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앞 한 건물 1층에 손글씨로 쓴 종이 하나가 붙었다. ‘감사드립니다. 금일부로 영업을 휴업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해주신 마음 깊이 가슴에 묻고….’ 채 마무리되지 못한 문장의 주인공은 김기성 한양툰크 대표였다. 1997년부터 서울 홍대 앞에서 운영되던 만화 전문서점 한양툰크가 8월15일 문을 닫았다. 7월 말, 가게를 정리하기로 결정한 지 보름 만이었다. 20여 년 된 서점이 ‘자리를 비우기까지’ 2주가 걸렸다.

김기성 대표는 8월 내내 책을 정리하고 반품 처리를 하느라 바빴다. 가게를 비운 뒤에도 1t 트럭 3대 분량을 파주의 창고로 옮겼다. 공지문을 쓰기까지 사흘 동안 고심했다. 아무것도 안 쓰자니 걸리고, 크게 쓰자니 좀 그렇고, 포스트잇을 붙이는 건 성의가 없어 보였다. 폐업이란 말을 차마 못 쓰고 ‘휴업’으로 대신했다. 함께 서점을 운영해온 아내 조경자씨는 무슨 미련이 있어서 그러느냐며 ‘폐업’이란 두 글자만 붙이라고 타박했다.


ⓒ시사IN 신선영김기성 한양툰크 대표(위)는 가게를 정리하며 폐업이 아닌 ‘휴업’이라고 쓴 문구를 붙여놓았다.

한양툰크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곳을 다녀갔던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을 꺼내놓으며 아쉬워했다. 한양툰크는 ‘오덕(오타쿠)의 성지’로 불렸고,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만화를 좋아했던 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장소다. 불과 며칠 전까지 서점을 찾았던 차우진 대중음악 평론가도 휴업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1999년 한양문고(당시 이름)를 처음 방문한 후 지금까지 2주에 한 번씩 들르는 곳이었다. 예전에는 신촌·홍대에 오면 산책 코스처럼 오늘의책(사회과학서점), 향음악사, 숨어있는책(헌책방), 한양툰크, 홍대놀이터 등을 따라 걸으면서 책과 음반을 샀다. 지금까지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은 한양툰크가 유일했다. 사장과 소소하게 나누는 대화도 좋았고 매장 내 배경음악이 어떤 애니메이션의 테마곡인지 맞히는 것도 즐겼다. 그때 이후 다른 곳에서는 만화책을 사본 적이 없다.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거기 있어서 한 번도 없어진다는 생각을 못했다. 만화를 보는 게 일상인 내겐 추억의 공간이 아니라 현재형의 공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진격의 거인〉이 거기서 산 마지막 책이 되었다.

손님에서 시작해 거래처로 인연을 이어온 김문영 이숲 출판사 편집장도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반품 요청을 겸한 인사 전화를 받고 알았다. 그에게 한양툰크는 ‘다정한’ 거래처였다. 주문도 전산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글씨로 쓴 뒤 사진을 찍어 문자로 보내주었다. 정이 느껴지는 방식이었다. 꼬박꼬박 현매로 거래를 했고 병원에 입원해 하루 이틀 송금이 늦어지는 것도 미안해했다. 김 편집장은 “한양툰크는 만화 덕후들의 성지 같은 느낌이 있다. 주변에서도 가슴 아파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주로 30대 후반의 나잇대다. 단순히 책을 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게 없어짐으로 인해 젊은 날을 도둑맞은 듯한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휴업 소식이 많은 이들에게 닿았다.

ⓒ윤성희한양툰크는 1997년 한양문고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아래는 한양툰크 외관.

