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도’ 시절 분위기 물씬 풍기는 PK
  • 부산·천관율 기자
  • 호수 186
  • 승인 2011.04.1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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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권 신공항이 백지화됐다. ‘부산 가덕도’를 주장했던 부산도, ‘경남 밀양’을 원했던 대구도 분노를 터뜨렸다. 총선을 불과 1년 앞둔 지금, 철옹성 같던 영남의 민심과 정치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PK가 흔들린다. 이미 몇몇 지역은 한나라당 텃밭이라는 말을 하기 민망한 분위기가 됐다. 영남권의 눈과 귀가 온통 쏠렸던 동남권 신공항을 정부가 백지화하면서, PK(부산·경남)의 민심 이반이 나타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공항 문제는 PK 이반의 핵심 원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된 지각변동을 촉진하는 성격에 더 가깝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20년 만에 큰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은 지역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쉽게 들을 수 있다.

지난해 지방선거 때부터 조짐은 뚜렷했다. 부산에서 김정길 민주당 후보는 스스로 세웠던 목표보다도 높은 44.6%를 득표했고, 경남에서는 아예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를 이겨버렸다. 당시 언론은 ‘노풍’이나 ‘반MB 바람몰이’와 같은 손쉬운 분석을 내놓았지만, 이보다 훨씬 ‘거친 바람’이었던 2004년 탄핵 역풍 때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PK가 변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본 정치 지형의 지각변동은 과연 몇몇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원은 훨씬 더 깊었고 진도는 생각보다 컸다.

   
ⓒ뉴시스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무산을 선언하자,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규탄 시위를 열었다.
지역 절망감 ‘공항 열광’으로 뒤틀려 표출

부산과 대구를 둘러보고 나면, 이 두 도시에서 호황인 산업은 현수막 제작밖에 없는 것 같다는 난감한 느낌을 받게 된다. 요즘 두 도시는 신공항 유치 촉구 현수막으로 도배되어 남는 전신주와 가로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산업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 소비 도시 특유의 ‘내리막길에 들어선 초조함’은 택시를 타도, 자영업자를 만나도 쉽게 감지된다. 고도성장기 중공업 주도 성장전략의 과실을 한껏 누렸던 부산과 대구는, 자동차·패션·관광 등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 시도가 잇따라 별 재미를 못 보면서 점점 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공항은 그런 두 도시가 동시에 부여잡은 지푸라기였다. 공항을 유치해서 물류 기반만 닦으면 기업 입주가 늘고 침체 일로의 지역 경제가 극적으로 부활하리라는, 다소 과장된 기대가 두 도시 모두에서 이제는 집단적 열망이 되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신공항 백지화 발표 직전에 해당 지역 민심을 탐방했다. 정무수석실 관계자는 대구에 특히 주목했다. “‘우리가 제대로 된 공항이 없어서 LG LCD 공장이 경기도 파주로 가고, 삼성 바이오시밀러(신약 개발) 사업이 인천 송도로 갔다’는 피해의식이 대구에 팽배하다. 여론은 공항 유치를 지역 산업의 생존 문제로 본다. 정치권의 반발도 그래서 대구가 가장 심하다.” 언뜻 보면 공항 입지 문제는 부산과 경남 밀양이 부딪친 ‘PK 집안 싸움’ 같았지만, 정작 대구가 가장 절박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래서다.

   
ⓒ조우혜
허남식 부산시장(위)과 부산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신공항 무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공항을 두고 부산과 대구가 대립하는 구도는 우울한 역설이다. 아무리 늦춰 잡아도 1990년대 이후는 수도권 중심 성장의 시대로 볼 수 있고, 동남권 산업 벨트의 중심지였던 두 도시는 동반 하락의 길로 들어섰다. 지역 내 총생산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낮아졌고(오른쪽 <표> 참조), 인구 역시 비슷한 감소 추세를 보였다. 지역 거점 국립대학인 부산대와 경북대의 대입 위상이 동반 추락한 것은 이 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단적인 풍경이다.

