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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물었다 “금관이 나올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금관에 집착했다. ‘고분 발굴’ 관련 보고 때도 금관 출토 가능성을 가장 먼저 물었다. 천마총에서 금관이 나오고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2월 15일 목요일 제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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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금관을 매우 좋아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 실무단 측이 박 전 대통령의 이런 성향을 자극해서 고분 발굴 작업을 좀 더 용이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한창 수립 중이던 1971년 6월 말~7월 초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경주 개발 실무단의 일원인 정재훈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이 청와대 상황실에서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한 부문은 ‘고분 발굴’이었다. 고분 관련 인력은 물론 고고학 전문가 자체가 희귀했고 발굴 노하우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매우 ‘담대한’ 계획이었다. 또한 정재훈은 당시 이미 경주 불국사 복원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던 김정기 박사 등의 인력(‘불국사 팀’)을 고분 발굴에도 동원하겠다고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질문했다. “금관이 나올까?”

고분을 파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금관의 유무를 알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정재훈은 호기롭게 답변해버렸다. “금관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렇게 저돌적이고 어떻게 보면 무모하게 말한 이유를 생전의 정재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실 발굴을 해봐야 알지. ‘금관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해도 괜찮았을 거야.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 책임성 없고, 그 일에 대한 (박정희의) 열의를 식게 만드는 것 같았어. 이런 연유로 98호분(황남대총), 엄청 큰 고분을 (발굴 대상지로) 선정하게 되거든.”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973년 7월 시작한 황남대총 발굴은 1975년 10월 종료되었다. 북분에는 금관이 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답변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한반도의 최대 고분인 황남대총을 파기로 결정했다. 또한 황남대총 발굴을 위한 일종의 훈련으로 천마총을 먼저 파게 되는데(1971년 하반기), 여기서 덜컥 금관이 출토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천마총 금관은 당시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편이었다. 어쨌든 박정희는 천마총 금관의 출현 덕분에 ‘금관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관이 나올 거라고 무턱대고 약속한 정재훈도 어깨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천마총보다 훨씬 큰 고분이니 더 화려한 금관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1973년 7월, 김정기 박사가 이끄는 조사단은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봉분 두 개를 이어붙인 고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착수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황남동 98호분’으로 불리던 황남대총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표주박을 닮아서, 표형분(瓢形墳)으로 분류된다. 황남대총의 봉분 중 북쪽의 것을 북분(北墳), 남쪽의 것은 남분(南墳)이라 불렀다.

두 봉분에 대한 작업이 마무리된 것은 2년쯤 뒤인 1975년 10월8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황남대총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 덩치에 어울리게 무수한 유물을 쏟아낸 것이다. 둥근밑항아리·굽다리접시 등 토기류를 비롯해 안장 등의 말갖춤, 무엇보다 금관·은관·목걸이·허리띠 등의 장신구도 다수 출토되었다.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황남대총 북분의 목관 내부에서 금관과 금허리띠가 출토되었다.
박정희가 애타게 기다리던 금관은 1974년 북분에서 나왔다. 흔히 신라를 일컬어 ‘황금의 나라’라고 부른다. 신라를 이렇게 불리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한국 고고학은 황남대총 발굴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황남대총의 주인이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마립간 시대(제17대 ‘내물’에서 22대 ‘지증’까지 6대의 임금을 부르는 명칭) 신라왕 부부의 무덤이라는 것밖에 없다. 북분의 경우,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적힌 은제 허리띠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왕비의 무덤으로 보인다. 남분이, 왕비의 남편(마립간)이 묻혔을 북분보다 늦게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황남대총을 파기 위한 훈련용으로 천마총을 발굴한 보람은 있었을까? 당시 조사 보조원으로 천마총·황남대총 발굴에 모두 참여한 최병현 숭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물론이다”라고 단언한다. 최병현에 따르면, 발굴단은 천마총 조사에서 “아! 신라 고분이 이렇게 생겼구나”라는 지식을 얻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둘 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시신과 장신구 등을 넣은 목관(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은 형태의 무덤이란 의미다. 천마총을 통해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굴단은 황남대총에서도 어느 정도를 파내려 가면 적석부(積石部:나무 덧널 위에 쌓은 돌무더기)가 나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천마총 발굴 이전의 한국 고고학계는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무덤의 핵심인 목관이 지하에 묻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천마총을 발굴해보니 목관이 지상에 놓여 있더라는 것이다. 황남대총의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나오지도 않은 금관을 사진까지 붙여 보도하기도

다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천마총의 경험으로 인해 낭패를 본 측면도 있다고 최병현은 말했다. “황남대총에서는 봉분 반쯤 내려가면 적석부가 나올 걸 미리 알았으니, 그만 봉토 조사를 소홀히 한 거야. 봉분 절반을 툭 잘라서 북쪽 부분만 먼저 파고 내려갔지. 그랬더니 흙이 무너져 내리고 난리가 아니었어. 당연히 토층 조사도 제대로 못했지.”

황남대총 발굴에서도 언론들은 특종 경쟁을 벌이며 에피소드를 남겼다. 희대의 오보가 양산되었다. 정치권력이 ‘유신헌법’이란 철퇴로 언론을 다스리던 암울한 시대, 어쩌면 업적을 과시하고픈 권력과 자유로운 보도에 굶주렸던 언론이 고고학에 열광하면서 이해관계를 일치시킨 드문 경우인지도 모른다. 신라 고분 조사연구원 출신인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의 회상이다.

“(황남대총) 남분을 조사하던 1975년 6월30일 오후에 마침내 목관 내부 유물 노출에 들어갔어. 고분 주위에 둘러친 철조망 울타리 밖에서는 이미 며칠 전부터 진을 친 기자들이 정보를 캐내려고 아우성이었어. 그때는 워낙 보도 통제가 심했으니까. 정식 발표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기자들이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어. 할 수 없이 북분 조사 때는 목관 내부 조사를 밤에 몰래 했다니까. 그랬더니 현장 불빛을 본 기자들이 각종 추측 기사를 쏟아낸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한테 박살나고, 상부 기관에서는 ‘우리도 모르는 기사가 어떻게 났느냐’라고 닦달을 해댔어.”

이런 와중인 1975년 7월1일자 조간신문을 받아든 황남대총 조사단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경주 황남동 고분에서 또 금관 출토’라는 1면 머리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1974년 북분에서의 금관 출토에 이어 남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오보였다. 그러나 해당 기사엔 남분에서 출토되었다는 금관 사진까지 턱하니 붙어 있었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출토된 다른 금관을 찍은 것이었다. 남분에서 금관이 아니라 금동관(청동으로 만든 왕관을 금으로 도금한 유물)이, 그것도 극히 훼손된 상태로 나온 것은 이로부터 몇 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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