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대재앙이 벌어질 때 사망자 숫자나 재산 피해 규모보다, 방송 화면 이미지가 더 큰 충격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 9·11 테러 때는 3021명이라는 희생자 수 못지않게 쌍둥이빌딩 붕괴 장면이 오래도록 세계인의 기억에 남았다. 이번 일본 동북부 쓰나미 참사는 3월11일 오후 NHK가 중계한 20분짜리 영상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쓰나미가 한 농촌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당시 떠 있던 헬기 카메라맨에 의해 생생히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쓰나미의 진면목이 그 영상 하나로 드러났다. 그날 일본 정부는 희생자 집계를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시청자는 이 화면을 통해 비극이 얼마나 끔찍하고 오래갈 것인지 짐작했다.
 

ⓒ시사IN 조남진
 

그 20분짜리 영상의 무대가 된 곳은 바로 일본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와카바야시 구 아라하마 해변이다. 이 해변 마을 옆에 헬기장이 있어서 이곳을 이륙한 헬기가 아라하마 마을 수몰 장면과 나토리강 범람, 센다이 공항 침수를 차례로 촬영했던 것이다. 아라하마 마을은 가장 피해가 큰 지역 중 하나다. 3월11일 밤에만 이곳에서 200~300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참사의 시작에 불과했다.

사고 직후 경찰은 아라하마 해변 3㎞ 앞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언제든지 쓰나미가 밀려올 수 있다”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기자가 현장을 찾은 3월16일에는 경찰이 “사이렌에 귀를 기울이라”는 당부와 함께 기자와 탈출 주민들의 진입을 허용했다. 쓰나미 이후 아라하마 마을 속으로 한국 기자가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출입 통제선을 넘어가니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호수가 아니었다. 논에 물이 찬 것이다. 물이 얼마나 깊이 차 있는지 시신을 수습하는 구조대원 중 몇몇은 잠수복을 입고 있었다. 한때 논이었던 그 호수 위로, 한때 지붕이었던 ‘꼭짓점’들이 삐죽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대한 ‘쓰레기 호수, 쓰레기 사막’으로 변한 마을

호수 가운데 난 길을 가로질러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 마을 주민 다이카쿠 도시히로 씨(56)를 만났다. 그는 사고가 났을 때 센다이 시내에 있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아내와 부모, 형, 조카 등 가족 다섯 명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혹시 가족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이미 반파되어 출입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장화를 신은 다이카쿠 씨는 웅덩이를 건너고 차고를 넘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NHK 화면쓰나미가 이 마을을 덮치는 모습은 NHK에 의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시사IN 조남진아라하마 마을은 거대한 호수로 변해 있었다. 구조대는 물속을 헤치며 시신을 수습했다.

마을 중심부에서는 한창 구조대가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구조대원은 발굴한 시신을 푸른색 방수포에 넣고 노란색 딱지를 붙였다. 딱지에는 ‘70세 남자’라는 인적 사항과 ‘南長 연못 속 물’이라는 발견 장소가 적혀 있었다. 정확한 주소를 복원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리가 파괴되어서 이곳이 어느 지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구급대원은 “나는 오후 팀이라서 1시부터 두 시간 정도 일했는데, 그동안 내가 찾은 시신이 다섯 구나 된다”라고 말했다. 구조 인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시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응급차가 와서 거리에 놓인 처참한 시신을 체육관으로 옮겨갔다.

해변 가까이 좀 더 다가가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마치 사막에 쓰레기를 골고루 뿌려놓은 듯 모래투성이 광장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구역은 쓰나미의 힘을 직접 받다보니 집은 물론 집이 있던 흔적까지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한때 빽빽했던 방풍림마저 남아 있는 것은 몇 그루 되지 않았다. 해변 모래와 마을 거리의 구분이 아예 사라졌다.

아라하마 해변은 센다이 지방의 유일한 해수욕장이었다. 아라하마 토박이 주민 사토 다카코 씨는 “아라하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이 맑아서 조개며 해초를 그냥 주워 먹었다. 가끔 해일이 오곤 했지만, 제방이 높고 방풍림도 빽빽해서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라고 말했다. 제방은 2~3m 정도였다. 이번 쓰나미를 막기에는 어림없었다.
 

