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나라 안 망한다.”

지난 정권 끝머리에 유시민씨가 한 말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난 대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했다. 그로부터 4년 세월이 지났다. 과연,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 유시민씨도 옳았고 나도 옳았다. 물론 공영방송이 정권의 선전국이 되고, 전국의 멀쩡한 강들이 파헤쳐지고, 고위 공직을 특정 지역 출신의 ‘범법자들’이 장악하고,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서민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또 집권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대한민국이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망가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유시민씨는 근자에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다. 그는 한나라당이 한 번 더 집권하면 대한민국이 망하기라도 할 듯 “하늘이 두 쪽 나도 정권 교체하겠다” “2012년 이후에 정치는 없다”라며 애국심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나 ‘망한다’는 말이 은유가 아니라면, 한나라당이 한 번 더 집권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망할 리는 없다. 박근혜씨든 누구든, 차기 대통령을 한나라당이 배출한다고 해서 그가 나라를 팔아먹기야 하겠는가? 그게 아니더라도, 제5공화국 이전 시기로 되돌아가기야 하겠는가?

한나라당이 재집권한다면 차라리 ‘민주계’가…

그래도 걱정거리는 남는다. 나는 다음 정권을 한나라당이 이어가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그러나 박근혜씨가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은 두렵다. 현재 거론되는 잠재적 차기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박근혜씨에 대한 지지가 가장 크고 단단한 만큼, 이 두려움은 현실적이다.

나는 왜 ‘박근혜 대통령’이 두려운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박근혜씨가 집권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그의 부친 박정희의 파시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박근혜씨가 아버지와 같은 독재자가 되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독재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은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이 힘을 키웠다. 또 이것은 박근혜씨에게 무슨 연좌제를 적용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집권기에 저질러진 반(反)인도 범죄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면, 또 그 시절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고 갇히고 다친 이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다면,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씨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외려 보수층에 만연한 ‘박정희의 추억’을 제 정치적 자산의 큰 부분으로 삼았다.

박근혜씨는 박정희 시대의 상징이다. 다음 대선은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를 두고 벌어지는 역사 전쟁의 성격도 일부분 띨 수 있다. 이 전쟁에서 자유주의-진보 진영의 처지는 불리하다.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은 ‘박정희 향수’를 지니고 있는 늙은 세대만이 아니다. 박정희 시대를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 유권자들에게도, 박정희가 한국 민주주의의 압살자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의 상상력 속에, 박정희 시대 고문실에서 죽거나 몸을 망친 무고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들어설 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은 그 개연성이 제법 높다. 그럴 때, 황군(皇軍) 장교에서 출발해 남로당 군(軍) 조직책과 반란군 두목을 거쳐, 18년 독재자로 이어지는 삶을 통해 박정희가 저지른 숱한 범죄는 슬며시 잊힐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말 두렵다.

내년 대선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진보 정당들과 민주당이 힘을 모아 한나라당에서 정권을 되찾아오는 것이지만,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더라도 그 당 후보가 박근혜씨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할 거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 계보를 잇는 누군가(이른바 ‘민주계’)가 그 당 후보로 뽑혔으면 한다. 집권을 위한 정치적 변절, 재임 중의 정책 실패와 퇴임 뒤의 가벼운 언행으로 김영삼씨는 흔히 조롱의 과녁이 되어왔지만, 대한민국은 그에게 빚이 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최소한의 시민적 정치적 자유,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나 고문 철폐 같은 것은 그의 집권기에 우리가 쟁취한 것이다. 한나라당 안에 (기왕이면 영남 패권주의에 찌들지 않은) ‘민주파’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분발을 촉구한다.

기자명 고종석 (저널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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