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0일 프랑스 공중파 채널인 TF1에 출연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다문화주의 정책은 실패했다”라고 공언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주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 신경을 썼지만, 정작 이들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라고 덧붙였다. 사르코지의 ‘다문화주의 정책 실패’ 발언은 유럽 정상 중에서 세 번째다.

지난해 10월16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독일식 다문화주의는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2월5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서로 다른 문화가 독립해서 공존하는 영국식의 다문화주의는 영국의 가치 안에서 발전하지 못했다”라고 선언했다. 이들, 유럽의 중심 국가 수장들은 왜 한목소리로 다문화주의 정책 실패를 선언한 것일까?

ⓒAP Photo지난해 9월 집시 추방 등 사르코지의 치안 정책에 반대하는 프랑스인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 해답을 얻으려면 먼저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다문화주의 정책이 처음 부각된 것은 1970년대 미국과 캐나다에서다. 1971년 캐나다는 자국 헌법 안에 다문화주의 정책을 포함시켰다. 이 정책은 인디언, 프랑스어권 출신 등 소수자가 캐나다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게끔 돕고, 이들이 교육·종교·고용 등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법적 지원을 하기 위해 도입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문화주의는 유럽 대륙을 건너오면서 논의가 확산되었다. 다문화주의에 특히 민감했던 나라들은 옛 식민지를 거느렸던 프랑스·영국·네덜란드·독일 등이다. 이들은 다문화주의를 자국 상황에 맞게 수용했다.

앵글로색슨 vs 유럽식 다문화주의

앵글로색슨의 다문화주의는 자유를 바탕으로 동질의 문화를 가진 집단끼리 생활하는 공동체주의에 기반한다. 미국 내 코리아타운·차이나타운처럼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이들이 모여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을 장려한다.

유럽에서 이 같은 방식을 수용한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미국식 다문화주의에 입각해 문화적·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통합되어 살기보다 각자 근거지를 두고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을 수용했다. 이민자·소수자들은 영국 주류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그들만의 작은 사회를 이루며 존재한다.

반면 프랑스는 앵글로색슨식 공동체주의와 다른 정책을 펼쳤다. 이른바 통합주의라 불리는 이 정책은 문화적·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 또한 자유·평등·유대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정신에 따라 프랑스 사회에 통합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다문화주의 정책에 실패했다’는 각국 수장들의 잇단 선언은 이민정책으로 인한 후유증이 커지고,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로 인한 테러 위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제기되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과감한 이민정책을 펼쳤던 독일이지만 2000년 이전까지는 ‘피’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비록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도 국적을 자동으로 획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1월부터는 외국인 부모를 둔 아이라도 독일에서 태어날 경우 자동으로 국적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독일의 지도자 사이에는 독일 사회를 더욱 결속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메르켈 총리가 “우리는 기독교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독일에서 자리가 없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선언은 소수자(이민자)들이 독일 사회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포하고 있다. 독일은 이제 공동체주의와 동화주의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

반면, 영국은 이민 정책이나 이슬람 문제와 관련해 좀 더 민감하다.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영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2005년에는 테러가 발생해 50여 명이 사망하면서 영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 뒤 영국은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 대상 지역으로 꾸준히 지목되어왔다. 그런 상황에서 캐머런의 발언이 나오자, 영국 내 무슬림협회들은 다문화 정책 실패가 이민 문제나 테러리즘 때문이라기보다 영국 정부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한 결과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또 좌파들은 캐머런의 발언이 영국 사회 내 두려움을 고조시키고 극우파의 논리를 돕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AP Photo“프랑스의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다”라고 말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위).
한편 사르코지의 발언과 관련해 프랑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프랑스 크리스토프 베르토시 국제관계연구소(IFRI) 교수는 일간지 〈리베라시옹〉과 인터뷰에서 사르코지의 다문화주의 정책 실패 발언은 현실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사르코지가 영국 캐머런의 발언을 예로 들며 “영국은 다문화주의의 희생자다. 우리 역시 무슬림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상황도 마찬가지다”라는 논리를 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이슬람 문제가 심각하지 않으며, 프랑스식 통합주의는 나름 잘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에서도 사르코지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중도파인 프랑수아 바이루는 “다문화주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다문화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이를 확인하듯 사회학자인 파트리크 베일은 “프랑스는 국가의 정체성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강한 편이다”라고 덧붙였다. 또 프랑스의 흑인 인권단체 CRAN은 “프랑스의 다양성, 특히 종교적 다양성은 실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 자체가 다양성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문화주의 실패를 화두로 좌파 진영 공격

역설적인 것은 사르코지가 프랑스식 통합주의를 비판하며 앵글로색슨식 공동체주의 모델을 지향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2007년 대선 때 이를 분명히 밝힌 그는 미국의 포지티브 차별 정책(소수자에게 특별 혜택을 부여하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자신이 주장했던 공동체주의식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 2012년 선거를 앞두고 최근 세를 확장하고 있는 극우파(FN)의 표를 흡수하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압도적이다. 다문화주의 실패를 인정함으로써 프랑스의 국가적 정체성 문제, 이민정책, 종교 갈등으로부터 사회적 안전망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 극우파의 표심을 붙잡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문화주의 실패를 화두로 좌파 진영을 논쟁 테이블로 불러오려는 목적도 있다는 지적이다.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좌파와 우파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경계가 혼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논쟁 과정을 통해 사회당이 이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답을 줄 만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분석도 제기된다.

기자명 파리·최현아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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