부산이 정치적 활동 무대인 김영춘 민주당 최고위원은 “최소한 20년 전부터 핵심 지역 균열은 ‘영남 대 호남’ ‘TK 대 PK’에서 ‘수도권 대 지방’으로 재편됐다”라고 말했다. 영남 대 호남이니 경남 대 경북이니가 아니라, 수도권과의 경쟁이 지역 경제에서 핵심 의제가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동안 영남권에서 수도권 독점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두 번에 걸친 이른바 ‘호남 정권’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1997년 집권한 김대중 정권과 2002년 집권한 노무현 정권은 영남에서 ‘호남 정권’으로 인식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해 출신이고 PK 출신 인사를 중용했지만, 영남의 인식에 큰 변화를 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부산의 지역 정치권에서 2대째 뼈가 굵은 한 친한나라당 인사는 “그때는 정치하기 수월했지요. ‘호남 정권 때문에 우리가 몬 산다’ 한마디 하면 다 끝났는데 머”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언론도 가세했고, 심지어 조장했다. 김대중 정권 때인 2000년 9월9일자 <동아일보>는 지금까지도 지역감정 조장 보도의 ‘전설’로 회자되는 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싣는다. 기사 제목은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였다. 8면을 전부 차지한 관련 기사 제목은 ‘신음하는 영남 경제’였다.
‘호남 정권’은 2007년 대선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수도권 집중화는 이명박 정권 들어 더 가속화되었고 지방 경기는 반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등장한 ‘공항이 없어서 경제가 어렵다’라는 두 도시의 여론은, ‘호남 정권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라던 익숙한 설명의 기묘한 변종으로 읽힌다. 수도권 집중화로 오랜 기간 누적된 지역의 절망감이 공항이라는 계기를 만나서 뒤틀린 방식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2012년 ‘PK발 지진’ 오나

   
어떤 식으로 드러나든 간에, ‘영남 정권’의 탄생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좌절감이 영남에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핵심은 2012년이다. 신공항 문제를 계기로 다시 한번 확인된 심상찮은 민심이, 총선과 대선이 연이어 있는 내년에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가 문제다.
영·호남 유권자가 기존 정치인에게 무비판적 투표를 한다는 흔한 오해와 달리, 1당의 지배력이 강한 영·호남에서 정치 엘리트를 물갈이하려는 욕구는 오히려 수도권보다도 강하게 느껴진다. 현직 정치인에 대한 선호도를 묻는 ‘재지지율 조사’를 해봐도 부정적 응답이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시사IN> 제166호 기사 참조). 지역 엘리트의 권력 독점이 장기간 지속된 데 따른 격한 반작용이다. 문제는 정치적 대안 자체가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욕구가 실제 물갈이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남 대 호남’이나 ‘PK 대 TK’ 대신 ‘수도권 대 지방’이라는 실제 균열 선을 따라 2012년 선거 구도가 짜이기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많다.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호남이 한나라당을, TK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직 인정 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호남 유권자는 민주당 대신 민주노동당이나 무소속을, TK 유권자는 한나라당 대신 친박근혜 계열 군소 후보나 무소속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물갈이 욕구를 표현하려 했다.

이 점에서 PK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민주당 등 야권을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데 저항이 덜하다. 2012년 선거에서 정치 지형을 뒤흔들 진원지로 정치권의 많은 관찰자가 PK를 주목하는 이유다.
첫째, PK 중에서도 특히 부산은 ‘전통의 야도(野都)’였다. 1967년 제7대 총선부터 3당 합당 전인 1988년 13대 총선까지, 군부 정권 계열의 공화당·민정당은 부산에서 신민당·민주당 등 야당 경쟁자보다 많이 득표한 적이 없다(신군부 쿠데타 직후 야당이 무력화된 채 치러진 1981년 총선만 예외다). 지난 지방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김정길 전 장관은 부산 민심을 두고 “지금 부산에는 ‘3당 야합’ 이전 야도(野都) 시절 그 분위기가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12·13대 총선 때 부산에서 배지를 달았던 경력이 있는데, 그때 분위기가 연상될 만큼 ‘밭의 토양’이 바뀌었다는 평가다.