공부하듯 만화에 파고들어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정리하는데 소식을 들은 단골들이 문을 두드렸다. 마지막에라도 몇 권 사야겠다고 온 사람들이었다. 김 대표가 말했다. “평소에 와서 사지 인간들아. 문 닫는다고 하니까 사냐?” 농담과 진담이 섞인 말이었다. 8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숨 돌린 그를 홍대 앞 만화카페 ‘한잔의 룰루랄라’에서 만났다. 한양툰크와 지근거리였다. 김 대표는 “이제야 못 만났던 단골, 장사하며 신세졌던 사장, 작가 분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며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좋은 시절’을 회상할 때는 환하게 웃다가도 최근의 대목에선 금세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한양툰크는 1997년 한양문고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이듬해 부도가 났고 두 번째 대표가 2000년 3월까지 운영하다 또다시 사정이 어려워졌다. 당시 금융업에 종사하던 김기성 대표가 한양문고에 개인적으로 돈을 투자했다. 투자금은 점점 불어났고, 어쩌다 보니 채권단 대표까지 되었다. 결국 김기성 대표가 빚과 함께 한양문고도 떠안게 되었고, 인수 이후 한양툰크로 이름을 바꿨다. 툰크는 만화(toon)와 책(book)을 합친 말이었다. 초기에는 아내 조경자씨가 운영했다. 10개월 정도 지나서 보니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제대로 하면 ‘승산 있는 싸움’이라는 생각에 김 대표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만화를 몰라 처음엔 고생을 많이 했다. 만화작가도, 만화책 제목도 낯설었다. 공부하듯 만화에 파고들었다. 일본의 만화 사이트를 뒤져가며 신간을 챙겼다. 3년이 지나자 만화 시장과 그 안의 유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감이 왔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열흘 쉬고 일했다. 설날에만 문을 닫았다. 워낙 떠맡은 빚이 많아 그렇기도 했지만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업적으로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과거엔 명절 전후 일주일이 ‘대박’이었다. “지금 아쉬워하고 서운해하는 독자들이 그때 다 학생이었다. 세뱃돈 모은 걸 가져와 평소 사고 싶었던 만화책을 10만원, 20만원어치씩 사가는 거다.” 하루 닫는 것도 아쉬웠다. ‘왔는데 가게 문이 닫혀 있으면 손님이 슬퍼하지 않을까’ 사명감과 의무감이 생겨 스스로 몰입했다. 유명한 PD와 작가, 감독들도 다녀갔다. 뮤지션 김윤아·김형규 부부도 단골로 유명하다. 홍대를 오가는 사람들에겐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윤성희한양툰크의 온라인 서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위는 매장을 정리하는 김기성 대표.

월 매출이 2억3000만원까지 가던 시절도 있었다. 직원이 많을 때는 매장과 온라인 서점을 합해 9명이었다. IMF 때 도서대여점이 많이 생겼다. 김 대표 부부가 만화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그 숫자가 하한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전시간대 대여점에서 책 사러 오는 사람이 10~15명 정도는 되었다. 홍대 앞 미술학원이 밤 10시에 끝나면, 집에 가던 학생들이 들러 만화책을 한두 권씩 샀다. 영업시간을 밤 10시30분까지 늘렸다.

김 대표 본인도 서점을 운영하며 만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만화를 읽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똑똑한 사람들이구나’ 깨닫게 되었다. 의료 만화, 미술 만화, 음식 만화에는 해박한 지식이 필요했다. “사실 검증도 필요하고 작가의 역량이 총투입되어 한 편의 만화가 탄생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술작품과 같았다. 내가 너무 만화를 몰랐고 만화 읽는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했구나 깨달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찾던 단골은 성인이 된 뒤에도 찾아왔다. 중학교 때부터 들르던 단골 중 김 대표가 ‘돌팔이’라고 부르는 의사가 있다. 신간이 안 나와 있으면 왜 안 나왔냐고 짜증을 내 꿀밤을 먹이던 사이였다. 얼굴이 지저분해 ‘애니멀’이라고 부르던 청년은 알고 보니 회계사 준비생이었다. 공부하다 쉬고 싶을 때 들르는 거였다. 단골들이 좋은 소식을 전할 때마다 자식들이 잘된 것처럼 좋았다. 지방에서 아직도 핸드폰으로 만화를 주문하는 ‘애니멀’은 아마 휴업 소식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2004년 만화서점 최초로 일본 작가를 초청해 사인전을 열기도 했다. 〈Kiss〉의 작가 마쓰모토 토모가 오기로 한 날, 사인전이 있던 지하에서 시작된 줄이 지하철 출구까지 이어져 경찰이 올 정도였다. 원수연, 형민우 등 국내 작가들의 사인전도 열었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을 열어 독자들이 각자의 책을 사고팔 수도 있었다. 한때 지하 매장에는 원서와 절판본 코너가 있었다. 처음으로 만화를 출판하려는 출판사 대표들이 한양툰크를 찾아왔다. 시장에서 먹힐지, 반응이 어떨지 상담을 해왔다. 김 대표는 만화계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장사꾼이지만 한국 만화계에서 유통을 책임지면서 독자에게 좋은 만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명감과 긍지가 있었다. 그게 지난 3년 반 동안의 적자를 버틸 수 있던 원천이었던 것 같다.”

