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도착 첫날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을 이제 던져야 할 때가 됐다. “미국과 수교 후 한 달에 8000명씩이나 미국으로 떠난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느닷없는 질문에 쿠바인 가이드 말루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고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망명 사태와 그 양상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망명 사태란 아마도 쿠바 혁명 직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일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쿠바 혁명 초기에는 주로 부유층이 망명했고 그 뒤로 정치적 동기의 망명자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최근에 쿠바를 떠나는 사람들은 경제적 이유가 크다는 게 말루가 하고 싶은 얘기인 듯했다. “젊은 세대들은 무상교육 덕분에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쿠바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미국에 건너가면 얼마나 잘살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쿠바에서는 의사나 교수, 노동자들 월급에 차이가 없다. 직업에 대한 차별이 없고 빈부 격차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월급은 쿠바 페소(CUP)로 받는데 외국인 전용 화폐인 쿡(CUC)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20~30쿡(1쿡=24CUP) 정도 된다고 한다. 20~30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1달러=0.87CUC). 한 달 월급이 한국 돈 3만~4만원 정도인 셈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쿠바 사회가 점점 쿡 위주 사회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는 쿠바 페소를 가지고 쌀 등 기본 생필품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쿡으로만 살 수 있는 생필품의 가짓수가 점점 늘고 있다.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한 달에 300쿡(약 345달러=약 42만원), 월급보다 최소 10배 이상은 벌어야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풍경이 벌어진다. 투잡, 스리잡은 기본이다. 대학교수가 아르바이트로 관광 가이드나 택시 기사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레스토랑 종업원이나 바텐더 등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은 직업의 인기가 높은 것도 자연스럽다. 각 가족이 갖고 있는 쿡을 모아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대가족 제도가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의사들의 해외 유출이 심각하다. 무상교육으로 의대를 마치면 2년간 해외 봉사를 해야 하는데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쿠바 정부 역시 이런 문제를 모를 리 없다. 지난해 이미 의사 급여를 두 배로 올렸고 올해는 교사 급여를 인상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산의 상당 부분을 무상교육과 의료 및 복지 혜택을 위해 지출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부를 탓할 수도 없다.

ⓒ시사IN 남문희2008년 문을 연 기념품 판매 시장인 산호세 시장. 매장 주인의 60%는 공무원이고, 나머지는 자영업자다.

경제 제재의 빗장을 푼 라울과 오바마의 만남

세계 최고의 교육·의료 수준에다 성 차별이 없어서 여성이 웬만한 조직의 중상위층 간부를 다수 차지하는 사회, 그럼에도 자식조차 맘 놓고 키울 형편이 못 되는 사회라면 당연히 출산율 저하와 인구노령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의료복지로 노인들은 오래 사는데(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 여성들은 여러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다(출산율 1.78). 이 때문에 2020년이면 쿠바가 중남미에서 가장 늙은 국가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쿠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을 따지고 보면 54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59년 1월의 혁명 직후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와 미국의 관계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쿠바 산업과 경제의 중추를 장악한 미국 자본과 혁명정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혁명정부가 국유화 조처로 미국 기업의 재산을 몰수하자 미국은 1961년 단교를 선언하고 이듬해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경제 봉쇄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로 쿠바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카스트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1992년 쿠바 민주화법, 1996년의 헬름스-버턴법으로 쿠바와 교류하는 기업은 국적 불문하고 미국의 보복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던 중 양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쿠바에서는 2008년 2월 피델 카스트로가 건강상의 이유로 한발 물러서고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체제가 등장했다. 피델은 사회주의 통제경제와 개혁정책 사이에서 방황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1990년대 초 위기가 닥치자 1993년에 자영업을 부활시키고 국영농장의 협동조합화, 농민시장 부활 등 개혁정책을 취하기도 했으나 2000년대 들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가 싼값에 석유를 공급하자 곧 원점으로 돌아갔다.

ⓒAP Photo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왼쪽)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9월29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양자회담을 했다.

하지만 시장경제 도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라울 카스트로는 2009년 주요 장관과 공기업 고위층을 군부 인사로 물갈이한 뒤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특히 2010년 1월부터 약 3개월간 900만명의 국민이 토론에 참여해 31개 개혁 과제를 도출하고 2011년 4월 14년 만에 열린 6차 당대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면서 개혁정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국민의 90%가 공무원이라 할 정도로 과도한 중앙 집중을 완화해 국가 사무의 상당 부분을 민간에 이양했다. 자영업을 늘려 공무원에서 물러나거나 해직된 사람을 흡수하는 한편 세금을 걷어 재정을 확충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지난 3~4년 사이 자영업자는 40만명, 자영농은 17만명이 늘었다고 한다.

