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말에 발행된 〈시사IN〉 제468호 커버스토리는 ‘기본소득’이다(판도라의 상자 ‘기본소득’). 커버스토리를 쓴 이종태 기자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열었다. “기본소득은 한마디로 사회로부터 ‘그냥 받는 돈(money for nothing)’이다. 심지어 부자까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준의 현금을 정기적으로 준다.” 여기에 2004년 창립된 ‘기본소득 지구네트워크(BIEN)’의 기본소득에 대한 정의를 덧붙여본다. ①가계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지급되고 ②다른 소득의 유무와 무관하게 지급되며 ③노동을 할 의지 및 현재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지급된다.

나라 안의 모든 시민권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일정 액수의 월급을 지급하자는 발상의 어렴풋한 형태는 꽤 오래전에 나왔다.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카탈루냐 사상가 후안 루이스 비베스, 〈상식〉의 저자 토머스 페인, 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화주의자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는 이 착상의 먼 선구자로 꼽힌다. 그들의 뒤를 이어 기본소득의 원형을 탐색한 토머스 스펜스·샤를 푸리에·허버트 스펜서·헨리 조지·버트런드 러셀 등도 주목할 만하지만, 선구자들 중의 선구자로 클리퍼드 H. 더글러스를 빠트릴 수 없다. 그가 1924년에 초간하고 1933년에 재판을 낸 〈사회신용-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역사비평사, 2016)는 이 분야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니엘 라벤토스의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책담, 2016)로 말문을 연다.

복지는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거나 수입이 없는 노동자·빈곤층·고령자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지만, 기본소득은 아무도 일을 하지 않게 만든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라벤토스는 복지제도 강화를 내세우며 기본소득 논의를 회피하려는 진영을 향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세계의 영광을 구현한 복지제도는 신자유주의를 준비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환상이 되었다고 반박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복지란 마치 ‘입헌군주제’와 같은 운명으로 입헌군주(=복지)는 허울일 뿐이며, 나라의 주인은 자본주의 기업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나 실업자나 모두 자본주의 기업의 노예이기는 마찬가지다.  

복지국가 정책은 신자유주의 신봉자인 우파뿐 아니라, 이 제도를 열렬히 지지했던 좌파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먼저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은 직업 재활 프로그램과 같은 국가의 과도한 통제와 복지 수급자라는 굴욕스러운 사회적 낙인을 감내해야 한다. 다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벌면 복지 급여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가 낮은 직업이나 시간제 일자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여분의 수입을 포기해야 한다. 게다가 국가가 내놓은 복잡한 복지 혜택은 그것이 꼭 필요한 당사자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의 수입 때문에 또 다른 가족의 기초생활수급자 대상 자격이 박탈되는 한국의 예가 그런 경우다.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다니엘 라벤토스 지음
이한수·이재명 옮김
책담 펴냄
기본소득으로 최저 생계비용을 확보한 노동자는 노동시장을 보다 유연하게 만듦으로써 노동자 자신을 보호한다. 기본소득을 받게 된 노동자는 소득 감소 때문에 계속할 수 없는 파업을 지속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고용주와의 협상력은 높아진다. 이런 장점은 노동자와 노동운동가 모두를 기본소득 지지자로 만들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클리퍼드 H. 더글러스는 기본소득에 대한 저항이 우파와 좌파를 가리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풀이한다.

왜 게으름은 부자에게만 허용되어야 하는가?

“이런 태도는 고용자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 상벌 이론은 노동계 지도자들이 반대하는 고용주들의 초석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의 초석이기도 하다. 당장 직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기가 확연히 어려워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실업자도 살 수 있는, 즉 고용되지 않고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대책을 도입하는 일이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켜서 이후에 고용에 부적합하도록 만든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고용주와 노동계 지도자들이 함께 신봉하는 상벌 이론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카 후서’ 3장 10절에서 했던 이 그럴듯한 말을 라벤토스가 반박한다. “부유한 사람이 상속받은 부로 일생 동안 숟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삶을 잠시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소득은 가장 부유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으며 생존하는 것이다.”

라벤토스가 “기본소득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재원 마련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라고 썼듯이, 기본소득의 난관은 돈이 아니다. 기본소득의 장애물은 농경시대에 생겨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 떡하니 쓰여 있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구호다. 노동하는 인간 존재론은 미래의 재앙이다. 기술의 발달은 세계의 소비증가율보다 훨씬 더 큰 증가율로 재화 및 서비스를 생산하며, 그 결과 고용은 감소하고 실업률은 늘게 된다. 클리퍼드 H. 더글러스는 기술의 발달을 무시한 채 “완전고용이라는 숭고한 도덕적 목적”에 매달리면, 국가는 실업을 구제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미리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게 될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무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스마트폰으로 구직 사이트를 검색한다. 왜 푸른 하늘 흰 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주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 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 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 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 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일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75억 인류의 노동이 될 수는 없을까? 애초에 기본소득은 빈곤과 실업에 대한 대응책으로 제시되었지만, 기본소득이 지닌 잠재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기본소득 도입으로 범죄율은 낮아지는 대신, 금전적 보수도 없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바치려는 자원봉사자는 늘어날 것이다.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는 지난번 선거 때 나온 경제민주화보다 더 획기적인, 기본소득이 주요 의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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