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만나면 묻곤 한다. ‘학생들의 읽기가 어떤 것 같으냐.’ 읽기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읽는 방식이 달라지고, 읽고 파악하는 것이 달라진 듯한 양태를 오랫동안 관찰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책을 빨리 읽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건성으로 읽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물어보면 신기할 정도로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전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도 많다. 반면 맥락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물어보면 당황하곤 한다. 하나하나는 잘 기억하는데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인 엮어내는 것은 서투른 편이 많다.
 
“학생들을 보면 한 페이지를 글들의 연속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 같아요.”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런 말이 된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도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학생들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읽는 것’과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세대 갈등’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국의 80·90 세대와 그 이후 세대 사이의 대화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이 문제를 종종 겪으며 처음에는 화술과 대화가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그 원인이 더 심층부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진리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읽기’와 ‘보기’는 진리를 구성하는 전혀 다른 방식이 아닐까.

 

ⓒ이우일 그림
솔직히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해 설명하기에는 공부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다만 대체적으로 몇 가지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찾았을 뿐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에 집중해서 요즘 공부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책이 〈다시, 책으로〉이다. 인지신경학자가 뇌과학의 성과를 기반으로 쓴 책이라 그 이론의 정당성과 타당성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다만 저자의 문제 제기가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나눈 ‘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떠올리게 한 것은, 읽기는 시간 ‘예술’이라는 점이다. 책을 읽는 것은 시간이 드는 일이다. 아무리 짧은 소설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읽을 수는 없다. 책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그래서 시작점의 첫 글자부터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글자까지 선형적으로 눈을 굴린다.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하소설을 읽을 때는 저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이 살짝 나오는 법이다.
 
읽기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두 가지 작업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먼저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이미 읽은 것을 끊임없이 소환해 지금 읽는 것에 종합한다. 지금 읽는 것은 앞에 읽은 것에 기반해 풍부한 의미가 더해진다. 가끔은 복선과 같이 왜 이전에 저 말이 나왔는지를 깨달으며 감탄하기도 한다. 읽기는 과거를 끌고 가며 되새기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에 더해 책을 읽을 때는 앞을 예측한다. 과거를 종합하면서 그 종합한 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예측하고 추론한다. 그 예측이 맞으면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틀리면 작가의 상상력이나 이야기 전개에 감탄하거나 실망하게 된다. 따라서 책을 읽는 것은 현재적 행위이지만 이 행위에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읽기는 시간 ‘행위’이다.
 
읽기와 보기, 파악과 포착, 맥락과 팩트 사이의 갈등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엮이면서 우리는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나는 읽기의 주된 목적은 이런 ‘파악’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파악은 맥락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한 부분 한 부분, 한 사실 한 사실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 그것들이 엮일 때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것, 그 ‘엮임’이 맥락이고, 그 맥락을 알게 되는 것을 ‘파악’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너무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읽기는 시간이 드는 행위이며, 파악은 시간을 들여 연속적으로 구성할 때만 가능하다. 읽기와 파악의 핵심은 흐름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읽고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흘러간 것을 다시 지금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눈만 글자들을 따라 흘러가면 화들짝 놀라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곤 한다. 흐름을 놓치는 순간 연속성이 깨지면서 파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책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는 것 같다. 사실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가 ‘읽기의 자식’인지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읽지 않고 ‘보는’ 사람들의 목적은 파악이 아니라 ‘포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체의 진실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한 장면, 한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 말이다.
 
파악이 시간을 연속화한다면 포착은 한 단면을 잘라낸다. 무엇보다 진실은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포착은 압축적인 동시에 순간적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이 ‘한 장면’을 예리하게 도려내야 한다. 그 한 장면이 전체를 말해준다. 진실을 드러내는 데서, 그 한 장면이 전체의 맥락을 대체한다(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인터넷 ‘짤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종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짤방’에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있다. 저 장면을 도대체 어떻게 포착했는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국의 세대 갈등, 특히 80·90 세대와 그 이후 세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진리에 대한 전혀 다른 두 접근 방식인 이 읽기와 보기, 파악과 포착, 맥락과 팩트 사이의 갈등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세대 간에 분쟁이 벌어져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 보면 80·90 세대들은 끊임없이 “맥락이 그게 아니잖아”라는 말을 반복한다. 반면 그 이후 세대들은 선배들이 말하는 그 ‘맥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팩트’라는 면에서 허술한지를 드러내는 ‘장면’을 제시하면서 논박한다.
 
80·90들이 보기에 젊은 세대는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는 듯 보인다. 젊은 세대들이 보기에 80·90들은 ‘팩트’를 무시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에게 맥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갖다 붙이기식 궤변, 위선으로 보일 때가 많다. 80·90들이 보기에 그 후배들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깊이 읽기의 결과인) 공감능력이 현격히 떨어지고, 젊은 세대들이 보기에 80·90들은 엄밀하지 않고 인상 비평이나 하며 ‘감’으로 처리하는 너무 날로 먹는 ‘꼰대’다.
 
그렇다 보니 이 둘의 이야기는 만날 접점이 없다. 논쟁은 곧 감정싸움으로 흐르게 된다. 그 이유의 심층부에는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진리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방식 혹은 방법론의 근원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서로가 보기에 각자의 말은 “저게 진리라니!”라는 용납할 수 없는 혐오감과 적대감을 부추긴다. 진리의 문제는 여전히 타당성과 정당성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세대 갈등이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을 넘어 ‘진리관’의 문제라면 무엇이 가능할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을 넘어 필요할까? 뻔한 이야기지만 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나를 비롯한 ‘읽기의 자식’들이 후배 세대들을 이해하기 전에 ‘읽기’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말 우리가 ‘읽기의 자식’인지를 철저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또한 이미 안 읽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의 영어 원제는 ‘독자, 집으로 돌아오라’다.(나는 저들을 다시 읽기로 초대하기보다 우리가 도태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무래도 미래는 저들의 것이니까.)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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