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실업, 두 번째는 인플레, 그리고 세 번째가 전쟁이다. 그런데 요즘, 박근혜 대통령은 거꾸로 가고 있다. 대통령이 홀로 전쟁의 문턱에 서서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국군의 날인 10월1일 계룡대에서 북한 주민을 겨냥해 한 말을 계기로 이런 의구심이 더 늘었다. 박 대통령은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놓을 것입니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연설했다. 분단 역사상 남쪽 대통령이 북한 주민들에게 탈북을 공식 권유한 최초의 발언이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북한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비판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북한에게 사고 치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내치용’이라는 시각도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불거지며 레임덕이 오자 대북 강경책으로 국면 전환을 노린다는 얘기다.
 

ⓒ연합뉴스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대북 관련 발언을 보면 ‘기승전-북한 붕괴’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대중 무역량이 늘고 핵과 미사일 시험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내정 실패를 덮는 차원을 벗어나 대통령이 실제로 군사적 충돌을 유도할 것이라는 정세 분석까지 나왔다. 국민의당 최경환 의원은 10월4일 자신이 받은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공개했다. 최 의원에 따르면, 외교·안보 분야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한 예비역 장성은 “(박근혜) 대통령의 다음 수순은 북한 도발을 유도해 한·미 연합군이 보복할 수 있도록 북을 계속 자극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 계획대로라면 내년 상반기까지 남북 간 전쟁에 준하는 군사적 충돌이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한반도 긴장의 원인은 대통령’이라는 비판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사는 일련의 발언 연장선이었다. 8·15 경축사 때도 박 대통령은 갑자기 “북한 당국의 간부들과 모든 북한 주민”을 호명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통일은 여러분 모두가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각자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핵과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는 새로운 한반도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데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촉구했다. 북한 주민뿐 아니라 간부들에게 차별과 불이익을 주지 않을 테니 남한 주도의 통일에 동참하라고 권유한 것이다. 또 10월5일 제10회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도 박 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광적으로 집착할수록 국제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만이 가중될 뿐이며 결국 자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8월22일 을지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북에서 체제 동요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라고도 말했다. 북한 붕괴론에 입각해 북한 당국과 주민을 분리 대응하겠다는 속내를 대통령이 연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노골적인 대북 발언을 통해 ‘말의 전쟁’을 본격화한 것은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과 2월의 장거리 로켓 발사 직후부터다. 장거리 로켓 발사 뒤인 2월16일 국회 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핵 개발로는 생존할 수 없고 오히려 체제 붕괴를 재촉할 뿐이다”라며 체제 붕괴라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 그 이후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라는 말이 박 대통령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다시피 했다. 최근 발언은 북한 체제의 동요 내지는 붕괴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더욱 깊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이처럼 대통령에게 확신을 갖게 했을까?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이하 통준위)에 참여했던 한 국제정치학자의 전언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지난해 7월7일 통준위 회의에서 대통령은 전문가인 위원들이 보기에도 다소 뜬금없는 발언을 했다. “북한 체제가 동요하고 있다. 통일이 내년에 올 수도 있으니까 잘 준비하라.” 대통령이 이날 제시한 근거는 “고위급 탈북자가 많아지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바로 통준위 회의 두 달 전 북한 정찰국 소속 대좌의 탈북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대좌면 우리의 대령에 해당하지만 정찰국 대좌는 인민군 중장(별 두 개. 남한의 소장)에 해당한다며 인민군 출신 중 최고위급의 망명이라고 언론에서 호들갑을 떤 바 있다.
 

ⓒ연합뉴스10월1일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 날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열병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보수 집권 세력은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보였다. 북한에서 지도부 교체나 고위급 인사 탈북 등의 변수가 일어나면 예외 없이 체제 붕괴의 징후로 읽었고 ‘통일 대통령’ 환상에 쉽게 빠졌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고, 2008년 김정일 위원장 뇌졸중 발병 후 이명박 대통령 또한 그랬다. 그리고 2013년 12월 장성택 처형 이후 박근혜 정부 역시 한동안 북한 붕괴론에 빠졌다. 고위급 인사가 탈북했다는 소식만 접하면 마치 유행병처럼 다시 붕괴론이 퍼졌다.

최근 일련의 대통령 발언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해 7월 통준위에서 한 대통령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에는 정찰국 대좌의 탈북이 계기였다면 올해는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 망명이 계기다. 8·15 광복절 경축사부터 그렇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이 태영호 공사의 망명 사실을 언론에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게 8월17일이다. 8·15 광복절 경축사 이틀 뒤다. 즉 대통령은 태영호 공사 망명 사건을 사전 인지하고, 고무된 상황에서 북한 주민뿐 아니라 간부들까지 호명하며 통일 과정에 동참하라고 한 것이다.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사는 북한 주민에게 탈북을 권유하는 데까지 나갔다. 박 대통령이 고위급 망명을 북한 체제 붕괴의 신호로 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근 베이징에서는 북한 보건성 고위 간부가 가족과 함께 일본 망명을 추진 중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 엘리트들의 망명이나 탈북을 체제의 붕괴 징후로 볼 수 있을까? 고위급 망명으로 따지자면 1997년 황장엽 비서 망명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황장엽은 북한 체제의 골간인 주체사상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최고위급 인사가 극적인 탈북 과정을 거쳐 남한에 들어왔지만 그로 인해 북한 체제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물론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카리스마’가 버티고 있었다. 반면 지금은 김정은 위원장의 불안해 보이는 통치와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2270호에 따른 국제적 고립과 압박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1997년에도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평양 조선중앙통신6월23일 ‘중장거리 전략 탄도미사일 화성-10’의 시험발사 성공 후 웃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고위급 탈북하면 체제 붕괴 징후라며 호들갑

