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란 ‘석궁 재판’으로 비롯된 사법부와의 일전을 말한다. 석궁 재판 이전부터 교수 지위확인 소송, 명예훼손 고발 사건(그가 판사들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자, 대법원 경비대장이 판사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고발한 사건) 등으로 사법부와 수없이 부딪쳐온 그다. 수감 중에도 일명 DNA법 소송, 석면 소송 등을 제기하며 사법 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온몸으로 맞섰다. 출소한 이후 그를 네 번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했고, 반복해서 사법부를 규탄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부터가 신랄했다.
그렇지만 석궁을 들고 간 건 사실 아닌가. 석궁 들고 간 게 뭐가 잘못인가? 이것을 문제삼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도 분노하지 않는 인간은 사람도 아니다. 판검사들이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가만히 앉아서 ‘날 죽이시오’ 하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나? 석궁을 들고 가기 전에 1인 시위, 인터넷 홍보, 진정서·탄원서 제출, 기자회견 같은 합법적 수단을 다 동원해 (성균관대) 교수 지위 회복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법부와 박홍우(김 전 교수로부터 석궁 화살을 맞았다고 주장한 판사. 김 전 교수는 판사라는 직함을 빼고 이름만 불렀다)는 재판정에서 나(원고)에게 증인 채택 여부도 알려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증인 신문을 하는가 하면, 학생들이 서명하지도 않은 허위 증거를 채택해 나를 ‘교육자 자질이 없는’ 학자라고 매도하는 등, 위법한 소송 지휘로 날 죽였다. 그런 상황에서는 국민 저항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법관이란 머슴들이 어떻게 법을 위반하여 국민을 우롱하는가를 국민에게 알리고자 석궁을 들고 간 것이다. 내가 테러를 한 게 아니라, 그들이 법 위반을 해가며 재판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이들 증거가 김 전 교수 주장대로 조작 혹은 은폐됐는지 법정에서 밝히려면 또다시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설사 김 전 교수의 말이 맞다 할지라도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간 그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지은 죄에 비해 양형이 지나치게 무거웠다는 사실이다. 박홍우 판사가 받은 진단은 상해 3주. 1.5m 거리에서 쏜 석궁이 꽂혔는데 이 정도 상처만 입은 것도 미스터리지만,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초범에게 4년이라는 중형은 통례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중론이다. 최정학 교수(한국방송대·법학과)에 따르면, 피해자의 신분이나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가 형량을 정하는 데 하나의 요소가 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 교수는 석궁 사건의 경우 “범죄 동기나 배경, 또 범죄의 결과 즉 피해자에게 입힌 상해의 정도를 고려할 때 오히려 형을 감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한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에 이른 것 같다. 당하지 않으면 사법부의 패악을 모른다. 그들은 “힘없어 당했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지, 니들이 뭘 어쩔 건데?” 식으로 상전(국민)을 업신여긴다. 법관들의 소송 지휘가 법에 따라 이루어지는가를 감시하는 국민 기구나 제도가 없는 한, 나같이 재판테러 당하는 사람이 끝없이 나올 것이다. 공정하다는 법이 당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셈이 됐다.
검찰과 재판부가 무시하고 외면한 진실을 밝히고,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남은 숙제이다. 그의 ‘적’은 사법부만이 아니다. 교도소에 4년여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교정 당국과도 부딪쳤다. 때로는 서신 검열에 항의해서, 때로는 비인간적인 대우에 저항해서 말이다. 출소하기 며칠 전에는 DNA 채취를 놓고 교도관들과 한바탕 전쟁을 벌였다.
출소 직전에 교도소 내에서 DNA 채취에 저항한 일이 보도되었다. 1월20일 내가 있는 독방에 들어온 교도관 넷이 팔과 다리, 머리를 붙잡고 내 머리카락을 열 올이나 뽑아갔다. 그전에도 구강에서 DNA를 채취하려고 하기에 입 다물고 반항했더니, 결국 모발 뽑는 영장을 발부받아 와 강제로 뽑아갔다.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른 것이었나? 맞다. 지난해 7월에 디엔에이(DNA) 법이 생겼지만 인권침해 가능성이 상당한 데다, 나는 해당자도 아닌데 소급 적용해서 뽑아가더라. 참을 수 없어서 내 변호인인 박훈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존엄권 등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본 거다(DNA법은 아동·청소년 성폭력이나 살인, 강간, 강도 등 강력범죄와 절도, 방화, 약취·유인, 폭력 등 총 11가지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영장을 발부받아 채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미 국회에서도 일부 의원들에게 ‘위헌’ 내지 ‘악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교도소 내 서신 검열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형집행법 34조에 의하면 서신 내용을 검열할 수 없다. 그러나 봉투를 봉하지 않고 교도관에게 제출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교도소나 교도관에 불리한 내용이 있으면 재소자를 불러 회유·협박해 내용을 고치게 한다. 교도소 내로 들어오는 편지도 마찬가지다. 금지 물품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지만, 국가인권위가 지적했듯이 ‘명백한 위험이 현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서신 검열을 해서는 안 된다. 교도소 이야기가 안팎으로 자유롭게 드나들어야 교도소 내 비리가 줄어든다. 춘천교도소에서는 석면 관련 소송까지 제기했다. 어느 날, 밖에서 건축업을 했다는 한 수감자에게 교도소 내에서 석면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감자들도 인간인데, 석면이 쓰였다면 정말 문제 아닌가. 그래서 교도소장에게 1979~1981년 사이에 지어졌다는 교도소 설계도면과 당시 쓰인 자재 목록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보기 좋게 거부하더라. 그래서 할 수 없이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판사가 교도소 측 말을 빌려 “교도소의 위치 정보 등 보안상 문제로 설계도면을 보여줄 수 없다. 정 의심 가는 부분이 있으면 나랑 같이 다니며 뜯어 확인해보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거부했다. 석면은 전문가들조차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 도움을 받아 위치 정보와 관련 없는 도면 목록표, 실내재료 마감 상세도 등에 대한 문서제출명령신청을 다시 했고 현재 계류 중이다.
그는 출소 뒤 오랫동안 거주하던 서울 상도동에서 벗어나 요즘은 노량진 역 근처 아버지 집에서 쉬엄쉬엄 살고 있다. 그러나 ‘깐깐한 성품’ 탓에 가족들에게 살짝 타박도 듣는다. 아내에게는 “이제는 좀 조용히 살자”라는 소리를, 여동생에게는 “오빠의 독립투사 기질은 인정하지만, 이제 우리 집에 독립투사가 있는 건 싫다”라는 말을…(그렇지만 두 사람 다 그의 지적에는 100% 공감한다고). 그는 “요즘 새삼 내 지천명(하늘이 내게 준 일)이 뭔지 깨달았다”라며, 조용히 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다시 물었다.
새삼 깨달았다는 지천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회 구성원은 사회가 약속한 법과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 법과 룰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 나라 사람들은 그 같은 상황에 대해 이미 체념해버렸다. 그들, 법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지적·비판하는 것이 하늘이 내게 준 명령이 아닌가 싶다.
그 마르지 않는 용기와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분노와 좌절에 대한 약한 면역력인 듯하다. 누군가에게 당하면 조심하기 마련인데, 나는 부당한 일로 강하게 탄압받으면 더욱 더 강하게 반발하게 된다. 타고난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