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길 걷기는 트위터 이용자들과 함께했다. 트위터에 번개 모임 공지를 올리고 찾아온 이들과 함께 걸었다. 다양한 반응을 듣기 위해서였다. 아이들과 온 가족도 있었고, 데이트 삼아 온 연인도 있었고, 다이어트를 위해 온 중년 남성도 있었다. 대부분은 등산이 익숙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
2월 말~3월 초 7일 동안 7곳을 걸었다. 산이 있는 코스를 만났을 때는 정상에 오르는 ‘등산’이 아니라, 옆으로 끼고 도는 ‘횡산’을 원칙으로 삼았다(산의 둘레를 돈다는 말로 횡산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참가자들과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제명시키자”라는 농담을 하면서 걸었는데, 정상 등정이라는 목표가 없으니 마음과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등산보다 둘레길 걷기는 문턱이 낮았다. 같은 코스로 ‘등산 모임’을 했을 때보다 ‘걷기길 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때 젊은 여성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도 수월하게 걸었다(물론 그렇지 못한 곳도 분명 있었다). 무엇보다 둘레길은 이름난 등산로보다 한산해서 좋았다.
등산과 둘레길 걷기의 가장 큰 차이는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 되나”라는 질문이 사라졌다. 등산을 하는 동안 80%의 시간은 발밑을 보고 20%는 주변 경치를 본다면, 둘레길 걷기를 하는 동안에는 80%는 주변 경치를 보고 20%는 발밑을 보면 되었다. 대화도 더 늘었다.
도심의 ‘비밀 정원’, 백사실계곡
봄맞이 길 번개를 열어 처음 간 곳은 인왕스카이웨이~백사실계곡 길이었다. 경복궁역(지하철 3호선) 옆 사직공원 뒤로 난 이 길은 시내에서 5분 만에 접근할 수 있는 산책로이다. 이 길을 한마디로 묘사하면 ‘현대에서 근대를 거쳐 전근대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듯한 느낌이다.
조선 왕조가 국가의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 뒤 사직공원에서는 옛 유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고색창연한 신사임당과 이율곡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개발 독재 시대 이후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한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금 오르면 국궁장이 나오는데 바람을 가른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더러 외국인도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이 길은 인왕스카이웨이를 따라서 나 있다. 쉽게 말해 찻길 옆이라는 얘기다. 다행히 오가는 차가 많지는 않아 도심에서 벗어난 듯 한적한 기분이 든다. 바로 곁에 차가 지나다니는 이 길을 등산로로 평가했다면 최악이겠지만, 걷는 길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인왕스카이웨이는 창의문을 기점으로 북악스카이웨이와 연결되는데, 여기서 부암동으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부암동 언덕 위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도 있는데, 부근에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해도 시심이 돋는다고 한다.
부암동에는 새참을 즐길 만한 곳이 많다. 치킨으로 이름난 ‘치어스’를 비롯해 제법 이름난 맛집이 많다. 그중 ‘천진포자’라는 중국식 만두집에 들렀다. 가수 현미씨를 닮은 중국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보이차와 함께 먹는 중국식 만두가 일품이었다. 주변에 소규모 카페도 많아서 한가하게 차를 즐길 수도 있다.
‘오름’에 오른 듯한 감동, 심학산 둘레길
경기도 파주 심학산 둘레길은 가장 많이 추천을 받은 곳이다. 가보니 이유가 있었다. 심학산은 등산 코스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둘레길은 일품이었다. ‘길의 패자부활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파주 출판도시 옆 평지에 외따로 있는 산이라 전망이 좋았다. 평지에 오뚝하게 솟아 있는 것이 제주도에서 오름에 올랐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청량감을 주었다.
길은 험하지 않았다. 안희태 기자(〈시사IN〉 사진팀)의 두 아들도 동참했는데 맨 앞에서 일행을 선도했다. ‘돌곶이 꽃마을’ 앞길로 올라갔는데 눈발이 제법 날려 분위기가 다소 음습했다. 그러나 봄이면 꽃이 만발하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다. 뒷산 올라가는 정도만 올라가면 둘레길이 나온다. 둘레길 어귀에서 뒤늦게 출발한 일행을 기다리느라 잠시 쉬었는데, 쉬기에 이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높지 않았다.
