혹은 여성 감독이 내놓은 영화들의 숫자는 과연 어느 정도로 유의미하게 증가한 것일까? 2013년에서 2015년까지, 3년간 개봉한 ‘한국 영화 개봉 일람’을 영진위 사이트에서 찾아보자. 먼저 2015년 개봉작 목록에서 <암살> <차이나타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 등이 눈에 띈다. 감독들은 모두 남자이지만,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이다. 더욱이 <암살>은 그간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존재와 활약을 상기시켰고, <차이나타운>은 통상 ‘남성 장르’라 여겨지던 누아르에서 성별 전치를 시도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고, <경성학교>는 여성 등장인물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2014년에는 <카트> <수상한 그녀> <관능의 법칙> 같은 영화가 개봉했다. <카트>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작품이자 부지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다. <수상한 그녀>는 젊은 몸을 갖게 된 노년 여성의 이야기로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뒀으며, 심은경의 티켓 파워를 증명해낸 작품이기도 하다. <관능의 법칙>은 좀처럼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힘든 40대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여성 캐릭터·감독에게 연대의 목소리를

2013년에는 여성 주인공들의 영화가 크게 흥행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노라노>(김성희)나 <집으로 가는 길>(방은진) 같은 영화들이 눈에 띈다. 홍지영(<결혼전야>), 노덕(<연애의 온도>), 강진아(<환상 속의 그대>) 등 여성 감독들 이름도 보인다. 이렇게 보면, 2013년부터 올해까지 매해 여성의 관점에서 눈에 띄는 영화의 편수는 소폭 증가했으되 큰 차이가 없다. 사실 비교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워낙 그런 작품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시사IN 조남진
여성 감독의 비율은 지난 5년간 급락했다. 위는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그렇다면 여성 감독들의 활약상은 어떨까. 올해 새로 작품을 내놓은 여성 감독이 확실히 다른 해보다 조금 더 많기는 하다. 그러나 여성 감독 수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적다. 1996년 임순례 감독이 장편 데뷔작 <세 친구>를 내놓았을 때, 그녀는 한국 영화 역사상 여섯 번째 여성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2000년을 기점으로 여성 감독의 수는 급속히 증가했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아니, 여성 감독의 비율은 지난 5년간 오히려 급락했다. 올해 6월 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트레일러(소개 영상)는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트레일러에 따르면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100만명 이상 관객이 든 영화 22편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한 편도 없다. 전체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1년 10.7%에서 매년 감소해 2015년에는 5.2%에 그쳤다.

반면 서울독립영화제 김동현 사무국장이 <씨네21>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같은 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국내 작품 중 여성 감독의 비율은 45%에 달한다. 모든 독립영화 감독들이 상업영화 제작을 목표로 하지는 않겠지만, 이 엄청난 격차는 여성 감독에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혹독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의 분위기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작품들이 늘어났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작품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가치를 부여해준 관객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라 생각한다. 여성의 삶과 꿈이 제대로 반영되는 영화들, 하다못해 ‘근사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는 터무니없이 적은 한편, 여성혐오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확대 재생산하는 영화들, 여성 캐릭터와 여성 배우를 착취하는 영화들은 너무 많다. 그 가운데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 및 그런 여성들이 이끌어가는 서사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성 캐릭터를 그저 장식품으로만 소모하거나 맥락 없이 성적 대상화하는 영화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또한 지금 한국의 이 척박한 상황에서 고군분투해온 여성 감독들에 대한 응원과 연대의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제 가치를 부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덕분에 <비밀은 없다>나 <미씽> <연애담> 같은 영화가 흥행 성적과 상관없이 주목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일종의 ‘착시’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른바 ‘천만 영화’와 ‘망한 영화’로 극단적으로 갈리고 비평과 담론의 장이 사라진 지 오래인 현재, 무수한 영화가 빠르게 사라지거나 쉽게 잊힌다. 그러나 관객들은 성난 목소리로 이 영화들의 미덕을 제대로 알아봐주고 거기에 또렷한 존재감을 불어넣었다.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함부로 배제되거나 착취되지 않고 제대로 다뤄지기를, 더 많은 여성의 삶이 영화에 반영되고 또 영화를 이끌어가기를, 또한 영화 밖에서 영화를 만드는 여성들이 차별 없는 대우와 존중을 받기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앞으로 더욱 커지고 거세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더 다채로운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드높은 요구에 한국 영화계는 지금 과연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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