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인을 다시 보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감이 바로 왔다. 소장이었다. 처음에는 착오가 생긴 줄 알았다. 며칠 전 경찰로부터 같은 내용의 출석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손해배상 청구 소송)이었다. 민·형사 소송의 원고와 고소인은 같았다. 사단법인 대한의사협회와 최대집 회장. 같은 사안을 두고 형사 고소도 하고 민사소송도 냈다.
제560호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만화’에 나온 최대집 회장에 대한 풍자를 문제 삼았다. 이 만화가 ‘전국 13만 의사를 대표한 대한의사협회와 최대집 회장에 대해 명예훼손을 했다’는 것이다. 보통 언론 보도로 피해를 입으면 언론중재위원회를 거친다. 중재위원회가 직권조정에 나서고 신청인과 언론사가 동의하면 해결된다.
하지만 힘깨나 쓰는 이들은 언론중재위원회를 거치지 않는다. 곧바로 검찰이나 경찰 또는 법원 문을 두드린다. 대한의사협회와 최 회장도 민·형사 소송을 걸었다. 물론 걱정은 전혀 안 한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만화의 풍자에 담긴 내용은 사실 적시보다는 의견 표명에 가깝다. 순수한 의견 또는 논평의 경우에는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지 않는다(김학웅, 〈정치 풍자·패러디에 대한 법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하여〉, 언론중재위원회). 2008년 2월 대법원은 “풍자만화나 시사만평의 경우 직설적인 언행과는 달리 풍자나 은유, 희화적 표현기법이 사용되고 독자들도 그러한 속성을 감안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과장은 용인할 수 있다”라고 판시했다(대법원 2005다75736 판결).
대한의사협회도 이런 판례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민·형사 소송에 나선 목적은 명확하다. 경험적으로 보면 소송을 당하면 귀찮고 위축된다. 고소를 당하면 경찰이 보낸 출석요구서에 ‘피의자’로 찍힌다. 민사소송은 원고가 판결에 불복하면 대법원까지 진행된다. 굽시니스트와 표완수 〈시사IN〉 발행인은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 검찰 또는 법원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최 회장의 해량 때문인지, 나는 소송 대상에서 빠졌다).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권범철)가 “대한의사협회가 무리한 법적 다툼을 통해 표현의 자유와 언론 자유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경찰 조사를 마친 굽시니스트에게 위로와 부탁의 말을 건넸다. “쫄지 말고 계속 날카롭게 풍자해달라. 소송은 걱정하지 마라. 〈시사IN〉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하겠다.”
가급적 최대집 회장 임기(2021년) 안에 민·형사 소송이 마무리되길 바란다. 이번 기회에 표현의 자유를 확장하는 판례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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