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5차 핵실험의 포로가 되다시피 한 대북 정보 당국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한국 정보 당국이 미국 위성사진에 기대 4월15일 태양절, 4월25일 인민군 창건일, 5월6일 당 대회 전후 식으로 5차 핵실험 시기 맞히기에 열중하는 동안 전혀 다른 방향의 움직임이 하나둘 포착되고 있다. 바로 북·미 대화다. 그것도 군사 대화의 징후들이다.

4월20일을 전후해 〈시사IN〉은 서로 다른 취재원으로부터 북·미 대화 ‘징후’에 대한 여러 정보를 입수했다. 북한의 5차 핵실험에 대한 시각은 엇갈렸지만 북·미 대화, 나아가서 군사 대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데는 견해가 일치했다. 해외의 한 대북 소식통은 “리수용 외무상 방미 이후 더 중요한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다. 제3국에서의 군사 대화 내지, 2000년 조명록 총정치국장 방미와 같은 일이 재현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 역시 “의전은 같지 않겠지만 조명록 방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북한 정보에 밝은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5월 초 6자회담에 관여하는 북한 고위 당국자가 미국을 방문하고, 5월 중순 이후 북한이 (핵 동결과 관련한) 중대 발표를 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AP Photo북한 리수용 외무상(왼쪽)이 4월23일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핵실험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북한의 핵실험 여부에 대해서는 “핵실험을 할 경우 북·미 간 물밑 대화 흐름이 깨진 것을 의미한다”라는 견해와 “조건부이지만 5월6일로 예정된 7차 당 대회 전에 핵실험을 통해 핵 보유국 위상을 확고히 하고 핵 군축·평화협정을 위한 대미 회담을 시작하려고 할 것”이라는 견해가 맞선다. 그럼에도 소식통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리수용 방미 후 북·미 외교 당국자 간 실무 조율, 북한의 중대 발표, 그리고 군사 당국 간 대화를 통한 확인이라는 로드맵이 그려진다.

4월20~24일 리수용 북한 외무상 방미에 대해 정보 당국과 국내 언론은 ‘새로운 도발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4월23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파리기후변화협정 서명식에 참가한 리 외무상의 방미 이유가 얼른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 면담이라도 했다면 국면 돌파를 위한 시도라고 평가했겠지만 면담은 불발됐다.

하지만 그의 방미가 앞뒤 맥락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리수용 외무상이 유엔의 스테판 두자릭 대변인에게 유엔 방문 의사를 통보한 날짜는 4월11일. 다음 날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씨가 평양을 찾았다. 그는 4월23일까지 평양에 머무르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노동당 제1비서)과 그의 누이동생 김여정, 최룡해 당 비서 등과 만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 언론은 “김정은 비서가 ‘미국에 대해 울컥하는 심정으로 미사일을 발사하곤 했다’고 얘기했다”라는 후지모토 씨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리수용 외무상은 후지모토 씨가 평양에 머무르던 4월20일 뉴욕에 도착해 그가 평양을 떠난(4월23일) 다음 날 뉴욕을 떠났다.

ⓒ시사IN 조남진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 씨(위)는 같은 시기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일의 요리사’ 방북 뒤에 미국이 있다?

그렇다면 리수용 외무상 방미와 후지모토 씨 방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후지모토 겐지 씨는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다. 2012년 7월 그의 방북 후 다음 달에 북·일 적십자회담, 9월에 과장급 회담, 11월에 국장급 회담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바 있다. 바로 후지모토 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의 방북 뒤에 미국 군사 당국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의 방북 시점이나 김정은 비서와 나눴다는 대화 내용으로 볼 때, 이번에도 미국 군사 당국과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미국 군사 당국이 북·미 대화 채널에 다시 등장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거론된다. 하나는 중국의 요구다. 지난 3월 한 달간 중국은 신의주특구를 비롯한 중국의 대북 경협과 북한의 핵 동결·비확산 선언의 맞교환을 위해 북한 측과 옥신각신했다. 중국으로서는 할 만큼 한 셈이다. 북한이 추가로 요구하는 평화협정 체결이나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 같은 문제는 미국, 그것도 군사 당국이 직접 나서야 할 문제다. 미국 군사 당국으로서도 북한의 5차 핵실험만은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리수용 외무상의 방미가 후지모토의 방북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리 외무상은 방미 전 미국 국무부와 접촉해 존 케리 장관 면담을 약속받았다고 하는데, 이후 케리 장관이 부인해버렸다. 케리로서는 군사 분야는 자기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유엔 본부를 찾은 리수용 외무상은 북한 핵무장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도, 4월23일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실험을 중단하겠다”라며 북측 요구 사항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미국 측에서는 뜻

ⓒ연합뉴스크리스토퍼 넬슨 편집장은 기존 북핵 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메시지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밖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반응을 보였다. 오바마는 “북한이 핵 개발 중지 용의가 있다면 언론을 통해 발표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식을 택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북·미 대화 어젠다를 언론에 공개적으로 천명한 건 대화의 진정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면 미국도 긴장 완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오바마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 완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란 말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당 대회 후 중대 발표를 통해 ‘핵 동결 선언(비핵화를 위한 진지한 태도)’을 하면, 미국도 ‘긴장 완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즉 군사 대화)’에 응하겠다는 것을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약속한 것이다. 후지모토 겐지 ‘밀사’ 방북, 리수용 ‘특사’ 방미, 오바마 대통령의 답변이 하나의 고리로 이어지는 셈이다.

또 다른 ‘메신저’가 이번에는 서울을 찾았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정치·외교 정보지 〈넬슨 리포트〉을 발행하는 크리스토퍼 넬슨 편집장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이 4월26~27일 한국에 왔다. 이들은 아산정책연구원 주최 세미나에 참석해 미국의 북핵 정책 변화에 대해 발표했다. 비핵화에 초점을 둔 기존 북핵 정책을 비확산으로 변경할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리수용 외무상 방미를 계기로 워싱턴의 주변에 머물던 비확산파가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세미나라는 공간을 이용해 정책 변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처지가 곤란할 때 미국이 즐겨 쓰는 외교적 수법이다. 북한 핵의 현실을 인정하고 비핵화가 아닌 확산 방지 쪽으로 미국 정책이 바뀔 테니 한국도 알아서 대비하란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대북 정보 당국은 ‘북한의 추가 도발’에만 신경을 집중하느라, 이 같은 미국의 태도 변화라는 중요한 흐름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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