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과학자들의 보고서를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을 접했다. 물에 빠지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생애 마지막(이라고 여겨지는) 그 찰나의 순간,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 사람의 전 생애가 영화처럼 펼쳐지곤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죽음 소식을 듣고 가족이 보일 반응부터 시작해 살면서 잘하고 못한 일, 더 나아가 어릴 때 좋아했던 장난까지 온갖 일이 떠올랐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 생애 주요 기억이 한순간 펼쳐지는 이런 현상을 이들은 ‘파노라마 기억’이라고 부른다. 

요즘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들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에리카 김씨가 갑자기 돌아오면서부터 확실히 더 그렇게 느껴진다. 

최근 상장이 폐지된 한 코스닥 기업의 사장이 자살하면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현직 대통령의 조카사위가 연루된 회사다. 이 회사 얘기가 세간에 오르내리다보니 (주)다스며 정권 실세 이름 몇몇이 다시 거명된다. 다스는 다시 도곡동 땅, BBK를 상기시키고, 이것들이 또 에리카 김-김경준-한상률로 이어지는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재생시킨다.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특정인과 특정 사안이 계속 변주되며 등장한다는 것은 권력에 이상 신호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경험칙대로라면 정권 후반부로 갈수록 등장인물은 더 늘어난다. MB 정부 4년차를 맞아 이 정권 들어 ‘잘나간’ 인사들의 현황을 추적하려고 구성한 특별취재팀이 도달한 결론은 하나. 그래도 이들이 아직까지는 여전히 강고한 동맹을 맺고 있으며 그 핵심에 ‘이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동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이미 한상률 수사를 둘러싸고 검찰 내부에서 수상쩍은 기류가 포착된다. 정권 교체기가 되면 늘 ‘지는 해’로부터 누구보다 빠르게 등을 돌려온 그들이다. 사람과 집단을 연결하는 고리 중에서 가장 강한 듯 약한 것이 돈이라는 점도 관전 포인트다. 돈으로 맺어진 관계는 돈이 돌지 않는 순간 무너진다고, 세상 살면서 배워왔다.

중요한 것은 정권이 끝난다고 이들의 동맹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PK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굶었지만, 우리는 15년을 굶었다”라고 벼르는 TK 일각을 비롯해, 새 이권 동맹을 꿈꾸는 자들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공동체의 미래보다 사익이 먼저인 이들에게 또다시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 않다면 철 바뀔 때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챙기듯, 이제는 ‘머스트 리멤버 리스트’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교훈이 그렇듯, 잊어버리면 지는 거다.

기자명 김은남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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