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 털어 쇼하는 오디션 전성시대
  • 장일호 기자
  • 호수 182
  • 승인 2011.03.1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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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당신의 ‘꿈’을 ‘공개 채용’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일색이던 예능 프로그램은 2011년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오디션 참가자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노예 계약도 감수한다.
작은 눈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했던 꿈이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은 방송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꿈은 막연한 아쉬움으로 남겨두었다.

박현욱씨(24·가명)의 대학 생활은 평범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토익 시험을 준비했고, 공무원 시험도 기웃거렸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MBC에서 아나운서를 공개 채용한다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3월6일 첫 방송을 하는 <일밤-신입사원>은 MBC 창사 50주년 특별 기획으로, 공개 오디션을 통해 아나운서를 공채하는 프로그램이다.

   
ⓒMBC제공
오디션 열풍에 가장 발빠르게 편승한 공중파는 MBC다. 아나운서를 공개 채용하는 <일밤-신입사원>(위)에는 5509명이 지원했다.

신상 털려도 아무런 항의 할 수 없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을 것 같았다. ‘재미 삼아’ 시험을 봤다. 박씨는 1차 카메라 테스트와 2차 심층 테스트를 거쳐 3월2일 합격 통보를 받았다. 박씨를 포함해 MBC <일밤-신입사원> 오디션에 지원한 사람은 모두 5509명이었다. 이 중 64명만이 2차 테스트까지 통과했고, 박씨는 그중 한 명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합격했다니 기분은 좋은데, 어떻게 내가 됐을까 좀 의아하다. 아나운서 관련해서 한 번도 준비한 적 없다. 생각해봤는데 나는 ‘방송용’인 것 같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니까, 제작자 입장에서는 신선할 수 있지 않을까.”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어렸을 적 부르던 동요가 박씨에게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박씨는 방송을 앞두고 슬쩍 겁이 났다. 지원할 때 동의했던 몇 가지 조항도 마음에 새삼스레 걸렸다.

<일밤-신입사원>은 ‘노예 계약’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박씨를 비롯한 지원자 5509명은 다음과 같은 조항에 ‘동의’해야 했다. △나는 ㈜MBC에게 내 목소리·행동·이름·모습·개인 정보를 포함한 기록된 모든 사항을 프로그램에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MBC는 나의 초상과 자료를 2차적 저작물의 사용 등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 등을 포함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MBC와 본 프로그램에 관련된 관계자 및 모든 제작진은 나의 프로그램 지원 및 참가, 프로그램의 방영 취소, 사생활 침해, 명예훼손, 신체적·정신적 손상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의무가 없다.

   
ⓒMBC제공
<위대한 탄생>(아래)은 아류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흥행에 성공했고

이 때문에 아나운서 지망생 전영이씨(28·가명)는 <일밤-신입사원>에 지원하지 않았다. 전씨는 이미 2008년 올리브TV <그녀의 아름다운 도전-아나운서 편>에 출연해 최종 11인에 들었던 전력이 있다. 그러나 전씨 본인은 물론 가족의 신상까지 공개되는 방송에 대한 부담이 컸다. 결국 전씨는 중간에 출연을 포기했다. 전씨는 “케이블 방송도 아니고 공중파 공영 방송이라는 MBC가 방송에 나간 뒤 이른바 ‘신상’이 털려도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도록 동의서까지 받는 모습에 기가 질렸다”라고 말했다. 얼굴이 알려져 다른 방송사 시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컸다.

“꿈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일밤-신입사원>)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Mnet <슈퍼스타K 3>) 이 같은 문구가 선전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홍보 영상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꿈’을 두드려 깨운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람도 열심히 노력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지난해 10월 중학교 졸업 학력의 환풍기 수리공 허각씨가 <슈퍼스타K 2>에서 우승하는 ‘신화’를 쓰는 동안, 케이블 방송 Mnet은 ‘대박’을 터트렸다. <슈퍼스타K 2>는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보다 더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가했다던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이 부럽지 않은 성과였다. <슈퍼스타K 2>는 ‘민주당이 가야 할 감동 정치의 길’(손학규 민주당 대표), ‘공정 사회의 모델’(조계종 자승 총무원장) 이라는 찬사를 받는 등 정치사회적으로도 파장을 일으켰다.