만화시장과 홍대 앞의 변화는 한양툰크의 풍경도 달라지게 만들었다. 입시제도가 바뀌며 홍대 미대 입시에서 실기가 사라졌다. 미술학원이 줄자 손님도 줄었다. 홍대 근처 작업실에서 만화를 그리던 만화가들도 흩어졌다. 웹툰이 활성화되고 종이 만화가 줄었다. 만화도 펜이 아니라 태블릿으로 그렸고 더 이상 만화책을 보며 습작 연습을 하지 않게 되었다. 디자인 서적, 만화 화보를 다루는 시장이 먼저 어려워졌다. 디자인·애니메이션 전문 영진서점도 지난해 오프라인 매장을 접었다.

3년 반 전부터 본격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홍대 인근의 임차료가 치솟았다. 건물주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머물고 있어 미안함이 있었다. 1층 매장에서 수익성 있는 사업을 하고 한양툰크를 지하매장에서 유지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규모가 줄더라도 한양툰크의 명맥은 유지하고 싶었다. 타협이 잘 안 되었다. 총판 기능을 갖고 있는 한양툰크로서는 도서정가제도 타격이었다. 총판이라 정가에서 20% 할인해 판매하는 게 가능했는데 도서정가제 이후 인터넷 서점과 차이가 없어졌다. 마음의 준비를 한 지는 오래다. “출판 만화 시장도 줄고 오프라인 서점이 죽어가는 처지에서 제 욕심과 아내의 생각을 합쳐 어떻게든 끌고 간 게 3년 반이었다.” 더군다나 함께 꾸려가던 아내가 아팠다. 믿고 의지하던 파트너가 가게에 없으니 그도 지쳐갔다.

폐업 아닌 ‘일단 휴업’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부터 나빠졌다. 과거엔 지방에서도 손님이 왔다. 방학 때 부러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도 있었고 제자들을 데려온 교수도 있었다. 손님 맞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있었다. 몇 년 새 홍대는 ‘관광특구’로 바뀌었다. ‘이런 데가 다 있네’ 하는 마음으로 스쳐 지나는 손님이 많아졌다. 자신감도 없어지고 위축되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인사하며 책을 권하던 김 대표도 어느 순간부터 ‘볼 테면 보든가’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추구했던 게 아닌데 도대체 뭐가 날 이렇게 만들었나’ 자괴감도 들었다.

한양툰크의 역사는 ‘홍대 앞’과 출판 만화의 역사를 함께 담고 있다. 김 대표는 그동안 고객들에게 감사하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분들이 있어서 이 자리까지 왔고 고맙게 생각한다. 집사람과 퇴근할 때는 덕분에 하루 장사를 잘 하고 들어가는구나 생각했고 출근할 때는 밝은 모습으로 맞아줘야지 생각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반성과 후회가 크다.” 열심히는 달려왔는데 ‘창조적으로’ 했는지 의문이라는 회한을 남기기도 했다.

20여 년 매일 출근하던 매장을 정리하고 난 뒤 김 대표는 일어나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공황장애에 빗대 그 마음을 표현했다. 요즘엔 집 다락방에 올라가 매장에서 습관처럼 틀던 음악을 켠다. 서점에서 울리던 인디 음악과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이젠 그의 집을 메우고 있다. 한양툰크의 온라인 서점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그는 오프라인 매장도 언젠가 다시 열 거라는 계획을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한양툰크가 있던 자리를 지났다. 텅 빈 가게 앞쪽 유리에는 아직도 신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한양툰크. 폐업이 아니라, ‘일단 휴업’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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