라울이 집권한 그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오바마가 당선된 것은 다행이었다. 오바마는 이란과 북한, 쿠바와 직접 대화하겠다는 자신의 공약대로 2009년부터 쿠바계 미국인의 여행자유화 조치 등 경제 제재를 완화했다. 미국이 이처럼 쿠바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게 된 것은 오바마 개인의 공약 외에 반세기에 걸친 봉쇄정책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을 정도로 반세기에 걸쳐 미국은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 시도, 봉기 유도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쿠바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국민들의 단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중국과 러시아가 쿠바에 적극 진출하고 프랑스를 선두로 스페인·독일 등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3년 초부터 비밀리에 시작됐다는 쿠바·미국 간 접촉 과정에서 미국이 더 적극적이었고, 쿠바는 1903년 이래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관타나모 미국 해군기지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8개월간 버텼다는 얘기도 있다.

쿠바는 앞으로 미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할까. 북한과 미국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우리로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쿠바가 참고하는 것은 바로 베트남 모델이다. 이번 쿠바 여행단의 단장이자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유럽의 쿠바 침략사’를 연구한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이사장에 따르면 쿠바는 꽤 오랫동안 베트남 모델을 연구해왔다. 3년 전부터는 하노이의 쿠바 대사관에 공산당의 정치국원급 고위 인사를 단장으로 정부와 의회 인사 등이 망라된 특별팀이 가동됐다고 한다.

ⓒ시사IN 남문희오비스포 거리에 걸려 있는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사진.

최대 쟁점은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 이후 벌였던 최혜국 대우(MFN) 협상을 쿠바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IBRD) 같은 국제 금융기관,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 통상기구에 회원국으로 가입하는 게 최대의 난관으로 여겨진다. 경제통계를 투명하게 밝혀야 할 뿐 아니라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 까다로운 가입 조건 때문에 소련·동유럽 같은 체제 붕괴 위험도 도사린다. 회원 가입이 안 되면 투자자금 융자를 받을 수 없거나(IMF·IBRD), 비회원국 수출 상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는 규약(WTO)으로 인해 외국 자본의 직접투자를 받을 수가 없다. 한 가지 우회로가 바로 미국과의 무역협상으로 최혜국 대우를 받는 길이다. 미국 시장에 수출을 노리는 외국 자본의 투자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중국에 이어 베트남 역시 미국과 협상을 통해 최혜국 대우를 받은 경우다.

쿠바는 어떻게 할까. 최혜국 대우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에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창주 이사장은 “쿠바는 혁명 이전 미국 문화가 범람하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이 봉쇄정책만 풀어주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수교를 하긴 했지만 미국인은 쿠바에서 달러 사용만 가능할 뿐 미국 은행이 발행한 신용카드나 주식·채권 같은 달러 외의 자산 거래는 허용되지 않는다. 미국의 금융경제에 대한 경계 때문이다.

말루 역시 최혜국 대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녀는 “미국은 늘 자신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최혜국 대우를 미끼로 삼으려 들겠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쿠바 제일의 베트남어 통역사이고 자신도 하노이 대학에서 2년간 유학한 경험이 있어 베트남의 개혁 과정에 대해서도 밝았다. 그녀에 따르면 쿠바는 매우 오랫동안 베트남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 결과 배워야 할 점도 많지만, 극복해야 할 점도 많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특히 토지나 건물 소유권까지 외국 자본에 허용하는 등 너무 많은 것을 열어주고 있는 데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쿠바는 토지나 건물 소유권까지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며, 개방 분야도 관광과 농업, 지방의 산업 분야에 국한해 외국자본 투자를 받을 계획이라고 한다. 투자이익의 경우 외국자본이 51%를 가져가면 나머지 49%는 쿠바 정부에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 개혁·개방을 하더라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제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견지할 것이며 빈부 격차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최혜국 대우를 통한 관세 혜택이 없어도 자신들의 강점 분야이자 관세 영향을 받지 않는 유기농 농업 분야나 의료와 관광산업, 세계적 매장량을 가지고 있는 니켈 등의 지하자원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우수한 노동력 그리고 거대한 중국 시장 등 우호 국가와의 교역을 활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쿠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벌써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유럽 국가들 모습을 보면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닌 듯하다.

쿠바의 행보가 북한에 던지는 시사점

이런 흐름이라면 베트남 모델에 이어 쿠바 모델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로 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엔 안보리 제재에 직면한 북한은 앞으로 쿠바 모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북한은 베트남 모델을 염두에 둬온 듯하다. 베트남이 자국 군대의 캄보디아 철수를 대미 협상 무기로 활용한 것처럼 북한은 핵무장력을 협상 무기로 삼으려 해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논의를 종합해보면 미국은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을 통한 아시아에서의 슈퍼파워 유지를 위해 북한을 악역으로 활용하는 데에만 관심을 둘 뿐, 빅딜을 할 용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마당에 핵 무력의 증강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북한은 핵 동결을 통해 미국의 제재를 완화 내지 해제하는 선에서 대미 관계의 목표를 낮추고 그 대신 한국·중국·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해 활로를 열어갈 필요가 있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