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직전에 출판된 로버트 D. 퍼트넘의 〈우리 아이들〉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교육과 양육의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공공정책 분야 교수인 저자는 1950년대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빈부의 양극화가 어떤 양상으로 교육과 양육에 반영되어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파괴하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드러낸다.

단적으로 말해 195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사회적 혼합’이 존재했다. 그때도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은 부유했지만 두 계급이 완전히 분리되어 살지 않았다. 그것의 가장 확실한 보증은 학교였다. 학교에는 가난한 학생과 부유한 학생이 섞여 있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가난한 학생들이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우일


책에 나오는 ‘딘’이라는 노동자계급 출신 백인이 대표적이다. “미국 가정의 80%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90%는 TV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에 그의 집에는 둘 다 없었다. 교회를 갈 때 이웃 사람들의 차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딘은 자신이 대학에 들어가 경제학 수업을 들을 때까지 가난한 줄 몰랐다고 회상한다. 학교 친구들 중 그가 가난한 노동자계급 출신임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가난한 학생들의 진로 선택을 돕는 ‘지역사회’도 살아 있었다. 딘의 가족은 그를 대학에 보낼 능력이 없었다. 그의 역량에 주목한 이는 목사였다. 목사는 부모 대신 딘의 대학 입학을 알아보고 재정 지원을 받도록 도움을 주었다. 신학교에 간 딘이 대학을 그만두고 진로를 바꿀까 고민할 때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도 이웃의 기대와 격려였다.

부유한 쪽 역시 마찬가지다. 퍼트넘은 이것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1950년대에도 빈부 격차는 있었고 그것은 교육에도 반영되었다. 가난한 집 부모들은 자식 교육에 대한 포부가 상대적으로 작고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딘의 경우처럼 그런 부족함은 지역사회에 의해 채워졌다. 학교 교사, 목사, 이웃 어른, 노조, 그리고 로터리클럽 같은 단체들이 정보에서부터 장학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받쳐주었다.

21세기의 미국은 아주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퍼트넘의 고향이자 이 책의 주 무대인 오하이오주 포트클린턴이 대표적이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노동자계급은 몰락했다. 제조업 고용 비율은 급락하고 지역의 실질임금 역시 추락했다. 반면 이 지역의 호수와 그 주변 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새로운 상층이 유입되었고, 이들은 해안선을 따라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형성했다. 가난한 지역과 부유한 지역이 확실히 구분되었으며 거의 완전히 갈라졌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감각 역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내 아이’가 들어섰다. 1950년대에 부모의 경제력은 교문 앞에서 멈추는 경향이 있었다. 이 시대에는 부유한 가정의 자녀가 학교에 갈 때 “부모도 같이 간다”. 나는 이보다 더 간명하게 공공적 공간으로서 학교의 붕괴를 표현하는 말을 본 적이 없다.

교문은 더 이상 아이들이 가족과 ‘떨어지고’ 자신들만의 사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다. 부모 역시 학교 일을 학교와 자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수업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 사무실 직원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이다.

조직으로서의 학교와 장소로서의 학교

학교 간의 격차 역시 벌어진다. 계급에 따라 거주지가 확실히 분리됨에 따라 가난한 지역 학교와 부유한 지역 학교 간의 재정적 격차가 커졌다. 사립학교뿐만이 아니다. 공립이라고 다르지 않다.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의 풍요로움을 학교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부모가 학교에 돈을 기부하고 그 돈은 학생들이 추가로 학업부터 과외 활동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이 학교들은 ‘공립 사립’ 학교라고 부른다.

그 결과 영향을 받는 것은 학업 성취만이 아니다. 부유한 지역에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협상하고 협동하는 능력, 담력과 리더십 등의 소프트 기술과 품성까지 더 뛰어난 경향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과외 활동은 “모든 계층의 아이들에게” 소프트 스킬과 품성을 갖게 하기 위해 “진보적인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그 교육의 효과는 체계적인 과외 활동을 할 수 있는 부유한 학교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퍼트넘은 학교를 조직과 장소로 구분해 설명한다. 학교는 조직이다. 조직으로서의 학교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동등한 생애 기회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학교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주하는 장소가 계급에 따라 확실히 분리되면서 장소로서의 학교는 조직의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계급 격차를 확대하는 구실을 한다. 과거 학교가 교문 밖과 단절되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연결되어 학교 바깥의 장소가 지닌 혜택과 문제가 고스란히 반영된다.

무엇보다 부유한 지역에서 거주하며 부유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관계의 안정성과 관계에 대한 신뢰가 높다. 이들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해 “이곳 사람들은 친절하고 믿을 만해요. 안전한 지역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이런 지역에는 소위 ‘약한 유대관계’라고 말하는, 다양한 사회 분야에 걸친 관계망이 발달해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부모의 대학이나 대학원 친구, 교회와 지역단체의 청소년 담당자들, 그리고 전문적인 개인교사 등 “어른들과 또래의 넓은 관계망”이 작동한다.

부모와 이웃에 걸쳐 있는 안정적이고 호의적인 환경에서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고 성장한다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가능해진다. “전 큰돈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질 수 있고요. 저는 소방관 일을 하면서 상당한 돈도 벌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멋진 삶이잖아요.”

반면 가난한 쪽의 사회적 관계망은 점차 파괴되고 있다. 안정적이고 호의적인 관계망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관계망’에서 “파산 가정의 암울한 잔해 한가운데”에서 살아간다. 〈힐빌리의 노래〉에서도 본 것처럼 한때 “서로 도움을 주며 강한 사회관계망으로 유지되었던” 가난한 이들의 공동체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지”가 되어가고 있다. 한쪽에는 이웃에 대한 신뢰가, 다른 한쪽에는 이웃의 빈곤이 있다.

퍼트넘은 이런 사회적 관계망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가장 파국적이고 비극적인 것으로 분별력 격차에 주목한다. 사람에서부터 사건, 자신의 생애와 그 생애에 주어진 한계를 이해하고 기회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필요한 분별력의 계급적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분별력이 없으니 자신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고, 어떤 절차와 제도를 활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혼란과 당혹스러움’이다. 부유한 이들이 똑 부러지게 자신의 것을 챙기고 ‘현명’하게 처신할 때, 가난한 이들은 허둥대기만 하고 대책 없이 무모한 일을 한다.

결과는 무엇일까? 민주주의의 파괴다. 퍼트넘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사회로부터 유리되고 사회적 제도로부터 절연된 생기 없고 원자화된 대중은 아마도 정상적인 상황 아래서는 정치적 안정에 아주 작은 위협만 부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과 같이 심각한 경제적인 문제가 벌어진다면 이 “생기 없는 대중이 갑자기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반민주적 선동” 운동에 나서게 된다. 그 일은 정확하게 이 책을 출판하고 난 다음에 미국에서 벌어졌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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