ⓒAP Photo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애를 태웠다.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 시에서 모친의 시신을 확인한 여성이 오열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구조 인원은 어디를 가나 부족했다. 한국의 119구조대도 인근에서 구조 작업을 도왔다.

사고 당시 아라하마에는 주로 노인들이 남아 있었다. 젊은 세대는 센다이 시내로 일을 하러 나가 있었다. 쓰나미 당시 집에 차가 없던 가족은 화를 피하기 힘들었다. 마을 주변에 높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높은 곳은 소학교 건물이었는데, 후지와라 에미 씨(50)는 그곳에 피신했다가 자위대 헬기를 타고 온 군인의 품에 안겨 탈출할 수 있었다.

피 묻은 휴지 발견하고 웃던 주민

당시 헬기 영상을 보면 쓰나미를 피하려는 자동차들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물에 휩쓸려가는 안타까운 순간이 담겨 있다. 아라하마 주민 사치오 다케오 씨(55)는 그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냈다. “지진이 처음 있고 나서 쓰나미가 오기까지 시간이 30분가량 있었다. 쓰나미 경보가 울렸을 때 나는 마을 밖에 있었는데, 가족을 구하러 차를 몰고 마을로 돌아왔다. 나처럼 마을 밖에서 거꾸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간을 맞추지 못해 변을 당한 사람이 많았다. 또 동쪽에서 쓰나미가 오는데, 남쪽에서는 나토리강이 범람해 올라왔다. 마치 사방에서 물이 내가 있는 쪽으로 밀려오는 것 같아 정신이 없었다.”
 

ⓒ신호철"분명히 마을이 있었던 곳인데..." 아라하마 마을이 쓰나미에 휩쓸려 건물 몇 개만 남고 사라졌다.

 


아라하마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음 입구에서 만났던 다이카쿠 도시히로 씨와 다시 조우했다. 그는 양손에 진흙이 범벅된 핸드백과 비닐봉지 속에 든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그는 무너진 집 안에서 아내의 핸드백과 조상님의 위패를 찾아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거실에서 피 묻은 휴지를 발견했다. 쓰나미 이후에 가족이 살아 있었다는 뜻이다”라면서 웃었다. 그것만으로는 닷새 동안 가족의 연락이 없는 상황을 설명하기 힘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는 꽤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기자에게 “배용준이 10억원을 구호 성금으로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에서 우릴 도와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기자가 아라하마 마을에서 만난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은 연락이 안 되는 가족을 두고 있었다. 아라하마 마을을 벗어나면 센다이 시내로 가는 길에 시치고 소학교가 있다. 주민 대피소로 쓰이는 이곳에는 피난자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다. 생존자들은 이런 대피소를 돌아다니며 가족의 이름을 확인한다. 후루타 요시오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라하마 마을 주민인 그는 아내와 딸을 만나지 못했다. “분명히 다른 대피소에 있을 텐데, 차에 기름이 없어서 다른 대피소에 명단이 있는지 확인을 못하고 있다. 전체 실종자나 사망자 명단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수색 일주일째 "구조요원 한 사람이 시간당 시신 다섯구 수습"

시치고 소학교 벽 공고란에는 생존자 가족이 쓴 ‘이산가족 찾기’ 광고가 가득했다. 공고란 아래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기르던 개를 찾는다는 사연을 조그맣게 적어놓았다. 3월11일 20분짜리 영상에서 개 한 마리가 쓰나미를 피해 이리저리 뛰다 물에 휩쓸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라하마 이재민들은 소학교 교실에서 텔레비전 뉴스의 자료 화면 영상을 보면서 그날의 기억에 몸서리쳤다. 아라하마 토박이 다카하시 다이스케 씨(68)는 “우리 마을이 NHK에 나온 것은 평생 처음이다. 좋은 일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볼 때마다 슬프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NHK는 3월15일 이후 그 ‘화제의 영상’을 내보내지 않고 있다.