심학산 둘레길의 가장 큰 매력은 오솔길을 낸 것 말고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이다. 흙산인데 맨발로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다져져 있었다. 완보하는 데는 세 시간 남짓 걸리는데, 북쪽 사면을 걸은 뒤 남쪽 사면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늘진 길을 걷다가 햇볕 드는 길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날이 더워질 때는 그 반대로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려올 때는 파주 출판도시 쪽으로 내려왔다. 건축물들도 독특하고 북 카페같이 들러볼 만한 곳이 꽤 많았다.
“이런 길이 있었다니!”…여의도 샛강길
정치부 기자를 3년 남짓 하면서 자주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출입했다. 그런데 이번에 여의도 샛강길을 걸으며 기자 생활을 ‘허당’으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회의사당 후문 뒤 둔치에서부터 63빌딩 아래 둔치까지 샛강을 따라 뻗은 ‘샛강길’이 정말 좋았다(이런 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니…). 걷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제법 긴 길이다.
주말에 여의도를 찾는 시민들은 대부분 여의도공원이나 북쪽 둔치에서 피크닉을 즐기는데, 남쪽 샛강 쪽이 훨씬 생태적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는 사람은 제법 있었지만,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봄 가뭄 탓에 물이 적었지만, 습지가 있어서 한여름에는 수생식물의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을 것같았다. 습지에는 나무판자로 길을 잘 내어 질퍽한 흙길을 피할 수 있다. 샛강길을 걸을 때는 이어폰이 필수이다. 올림픽대로와 노들길을 달리는 차들이 제법 속도를 높여 꽤 시끄럽기 때문이다.
샛강길은 화장실도 인상적이었다. 냉난방이 완비되어 있었고 내부도 청결했다. 여의도와 영등포를 잇는 보행교가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는데, 조금 흉물스러웠다. 기하학적인 그 다리를 명물이라며 만든 것이겠지만, 선유도를 망치는 보행교처럼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자태를 뽐내는 듯했다.
‘그린웨이’ 무색한 일자산 산책로
서울 강동구 일자산 산책로는 일곱 길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다. ‘강동 그린웨이’라 이름 붙인 이 길은 ‘걷기 좋은 코스’로 국제적 인증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어떻게 그런 명예를 얻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킹콩이 지나간 듯 험악한 산책로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추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주변 정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일자산은 태풍 곤파스에 피해를 많이 입은 곳 중 하나다. 그런데 그 상흔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베어놓기만 하고 제대로 치우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들이 칼을 맞은 것처럼 길 옆에 쓰러져 있었다. 뿌리째 뽑힌 나무들도 방치되어 있었다. 강동구청에서는 하남시 쪽이 특히 그렇다고 항변하지만, 보기 민망하기는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정비된 곳은 극히 일부였다.
땅까지 질어서 마치 폐허가 된 원시림을 걷는 듯했다. 봄맞이 길이 아니라 겨울로 되돌아가는 길 같았다. 함께 간 트위터 이용자들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산에 쓰러져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을 보며 ‘장작 축제’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농담도 했다. 봄에 구청에서 ‘걷기 축제’를 한다고 하는데, 길을 정비한 뒤에 가는 게 좋을 듯싶다.
저 아래 두물머리, 수종사 길
양평군과 남양주시 경계의 운길산 수종사 오르는 길은 다산 정약용의 산책로로 알려진 길이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웬걸 웬만한 서울 도심의 등산로보다 더 붐볐다. 근처에 중앙선 운길산역이 생긴 탓인데 조용한 시골 동네가 왁자지껄한 먹자촌이 되어 있었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비닐하우스 음식점이 곳곳에 들어섰는데, 심지어 토종닭 잡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수종사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차도를 따라서 걷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차도 옆 등산로를 따라 걷는 방법이다. 그런데 둘 다 맹점이 있었다. 일단 차도는 쉽고 편리한 대신 자동차 매연에 시달려야 한다. 주말에는 차로 수종사에 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오가는 차들이 연방 뿜어내는 매연이 만만치 않았다. 흙먼지도 꽤 날렸다.
