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과제에서 무급 노동까지, IT 업계 채용의 그늘

  • 조경숙 (테크-페미 활동가)
  • 2022.05.10

[있습니다, 씁니다] 파격적 연봉과 복지정책으로 IT 업계의 채용은 늘 화제가 되지만, 채용 과정에서 ‘무급 노동’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중 하나가 ‘사전 과제’다.

‘개발자 몸값’이 치솟는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특히 삼성·LG 같은 대기업들이 일명 ‘네카라쿠배당토직(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당근마켓·토스·직방)’이라 불리는 IT 기업들에 인재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그 우려대로 네이버는 ‘월간 영입’이라는 제목으로 매월 기술 직군의 경력직 사원을 채용한다. 배달의민족 앱을 개발한 회사 ‘우아한형제들’은 채용 연계형 교육 프로그램 ‘우아한 테크캠프’를 운영 중이다. 기업들은 저마다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복지정책·스톡옵션·유연근무 등 혜택을 제시한다. IT 업계가 성장세를 띠는 만큼 개발자 외에도 디자이너, 기획자, 프로젝트 매니저(PM) 등 다양한 직군의 인재 수혈이 절실해 채용 공고가 수시로 게재된다.

파격적 연봉과 복지정책으로 IT 업계의 채용은 늘 화제가 되지만, 채용 과정에서 ‘무급 노동’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바로 ‘사전 과제’를 말한다. 사전 과제는 서류 전형에 합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지된다. 직군마다 사전 과제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3~5일 정도 걸리는 일감이 주어진다. 기획 직군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채용 지원하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서비스의 개선안을 요구한다. 간단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화면 단위로 세세하게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PC 버전과 모바일 버전 모두의 화면 기획안을 상세하게 요구한다.

디자인 직군의 사전 과제도 이와 유사하다. 여러 회사에서 디자인 직군의 구직자에게 실제 운영하는 서비스의 디자인 개편 시안을 사전 과제로 요구한다. 지금 이미 운영하고 있는 웹사이트의 디자인 개선점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디자인 시안으로 도출해달라는 요구다. 때에 따라 시안의 콘셉트나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도 한다. 이런 사전 과제 방식은 정말로 기업이 구직자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채용을 핑계 삼아 새로운 시각이 담긴 시안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함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구직자 처지에서 이러한 사전 과제가 부당하게 여겨지더라도 문제를 제기할 도리가 없다. 취업을 희망한다면 이 과정을 응당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개발 직군의 사전 과제는 그런 점에서 기획자나 디자이너보다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일반적으로 개발 직군의 사전 과제는 회사의 실제 서비스와 무관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주로 특정 개발 언어를 사용해 간단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거나 몇 가지 기능이 구현된 웹사이트를 만들라는 것 등이다. 이런 과제들은 회사에 따라 짧으면 1~2일, 길면 3~5일 사이에 완수해야 한다. 아무리 간단한 과제라 하더라도, 현재 회사에 근무하고 있거나 다른 업무가 있다면 퇴근 이후의 시간을 확보해 사전 과제 개발에 쏟아야 한다. 그런 데다 개발자의 경우에도 자사 솔루션을 개발 직군의 사전 과제로 활용한 사례가 있다. 자사의 솔루션을 설치하고 이를 기반으로 특정 기능을 개발하도록 해 사실상 구직자를 자사 솔루션의 테스터로 ‘사용’한 셈이다.

자사 상품권으로 과제비 주는 곳도

IT 업계 구직자가 거쳐야 하는 채용 프로세스는 매우 길고,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구직자의 노동력 역시 상당하다. 가치 있는 인재를 뽑기 위해서라고만 보기에는 다소 과한 처사다. 합격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시간을 쏟아부었는데도 불합격한다면 그야말로 시간 낭비가 따로 없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제출한 사전 과제에 대해 피드백 하나 돌아오지 않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면접 때 사전 과제를 브리핑하고 면접관의 피드백을 덧붙이는 과정이 있지만, 회사에 따라 이 과정이 생략되기도 한다. 면접관 처지에서야 그 많은 과제를 언제 하나하나 다 보겠냐마는, 누구도 안 볼 과제라면 애초에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사전 과제, 코딩 테스트 등 구직자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날로 커지자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서 일부 사용자들이 합심하여 자체적으로 ‘IT 직군 과제비/면접비 리스트’를 만들었다. 구직자들이 기업 채용 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내용을 항목에 따라 기록한 문서다. 과제나 실기 테스트가 있는지와 과제 기간, 그리고 보상 내용이 이 문서에 구체적으로 적시됐다. 기록된 사례에 따르면, A 회사는 사전 과제를 제시한 후 구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직장 시급에 맞추어 실제 과제 투여 시간에 따라 과제비를 계산해 제공했다. 연봉 대비 투입 시간에 따라 과제비를 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곳은 극히 드물고, 과제비 혹은 면접비가 없는 기업이 허다하다. 사람들이 손꼽는 대형 IT 기업 가운데 과제비를 제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나마 주는 곳은 자사 상품권으로 제공했다.

출신 학교와 나이, 성별 등이 참작되던 종전의 채용시장에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된 이후, 채용 문화는 능력주의로 급격히 선회했다. 사전 과제, 코딩 테스트, PPT 발표가 그 일환이다. 2020년에는 KB국민은행에서 신규 행원을 채용하면서 사전 과제, PPT 발표, 교육 이수 등을 내걸어 ‘채용 갑질’ 사례로 지탄받은 바 있다. 채용 과정과 채용하는 분야 사이의 관련성이 모호하기에 더 큰 비난을 샀다. 사전 과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나아가 우리나라 노동문화의 현주소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채용 공고를 게시한 회사조차 자기 조직에 어떤 인재가 필요한지 잘 알지 못하며, 그로 인해 구직자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형태로 신설된 채용 과정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꾸준히 이슈가 되고 있는 AI(인공지능) 면접도 마찬가지다. 면접에 인공지능이 활용된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AI 면접이 도입되는 취지와 맥락이 모호한 채 오로지 새로운 수단으로써 차용되어 채용 과정이 신설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조직에서 추구하는 일의 방향과 가치가 모호할수록 채용 과정은 길어진다. 이때 고통받는 이는 결국 구직자들이다.

2021년 8월 발표된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평균 1908시간으로 최상위권이었다. 오래 일하는 반면 노동 생산성은 하위권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얼마나 논의되고 있을까? 일을 잘한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동료와 일하기를 원하는지, 어떻게 일하는 것이 좋은지…. 자기 계발을 위해 공유되는 정보는 많지만, 정작 조직 안에서 이런 논의가 정식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 회사는 어떤 일을 하며, 어떤 능력이 필요한가? 채용 과정은 이 질문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거울과도 같다. 채용 과정을 보면 회사를 알 수 있다는 말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채용 과정을 보면 그 회사가 일을, 그리고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