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지난해 대통령 선거 당시 강원도 철원 백골사단을 방문해 관측 망원경으로 북한군 진지를 관찰하는 이명박 후보.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가운데 남북 문제는 매우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택하면 남북 협력에 새 지평이 열릴 것이다. 국제사회와 협력해서 10년 안에 북한 주민 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돕겠다.” 이 발언으로부터 남과 북은 사실상 파국으로 치닫는 첫걸음을 디뎠다. 〈조선신보〉가 즉각 평양 지도부가 이명박 정부 출범을 어떻게 보는지 말했다.

첫째, 비핵개방 3000 구상이 고작인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비현실적이며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핵 포기를 전제로 삼은 것은 1차 핵 위기 당시 김영삼 정부로 되돌아간 듯하다. 셋째, 개방하라느니 10년 안에 북한 주민 소득을 3000달러로 올려주겠다느니 하는 얘기도 북한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이며 같은 민족을 모독하는 일이다. 그에 덧붙여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북측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논평했다.

〈조선신보〉가 이명박 대통령을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직접 거론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여전히 ‘침묵; 즉, 할 말이 없다는 태도였다. 무슨 의미인가? 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던가? 그런 기대가 꽤 있었다는 점도 여러 경로에서 확인된다. 춘궁기에 접어들면서 식량과 비료 문제가 급했다는 관측도 나왔고, 그 협의까지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돌았다.

그렇게 보면 3월6일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서울이 북한 인권 상황의 개선을 촉구했을 때 ‘보수세력의 극악한 망발’(조평통)이라고 한 것이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나 독수리 훈련에 대해 ‘북침 핵전쟁 연습’(외무성 대변인, 조선인민군판문점대표부)이라고 비난 수위를 올린 것은 평상시 경고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즈음 유엔에서는 남북 간에 서로 약간의 ‘대화를 위한 입질’이 오갔다는 소문도 들렸으니 말이다.

북한의 '기대'는 '기대'는 분노로 바뀌고

2007년 대선 전으로 돌아가보자. 평양은 이명박 한나라당 당시 대선 후보에게 나름의 기대를 걸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신대북 정책’으로 전향적으로 나올 때만 해도 평양은 표면상 일부 평가 절하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했다. 최소한 ‘그’의 동의 아래 나왔다고 보았고 따라서 매우 긍정 평가를 가능하게 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최소한 지난 10년의 남북 경협 기조는 유지가능하리라 보았던 것이다. 물론 일말의 불안은 있었지만 이미 대선의 무게추는 이명박에게 기울어지던 참에 굳이 개인적 비난을 할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2007년 6월 이후 이명박을 직접 거명한 비난은 오늘까지도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 평양 지도부는 은근히 당선자의 인사말에 남북 문제에 대한 전향 내용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적어도 올해 1월 중순까지는 당선자가 대북 정책을 일방통행으로 밀고 나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1월 17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당선자는 “북한에 할 말은 하겠다는 것이 도전적 발언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남북 간 화해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더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김영남 (대통령 취임식) 축하사절 사안이 이명박 당선자의 수중에서 검토되고 있던 때이다. 평양은 이런 기조를 유지하는 이명박 당선자에 대해 가급적 침묵으로 일관했다. 김영남 방문을 심각하게 검토한다는 사인을 보냈던 대통령직 인수위를 쳐다보면서 쉽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김영남 초청 문제를 협의하자는 의사가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비난은 자제되며 침묵이 이어졌다. 심지어 통일부 폐지가 인수위의 대세였을 때조차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잘될 것이니 기다려보자’고 달래는 모습이었다.
 

ⓒ연합뉴스2007년 6월2일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선 노무현 대통령 부부(왼쪽). 2000년 6월16일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포옹을 하는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오른쪽).