등산이 익숙한 사람은 등산로를 추천하는데 좀 험하다. 아이와 같이 온 가족이나 등산을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는 ‘비추’다. 아이를 데리고 번개에 왔던 가족이 등산을 포기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젊은 여성도 중도에 그만두었다. 아이가 부모에게 짜증을 내거나, 부모가 아이에게 짜증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워서 엉덩방아를 찧는 사람도 있었다.
수종사에서 보는 풍광만은 일품이었다. 두물머리(북한강·남한강의 합수 지점)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수종사에 오른 사람은 꼭 두물머리 산책로에 가볼 것을 권한다. 수종사에서 멀찍이 보이던 그 길을 직접 걸으면 운치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두물머리는 해거름에 더 좋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있는 성동올레
서울숲에서 남산까지 걷기 길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서울 성동구에서 조성한 이 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길’이라 할 만하다. 서울숲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는 동안 아름답고 비루하고 험하고 쉽고 재밌고 지루한 온갖 길을 다 거치게 된다.
응봉산부터는 주거지와 공원이 반복해서 나온다. 도심 능선을 따라 걷게 되는데 판자촌을 재개발한 독서당공원을 거쳐 대현산의 남쪽 사면을 지난다. 응봉근린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은 상가를 지나야 하는데, ‘고구마’라는 이름의 유명한 헌책방이 있어서 쉬어가기 좋다. 비록 생태적인 길은 아니지만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면서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응봉근린공원을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안구 정화’를 할 수 있다. 이곳은 서울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능선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생경한 각도에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남산에 이르기 전 매봉산에 오르게 되는데, 매봉산은 한강을 조망하기 가장 좋다. 서쪽과 동쪽을 두루 관찰할 수 있고, 높이도 제법 있어서 멀리 볼 수 있다. 남산처럼 한강에서 너무 멀리 있지도 않아 강의 느낌이 생생히 난다.
남산에 이르면 남산야외식물원과 남산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특히 남산공원은 한국에서 가장 이국적인 공원이다. 계단식 논처럼 생긴 계단식 공원인 이곳은 외국인도 많이 찾는다. 남산공원을 지나 남쪽 둘레길로 남산타워에 오를 수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남산의 남쪽 둘레길에는 소나무가, 북쪽 둘레길에는 신갈나무가 무성하다. 소나무는 햇빛이 없으면 잘 살지 못하는 ‘햇볕 나무’이고, 참나무류인 신갈나무는 햇빛 조건을 잘 갖추지 않아도 잘 사는 ‘달빛 나무’이기 때문인데, 수도권 산에서 두루 나타나는 양태다.
독립운동가 알아가는 재미, 북한산 둘레길
마지막 봄맞이길 번개,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정식 북한산 둘레길 1코스와 2코스를 걸었다. 다행히 비교적 걷기 쉬운 길이었다. 북한산 산허리를 따라 길이 나 있었는데, 제주올레보다 훨씬 정비가 잘되어 있었다(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북한산 둘레길은 전체 13코스(63.2㎞)로 나뉘어 있는데, 코스가 짧은 편이어서 하루에 서너 코스는 너끈히 걸을 수 있다.
1코스 소나무숲길은 덕성여대 앞 ‘솔밭근린공원’을 지나는 길인데, 삼림욕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2코스 순례길 구간은 4·19 묘역을 비롯해 독립운동가 묘소를 지나는데, 잘 모르던 독립운동가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특히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많아 둘레길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북한산 둘레길을 걸으며 안타까운 것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면서 텃밭이나 과수나무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많아 주인들이 철조망을 얼기설기 쳐서 막고 있었다. 그 모양이 흉했다. 누군가를 살리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죽이는 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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