태영호 공사 같은 사람의 망명이 과연 체제 동요 내지 붕괴의 전주곡이 될 수 있을까? 또 태영호 공사 망명 직후 정부나 언론에서 거론한 사유들이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 동기가 될 수 있을까? 8월17일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북한 핵심 계층 사이에서 김정은 체제에 더 이상 희망이 없으며, 북한 체제가 이제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지배 계층 내부 결속이 약화되고 있지 않나 판단한다”라고 설명했다. 이후 언론에 거론된 이유들은 조금 더 구체적이었다. 대북 제재와 압박 때문에 해외에 근무하는 북한 외교관들이 현금 조달 부담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거나 남한이나 서구 사회에 대한 동경, 태영호 공사의 경우 특히 자식 교육 문제 등이 주로 거론됐다.

과연 지금은 어떨지 북한 군부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고위급 탈북자들에게 물어봤다. 고위급 탈북자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의 엘리트들이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미국과 언제까지 대립할 것인지 답답해하고, 북한도 언제쯤 중국처럼 살 수 있을까 고민한다. 한국을 동경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맞다. 한국 대기업들이 물건을 잘 만들고 한국 드라마가 중국 드라마보다 스케일은 작아도 훨씬 짜임새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다고 탈북할까? 자기 체제에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부모·형제·자식 등 모든 인간관계가 온존해 있고 문화적·정서적으로 익숙하고 심지어 그 사회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있는 한 탈북은 쉽지 않다. 동경하는 것과 선을 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럼 어떨 때 선을 넘게 되는가? 고위급 탈북자는 “자기 몸에 괴로운 일이 생겨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됐을 때이다”라고 설명했다.

 

 

 

 

ⓒAP Photo지난 8월 망명한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공사(위)는 BBC 루퍼트 윙필드헤이스 기자의 북한 모욕 기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다.

태영호 공사의 경우 망명을 결심한 정황이나 배경만 나오지 구체적인 동기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개인적 망명 동기를 유추해볼 만한 단서가 없지는 않다. 8월21일자 영국 언론에 따르면 ‘태영호 공사는 망명을 결정하기 약 두 달 전 영국 왓퍼드 지역의 한 골프장에서 영국 정보기관 담당자들과 처음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는 왜 갑자기 평양으로 돌아가게 됐을까? 북한 사회 생리에 밝은 고위급 탈북자들은 그가 망명하기 얼마 전 있었던 한 사건을 주목한다. 바로 BBC 특파원 루퍼드 윙필드헤이스 사건이다. 윙필드헤이스는 지난 5월 북한 제7차 당 대회 취재차 평양에 갔다가 김정은 위원장을 모욕하는 기사를 쓴 혐의로 순안공항에서 8시간 동안 구금됐다가 추방당했다. 윙필드헤이스는 도쿄 특파원이지만 그가 속한 언론사가 영국의 BBC이기 때문에 방북 비준과 추천을 바로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 태영호 공사가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태 공사는 대언론 창구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면 북한 체제의 속성상 비준해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 현지에서 사상투쟁을 하게 한 뒤 국내로 즉각 소환당하거나 최소한 당적 박탈과 지방 좌천까지 각오해야 한다. 외교관 인생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태영호 공사의 국내 망명이 알려진 8월17일부터 역순으로 두 달 전쯤 소환명령이 떨어졌다면 십중팔구는 윙필드헤이스 특파원 비준 책임에 대한 추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태영호 공사가 망명에 이른 계기가 이런 개인적 사유라면 북한 체제의 동요 내지 붕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AP PhotoBBC 루퍼트 윙필드헤이스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보수 세력의 단골 주장인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전략에 입각해 있다. 국제사회 대북 제재로 정권을 압박하면 내부 경제난이 심화되어 엘리트층이 동요하고 주민이 이반할 것이라는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가 시작될 당시 정부는 6개월 정도를 제재 효과가 나타나는 시한으로 봤다. 그것이 대략 9월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가. 7월 북·중 무역 규모를 보면 확실히 줄었다. 6월에 중국의 대북 수출이 2억9000만 달러였다가 7월에는 1억9000만 달러까지 떨어진 것이다. 8월은 어떤가. 놀랍게도 중국의 대북 수출 액수가 3억3658만 달러다. 7월 액수의 거의 두 배에 육박할 뿐 아니라 2014년 12월 3억6000만 달러 이후 두 번째 많은 액수다. 1월에서 8월까지 합계도 작년 동기 대비 5.2%나 늘었다. 8월에 북한에서 중국으로 수출한 액수는 2억8568만 달러로, 이 역시 2014년 9월의 3억 달러 이래 두 번째 많은 액수다. 1월에서 8월까지 북한의 대중 수출 총액은 16억 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1.6% 줄었을 뿐이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북·중 무역 규모 급증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름철에 무역이 활발한 데다 7월에 소진하지 못한 ‘무역와크(허가증)’를 8월에 소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뿐일까. 지난 7월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의 대북 방침 변화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 런민 대학 스인훙 교수는 9월12일자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사드의 한국 배치 결정 후 시진핑 주석이 미국과의 협력을 더욱 주저하게 됐다. 중국은 북한과 가깝기 때문에 북한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라고 단언했다. 또 “중국이 북한에 들어갈 석유를 끊어도 북이 핵을 포기할 확률은 50%인데 왜 중국이 북한을 적으로 돌리는 리스크를 감당해야 되느냐”라고 반문했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 중국 전문가가 미국 측에 이렇게 직설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도 새롭다. 〈뉴욕 타임스〉의 결론 역시 1990년대 내내 반복된 얘기라 기시감이 든다. 북한 대외 무역의 90%는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한·미·일은 북한과 교역이 전무하다. 그나마 교류하던 개성공단까지 폐쇄한 마당이다. 러시아 출신의 대북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표현대로 “중국이 미국의 대북 제재 수레바퀴에 막대기를 꽂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중국은 정해진 품목에 한해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은 하지만,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협조는 거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뭔가 거창한 대북 압박을 할 것처럼 한국 언론에 알려졌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단이 없어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한다. 대통령의 고정 레퍼토리인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의 실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연합뉴스8월 이후 북·중 무역 규모가 커지고 있다. 위는 북한 신의주로 짐을 싣고 갔던 중국 트럭들이 줄지어 단둥으로 돌아오는 모습.