그러나 2월25일 취임사는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렸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면밀한 재분석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히 그동안 대남 관계를 담당했던 통전부 차원이 아니라 전 부서가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적은 사안별 대응방안까지 염두에 두었다. 이때부터 좀더 본질적인 대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월1일, 3·1절 경축사는 취임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평양 지도부를 마구 흔들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남북 문제도 배타적 민족주의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민족 내부의 문제인 동시에 국제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 사회와 교류하는’ 열린민족주의를 주창했다. 내용이 의례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평양은 이를 더 심각하게 본 듯하다. 평양은 한·미 동맹과 공조 강화가 남북 관계의 선결조건임을 재확인하게 된 셈이었고 다른 누구보다도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 기조에 이것이 깊이 자리하며 ‘우리 민족끼리’ 자체를 부인한다는 걸 파악했다.

당시부터 평양이 서울을 보는 관점은 몇 가지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첫째, 과연 이명박 정부는 6·15와 10·4 공동선언을 잇겠다는 선언을 할 것인가? 둘째,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한·미 동맹 강화가 곧 대북 적대시 정책을 의미하는가? 셋째, 북핵 해결 전제론을 언제까지 유지하려고 하는가? 넷째, 북핵과 경협을 연계하는가? 이 의문들의 공집합은 지난 10년간 유지된 상호체제 인정을 통한 경협 확대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북핵이 이 모든 과거를 백지로 돌리려는가 하는 의문이었던 셈이다. 통일부-통전부의 10년 밀실 담합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이전 발언도 스크린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뚜렷한 의문점이 찍혔다.

3월19일 김하중 통일부 장관은 “북핵 문제가 계속 타결되지 않고 문제로 남는다면 개성공단 사업 확대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통일정책의 해당 부처가 북핵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하면서 개성공단을 압박했다. 그 발언으로 평양이 더 물러날 공간은 없어졌다. 불이 난 자리에 기름을 퍼부었다. 3월26일 김태영 합참의장 내정자가 국회청문회에서 ‘북한이 핵공격을 할 기미가 있으면 핵기지를 선제 공격’하겠다는, 이른바 선제타격론을 꺼냈다. 부시 행정부 초창기에 나왔던 이야기가 이명박 정부 초기에 군부 핵심 인사에 의해 밝혀졌다. 평양은 이것이 서울의 진짜 의사라고 믿기 시작했다. 통일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이 점은 더 명확해졌다. 6·15와 10·4 공동선언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새로운 원전으로 나타났다. 상호주의의 철저한 적용과, 지난 정권과의 완전한 차별화가 정책 방향이며, 그동안 금기어처럼 되었던 국군포로, 납북자, 인권문제 등도 모두 거론되었다. ‘할 말은 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의지가 육성으로 구체화된 셈이다. 해석은 ‘그것은 도발이다’ 쪽에 방점이 찍혔다.

지금도 섣불리 예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남북 관계의 파국을 서로 원하지 않는 그룹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예상하건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은 북한 측에서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이명박 정부의 '북한 설득' 실패

15와 10·4 공동선언이 무시되었다는 점은 지난 10년 그것을 김정일 위원장의 성과로 떠받친 그룹에게는 치명적이다. ‘존엄을 상실하게 만든’ 새로운 원칙 제시이기 때문이다. 둘째, 비핵개방 3000 로드맵 자체가 기본적으로 서울이 ‘(남북 간 협력을 진정으로) 할 의사가 없는 립서비스’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상호주의의 엄격한 적용 등을 포함한 ‘차별화’ 움직임에 진정성이 없다는 판단이 붙었다. 식량과 비료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인도주의에 상호주의를 적용할 심사라고 읽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넷째, 북핵이 선결 전제론으로 완전 확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이 워싱턴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평양이 활용되고 있다는 관점이 대두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측의 이러한 의구심에 대한 적절한 ‘설득’은 확실히 단기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본다. 설득을 할 기회의 장(場)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미 ‘확실한 (서울의) 도발’로 읽고 있다는 징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단순한 힘 겨루기일까? 무엇보다 이 팽팽한 남북 관계의 기싸움이 만드는 긴장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기 파국 행보가 쉽게 그칠 조짐은 없어 보인다. 결국 6자 회담의 틀과는 별개로 남북 간에는 균열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올바르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북한 길들이기가 시작되었고, 일방적인 통지를 통해 변화를 압박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평양은? 아마도 반발할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강하게. 상황에 따라 점차 강하게.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자명 오강조 (북한 전문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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