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은 몸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서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으레 나오는 ‘오지랖’은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결혼을 왜 안 하느냐?” “결혼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아이가 없느냐?” “외동은 외로우니 둘째를 가져라” 따위 말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상대방이 겪었을 고민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던지는 속 편한 소리에 일일이 대꾸하느니 얼른 대화를 끝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든다.
정부가 공식 SNS를 통해 공개한 ‘저출생 극복 프로젝트’ 광고를 보면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광고 내용은 대략 이렇다. 한 여성이 퇴근 후 어린이집으로 달려간다.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는 길, 아이는 동생과 함께 있는 또래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엄마, 나도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여성은 생각에 잠기고 “지금 당신은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지셨나요?”라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어지는 화면에서 여성은 한 부부에게 상담을 받고 기쁜 표정을 짓는다. 이어 “지상 최대의 고민에 빠진 당신을 위해 50명의 둘째 카운슬러가 나섰습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45초 남짓한 광고에서 아이를 하원시켜 집으로 데려오는 것도 여성, 두 아이를 데리고 길을 가는 이웃도 여성, 동생을 갖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여성, 상담을 받으러 간 것도 전부 여성이다. 남성은 언제 등장하는가? 오로지 마지막 상담 장면에서 조언자로 나설 때뿐이다.
이 광고는 둘째 출산을 망설이는 가정,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고민을 했으나 둘째 출산을 결정한 가정의 사연을 모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모를 통해 ‘둘째 카운슬러’로 선정된 부부 50쌍은 고민 사연을 상담해주는 인터뷰 영상을 촬영할 예정이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겠다는 프로젝트의 취지는 좋으나, 정작 이를 홍보하는 광고만 봐도 왜 둘째 낳기를 꺼리는지 알 수 있다.
광고 속 여성이 ‘왜 퇴근하자마자 어린이집으로 달려갔을까’부터 헤아릴 수 있다면 저출생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직장 내 보육시설이 없는 곳이 태반이고 그나마 있는 곳조차 대기자로 가득하다. 어린이집 운영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아이 때문에 야근이나 회식을 빠지게 되면 직장에서 눈치를 주는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육아 부담을 나눠야 할 ‘남편’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광고 내용처럼 아이가 동생을 원하니까 엄마가 마음을 고쳐먹고 조언 몇 마디를 듣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육아를 돕지 않는 남자를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저출생 관련 공익광고가 비판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보건복지부 ‘아기의 마음’ 편은 지하철 임산부석, 임신부 단축 근무 같은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데도 아기가 “오늘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내용으로 문제가 되었다.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것은 가장 값싸지만 가장 불확실한 해결책이다. 1999년 일본 후생성이 저출생 극복을 위한 공익광고에 “육아를 돕지 않는 남자를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라는 카피를 내걸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미 여성들은 사회를 향해 말해왔다. 아이를 더 낳으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있는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세상인지부터 자문하라고. “청년들이 가치관부터 바꿔야 한다(9월7일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 “대학교별 만남의 행사도 해보고 대학생 때 결혼하면 취업을 1순위로 추천(9월17일 전라북도 저출산 대책위원회 회의)” 같은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해법은 명절 오지랖만큼이나 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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