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바이러스 감염시키는 ‘모금 전문가’
  • 고제규 기자
  • 호수 181
  • 승인 2011.03.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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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드레이저가 되어 거리 모금에 나섰다. 시민 88명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중 단 한 명만이 기부 약정을 했다.
핫팩부터 챙겼다. 옷장에 넣었던 내복도 다시 꺼냈다. 전날 교육 때 전수받은 비법대로 ‘공사’에 들어갔다. 내복을 입기 전에 내복 바깥면 등 쪽에 핫팩을 붙였다. 그 위에 윗옷을 입었다. 등산용 양말까지 챙겨 신고 모금 전문 회사 ‘도움과나눔’ 사무실로 향했다. 모금 전문가를 뜻하는 ‘펀드레이저(fundraiser)’라는 직업을 ‘1박2일 혹한기 캠프’ 차림새로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2월23일 오전 11시30분 용산역. 독거노인을 돕는 국제단체 한국헬프에이지의 ‘F2F(Face to Face)’ 모금에 나섰다. 거리 캠페인을 뜻하는 F2F는 1997년 그린피스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처음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도움과나눔이 2005년부터 시작했다(도움과나눔은 비영리 전문 모금회사로 한국헬프에이지 등 시민단체 4곳의 모금을 대행한다).

   
ⓒ시사IN 안희태
‘모금 전문가’ 체험에 나선 고제규 기자(아래). 거리 모금의 적인 추위를 막으려 옷을 단단히 껴입었다.
가난한 신입 여대생의 아름다운 기부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목회자의 길 대신 도움과나눔을 택한 현병두씨(29), 산학 인턴으로 이 단체 일을 체험하다 신입사원이 된 전구슬씨(26), 사회복지를 전공한 신입사원 김민지씨(27), 아르바이트생 김찬미씨(23)와 함께했다. 거리에 나섰더니 교육받은 대로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연말 길거리에서 한번 하는 불우이웃 돕기에도 인색한 사람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적고 계좌번호까지 적어 약정을 해줄까 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다.

오후 1시30분, 어색함을 떨쳐내고 헬프에이지 단체를 알리는 파일을 들고 “잠깐만 시간 내주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역시나’였다. 시민들은 눈도 마주치고 않고 휙휙 지나갔고, 말을 걸면 아예 종종걸음을 쳤다. 내가 약정을 받지 못해 초조해하니, 팀 매니저 격인 현병두씨가 한마디 했다. “실적에 얽매이지 마세요. 우린 돈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겁니다. 기부액보다 기부 문화를 알리는 게 더 중요합니다.” 한참이나 어린 현씨가 달리 보였다.

오후 2시20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대생처럼 보여 “대학생이세요?”라고 말을 붙였다. “예. 이번에 합격했어요.” “축하합니다”라면서 말을 이어갔다. 헬프에이지 취지를 설명하고, 한 달에 커피 한 잔 덜 마시고 기부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다’는 현병두씨의 조언이 떠올라 “기부를 하면 어르신들은 돈보다 손자 손녀 생기는 걸 좋아할 것이다”라는 말도 보탰다. 선뜻 후원을 하겠다고 했다. 약정서에 김가람이라고 쓴 뒤 “적은 액수도 괜찮아요?”라며 5000원을 약정했다.

   
ⓒ시사IN 안희태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 세우려 했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쳐갔다.
가람양에게 선뜻 후원에 응한 이유를 물었다. 김양은 “지금까지 도움을 받았어요. 고등학교도 지원을 받아서 다녔고, 이번에 장학금을 받게 되어서 대학도 가게 됐어요. 이제는 저도 좀 돌려주고 싶어서요”라고 말했다. 가람양은 집안 살림이 넉넉지 않아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였다. 20세 미만이라 부모 동의가 필요했는데 부모도 흔쾌히 승낙했다. 순간 좀 멍해졌다. 소름도 끼쳤다. 가람양은 돈을 많이 벌어야 기부를 하는 게 아니라, 처지와 여건에 맞게 기부를 한다는 나눔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기부 문화 설명 들은 50명, 기부 약정한 10명보다 더 중요

온종일 거리 캠페인을 벌이면 고될 법도 한데 찬미씨는 시민들을 향해 눈웃음을 그치지 않았고, 구슬씨는 손가락을 펴 “1분만 시간 내주시겠요?”라며 다가갔다. 기부 약정을 잘 받아 ‘머신’으로 불리는 민지씨도 “잠깐만요”라며 영화 <슈렉>에 나오는 천진난만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시민들과 눈을 계속 맞추었다.

캠페이너들이 퍼뜨리기 시작한 기부 바이러스 감염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오후 3시20분, 대학 새내기 윤성용씨(21)는 “피아노 전공이라 독일 사회를 조금 아는데 사회복지가 원동력이다”라며 흔쾌히 약정을 했다. 오후 5시30분, 자신도 힘들지만 캠페인 취지에 공감한다는 김아름씨(24)도 생애 첫 기부를 했다. 5분 뒤에는 삼성의료원 소속 금선오씨(34)가 약정에 동참했다. 금씨는 알고 보니 시민단체 10곳 정도에 후원하는 ‘기부 천사’였다.

오후 5시45분, 전주에서 올라온 김성이씨(50)는 후원 약정을 한 뒤 인터뷰를 요청하자 “별일도 아닌데요”라며 쏜살같이 달려가버렸다. 머리카락에 왁스를 발라 한껏 멋을 부려 기부하고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차림새를 한 김형준씨(24)도 내 편견을 깼다. 김씨는 “독거노인에 대한 정부 지원이 부족한 거 아니냐. 담배 한 개비 안 피우면 된다”라고 말했다.

저녁 6시45분, 캠페인이 끝났다. 나는 이날 하루 시민 88명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중 여섯 명에게 한국헬프에이지에 대해 설명을 했으며, 한 명에게 기부 약정을 받았다. 이날 캠페이너들이 말을 건 사람은 총 1만103명이었다. 이 중 50명에게 한국헬프에이지에 대해 설명을 했고, 총 10명한테 약정을 받아냈다. 현병두씨 등 캠페이너들은 기부를 약속한 10명보다 기부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들은 50명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이들이야말로 ‘기부 바이러스’에 잠재적으로 감염되었기에 더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모금 전문가’라는 직업은 많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신학대학을 나온 병두씨가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면, 구슬씨가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에 취직했다면, 지금보다 월급봉투가 두툼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돈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행복 비타민을 매일 나눠주고 또 시민들한테 받고 있었다. 저녁 7시 퇴근길. 등에 붙인 핫팩은 식었지만, 가람양과 시민들이 전해준 기부 불씨 때문인지 내 마음 한구석도 후끈했다.

   
ⓒ시사IN 안희태
거리 모금을 위해 자리를 잡는 모습.

이 직업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펀드레이저에게 자격증을 준다. 정치권 펀드레이저도 특화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모금 전문 회사로 ‘휴먼트리’ ‘도움과나눔’ 등이 있다. 3월5일 경기도 문화의전당에서 1000개의 직업 박람회가 열린다.

어떻게 시작할까?
‘도움과나눔’이나 ‘휴먼트리’에서는 모금 전문가 과정 교육을 한다. 도움과나눔에서는 체험도 하며 용돈을 버는 아르바이트생도 모집한다. ‘도움과나눔’ ‘휴먼트리’ 모두 대학생 인턴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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