둘째, 부산에서 느껴지는 ‘반정부·반TK 정서’가 심상치 않다. 허남식 부산시장의 한 측근 인사는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건 대구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부산은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었는데, 먼저 대구에서 현수막을 걸고 대구시장이 정치 생명 운운하며 치고 나왔다. 그때부터 부산 지역 정치인도 ‘대구가 저카는데 너거는 머 하고 앉았노’ 소리를 듣게 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거다.” 또 다른 지역 정치권 인사는 PK에서 반정부 기류가 고조되어온 이유를 숨 가쁘게 요약했다. “올해 초 저축은행 영업 정지가 나올 때, 연달아 부산 쪽 은행이 철퇴를 맞았다. 그때 서민층 여론이 확 돌아섰다. 대통령의 기독교 색채가 너무 강한 것도 불교세가 강한 PK에서는 불만이다. 4대강 공사를 동지상고가 독점한다느니, 대구가 의료복합단지를 가져갔다느니 하는 소식이 나올 때마다 부산에서는 ‘TK 정권이지 영남 정권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족보를 따지자면, TK와의 경쟁 심리는 ‘우리가 남이가’ 정서보다 오히려 먼저 존재했다. 출판사 후마니타스 박상훈 대표(정치학 박사)는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PK와 TK를 ‘영남’으로 묶는 정치 의식은 없었다. 두 지역은 늘 권력을 겨루는 핵심 경쟁자였다. 3당 합당 이후의 정치적 동맹이 오히려 ‘막간극’에 가깝다. 그게 아니었으면 PK는 호남보다도 유력한 TK의 경쟁자 위치를 계속 가져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PK가 박근혜를 보는 법

그러니만큼 PK를 대표하는 대선 주자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반TK 정서라는 동전의 뒷면이다. 김영삼·노무현 두 대통령을 배출한 PK의 정서로 보면, 대권 주자급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경험이다. 이는 또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양가적 감정으로 나타난다. 대안이 없는 현실에서 일단 지지는 하지만, TK처럼 열광적이지 않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PK를 대표하는 거물 정치인을 갈구한다. 택시기사 김정규씨는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친박계 실세라 캅디다. 근데 텔레비전 보니까 박근혜 어디 행차할 때마다 옆에 딱 붙어가꼬 보디가드하고 있데? 실세 좋아한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놨더니 저게 뭔 꼬라지고 싶데예”라고 푸념했다. 본인들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야권 일각에서 ‘문재인 대망론’ ‘김두관 차출론’이 꾸준히 나오는 것 역시 ‘대표 선수’를 원하는 PK의 정서와 무관치 않다.

이 같은 변화 욕구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부산 출마를 준비하는 김영춘 최고위원은 “민주당이 호남당 이미지를 벗고, 이를테면 복지와 같은 새로운 가치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으로 나서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결국 박근혜로 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전 대표를 사실상 다른 정치 세력으로 간주하는 여론의 흐름을 경계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른바 ‘낙동강 벨트’(낙동강 인근의, 공장이 많아 외지인 비율이 높고 젊은 인구 비중이 높은 서부 부산 지역)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부산에서 18석 중 최소 5석 이상을 확보하리라 자신한다.

부산을 지역구로 둔 한 한나라당 의원은 “소선거구제에서는 51대49로 이기든 100대0으로 이기든 마찬가지다.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은 사실이고, 지역구마다 꽤 접전이 되겠지만 그래도 뒤집힐 일은 없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 의원도 “비례대표 투표라면 40%는 기본으로 주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 지역 정치권 인사는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힘들수록 PK에서는 지지층이 뭉쳐 선거 전망이 밝아진다. 탄핵 역풍이 불었던 지난 17대 총선이 그랬다. 내년 총선에서 수도권 전망이 원체 나쁘니 PK 선거는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라고 기대했다.

PK·TK·호남의 투표 행태를 ‘무비판적 지역주의 투표’로 치부해버리면 세 지역 모두에서 끓어오르는 강한 물갈이 욕구를 보지 못하는 셈이다. 지난 지방선거를 거치며 세 지역 중 PK에서 가장 먼저 큰 파열음이 난 것은 PK의 민주주의 수준이 가장 높기 때문이라기보다는(야당은 물론 여당의 PK 정치인마저도 은근히 이런 설명을 선호한다), 공히 존재하는 물갈이 욕구를 제대로 분출시킬 통로가 가장 먼저 열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리 보면 결국 남은 것은 정치권의 역할이다. 수도권 집중화가 빚어낸 침체 일로의 흐름을 바꾸고, ‘고인 물’ 지역 정치권에 제대로 된 경쟁을 부여할 세력이 누구인가라는 PK의 물음에, 어떤 정치 세력이 어떤 대답을 내놓는가에 따라 2012년 정치 지형의 재편은 ‘대지진’이 될 수도 ‘찻잔 속의 태풍’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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