시치고 소학교에 대피 중인 아라하마 마을 주민은 1800명가량 된다. 전체 아라하마 마을 주민이 6000명이 넘는데 연락이 되는 사람이 몇  명인지, 사망자가 몇 명인지 정확히 집계되지 않고 있다. 대피소 본부 직원은 “총 사망자가 몇 명인지 미야기 현청 본부에서도 말해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라하마 마을에서 발견된 시신은 ‘그란데21’이라고 불리는 미야기 현 종합체육관 2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기자가 그곳을 찾은 저녁 6시쯤에도 여전히 각지에서 시신을 담고 온 앰뷸런스가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었다. 영안소를 관리하는 현청 공무원은 “유족이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맞다고 인정하면, 경찰 확인을 거쳐 가족에게 인계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유족이 지정한 장의회사에 맡겨져 바로 화장터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3월16일 아침 현재, 이 체육관에 있는 시신이 450구라고 했다. 그 역시 아라하마 마을의 총 사망자 수는 알지 못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공무원들 가운데 사망자 집계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신 안치소가 된 미야기 종합체육관 옆에는 한국에서 온 중앙 119구조대 본부가 있었다. 구조대 관계자에게 구조 활동 내역을 물어보니 “시신 발견 숫자는 언론에 알리지 않도록 지침을 하달받았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119구조대는 100명 정도 파견을 나와 있는데, 비공식적으로 하루에 두 자릿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한국 언론이 너무 소란 피운다”

기자가 센다이를 취재하던 3월16~18일은 한창 방사능 누출이 한국에서 이슈가 되던 때였다. 119구조대는 “현재 구조팀은 방사능 장비 3대를 운용하고 있다. 만약 시간당 방사능 수치가 20마이크로시버트(μSv) 이상이 되면 구조 요원 전부가 활동을 멈추고 현장을 탈출하도록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Atlaspress생필품 부족에 방사능 공포가 겹치면서 고통은 가중됐다. 후쿠시마 공항은 원전 주변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시사IN 조남진센다이에서 생필품을 사려고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Reuter=Newsis피폭된 딸을 면회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찼다.


센다이 시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120㎞가량 떨어져 있다. 한국인 대피 권고 반경인 80㎞보다 조금 멀다. 센다이 시에 사는 외국인들이 ‘엑소더스’에 나선 것과 비교하면 아라하마 주민을 포함한 토박이 센다이 주민들의 반응은 상대적으로 덤덤했다. 3월16일 밤 영사관에서 만난 센다이 교민 A씨는  이번 방사능 사건으로 겪은 부부 갈등을 이야기했다. 남편이 일본인인데 시어머니나 남편 쪽에서는 한국 미디어가 너무 소란을 피운다고 생각하고, 외국인이 센다이를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에 있는 친정 쪽에서는 “왜 빨리 일본을 떠나지 않느냐”라며 매일같이 전화를 해온다는 것이다. A씨 부부가 찾은 타협점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방사능 ‘엑소더스’에 무덤덤한 주민들

물론 이런 양국 시민의 온도차를 한국과 일본의 민족성 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연평도 포격 사태 때는 이와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일본인들도 방사능 공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센다이 버스터미널에는 센다이를 벗어나려는 시민들이 500m 이상 줄을 서 있었다. 도쿄로 가는 버스편은 3월28일까지 예약이 마감되어 있었다. 다만 방사능 사태는 쓰나미와 달리 피난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많은 센다이 주민들을 체념하게 한 듯했다.

아라하마 주민 같은 이재민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시치고 소학교 대피소에서 만난 사토 하루토 씨는 “지금 하루하루를 먹고 자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방사능 얘기 같은 것은 나중 문제다”라고 말했다. '사치'라는 것이다. 시치고 소학교 대피소 이재민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라고 했다. 일부 시설이 열악한 대피소에서는 추위,피로, 질병, 영양실조,스트레스,쇼크 등으로 죽는 이재민이 생겨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3월17일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대피소에 피난 온 환자 가운데 18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기자가 센다이를 떠난 19일까지도 센다이시에는 가스가 공급되지 않고 일부 지역에는 아직 수도가 끊겨 있었다. 아라하마 이재민에게 ‘방사능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차가운 교실 바닥과 사라진 고향에 대한 기억이었다.

기자명 센다이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