설령 대북 제재로 경제난이 심화된다고 체제가 붕괴될까? 한 고위급 탈북자는 “인류 역사상 제재로 한 사회가 무너진 경우는 없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반한 계급의식(증오심과 적대감)’을 고취하고 ‘반공화국 책동’에 책임을 전가할 명분을 줄 뿐이다. 제재가 길어지는 것은 오히려 김정은 체제의 조기 안정화와 공고화를 도와줄 뿐이다. 북한의 노동당 지배체제는 김정일 위원장 시대에 완성됐다. 당 조직지도부가 중앙과 지방을 망라한 당·정·군 모든 간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틀어쥐었다. 언론은 북한의 2인자가 황병서냐 최룡해냐로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지만 사실상 북한의 2인자는 바로 당 조직지도부인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제거’된다 해도 당 조직지도부가 살아 있는 한 북한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후 김정은에게 권력이 승계될 때처럼 당 조직지도부가 권력 공백의 과도기를 틀어쥐고 김씨 집안의 다음 인물에게 권력을 이양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황장엽 비서는 “김정일 유고 시 북에서 권력을 승계할 인물이 100명도 넘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희망대로 북한 당국과 주민을 분리하고 북한 당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다면, 사드 배치를 감행해서는 안 된다. 북한 대외무역의 90%를 틀어쥐고 있는 중국의 협조 없이 북한 당국을 고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제재와 압박 일변도는 당국을 주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민에 대한 지배 명분만 강화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물론 핵미사일 제조에 쓰이는 전략 물자는 제재해야 한다. 북한이 SLBM(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기술을 확보했다 해도 당장 전력화가 어려운 이유는 미사일 제조에 쓰이는 특수 알루미늄 등을 전부 해외에서 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기 제조에 쓰이는 전략 물자는 제재하되 시장을 죽이는 제재는 하면 안 된다.

2000년대 남북 교류가 활발할 때 남쪽을 방문한 북한 인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북한 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남한에서 가져간 물건들을 전부 내놓아야 했고 남쪽에서 보고 들은 얘기를 일절 발설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이 남한 사회의 발전상을 접하고 대남 ‘계급의식’이 약화된 사건이 일어났다. 2000년대 중반부터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전자제품과 전기밥솥이 밀거래 방식으로 평양 중구역 시장 등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북·일 관계 악화로 일제 전기밥솥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개성공단 전기밥솥이 독점적으로 공급되었는데, 한국말로 된 사용설명서가 너무나 신기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남한 하면 빈부 격차에 민주화가 안 된 사회라는 식의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이었는데 개성공단 전기밥솥이 바로 대남 인식을 개선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북한 주민들의 대남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한 개성공단을 박근혜 정부는 하루아침에 폐쇄했다. 그런 뒤 대북 제재와 압박만 연일 떠들어 ‘반한 계급의식’만 고취시키면서 어떻게 탈북을 유도할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이 탈북과 북한 붕괴를 아무리 얘기해도 공허할 뿐이다. 1990년대에 경험했던 북한 인식의 오류를 박근혜 정부가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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