   
ⓒ시사IN 백승기
<슈퍼스타 K>(위)가 성공하면서 경쟁 분야도 다양해졌다.

그러자 공중파가 움직였다. MBC는 <슈퍼스타K 2>의 ‘아류’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발 빠르게 <위대한 탄생>을 편성했다. 방송 막바지를 향해가는 현재, 각종 비난과 염려 속에서도 <위대한 탄생>은 흥행에 성공하며 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20%에 이르는 시청률뿐 아니라 40억원이 넘는 광고 수익을 올렸다. 한국방송광고공사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예능 프로그램 중 최고 수준의 광고 수익을 올리고 있다.

‘검증’은 완료되었다. 2011년 방송계는 너도나도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영하거나 기획 중이다(표 참조).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씨는 “경쟁과 생존의 형식이 이토록 찬양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말한다(60~61쪽 딸린 기사 참조). 아나운서(<일밤-신입사원>), 연기자(<기적의 오디션>), 댄서(<댄싱 위드 더 스타>), 디자이너(<프로젝트 런웨이>) 등 경쟁 부문도 다양해졌다. 아리랑TV는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와 손잡고 <서바이벌 콘텐더스>를 만들어 일반 구직자의 취업까지 오디션 프로그램 안에 끌어들였다. 4주간의 ‘서바이벌’을 통과하면 정규 사원으로 채용된다. 현재 LG생활건강과 한국GM이 참여하고 있다.

일반인은 물론 연예인도 오디션 프로그램에 뛰어들었다. MBC <일밤-나는 가수다>와 tvN <오페라스타 2011>에는 김건모·백지영·테이 등 굳이 경쟁이 필요 없는 검증된 현직 가수들이 나와서 실력을 겨룬다. 상반기 중 방송할 예정인 SBS <김연아의 키스 앤드 크라이>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피겨스케이팅 오디션까지 치러야 할 판이다.

   
ⓒ온스타일 제공
위는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오디션 프로그램 ‘난립’과 함께 물량 공세도 시작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보상도 크다. Mnet은 3월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열릴 <슈퍼스타K 3>의 총상금 규모가 5억원(상금 3억원+음반제작 지원금 2억원)이라고 밝혔다. MBC <위대한 탄생>과 tvN <코리아 갓 탤런트>의 상금 3억원을 뛰어넘는 금액이다. 이 밖에도 PPL을 통해 광고 효과를 노리는 기업들의 참여가 더해지면서 보상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오디션 전성시대, 혹은 ‘트루먼 쇼’

방송 제작자들은 이제 아이돌에 기대지 않고도 방송을 만든다. 바야흐로 ‘오디션 전성시대’가 펼쳐지면서 다양한 삶의 이력을 가진 일반인들이 참여해 프로그램은 더 ‘리얼’해지고, 보통 사람들은 ‘자기 전시’의 욕망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을 구경하는 일반 사람들도 생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투표(혹은 여론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권위’를 획득하게 됐다.

   
 
참가자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폭언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 취업 오디션을 준비 중이라는 방소연씨(27·가명)는 “요즘에는 스펙보다 ‘스토리’가 취업의 경쟁력이라고 들었다. 경쟁에서 떨어지더라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심정으로 준비한다”라고 말했다. 다중의 다종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포맷이 시대의 요구와 맞물려 완성된 셈이다.

3월3일 <일밤> 방송에 앞서 기자간담회를 연 김영희 CP는 자신만만했다. 이유가 있었다. <일밤> 광고는 방송 전에 이미 ‘완판’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트루먼 쇼’의 한복판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취재 도움: 황승기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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