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2일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에서 각계 인사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 리영희 교수 49재가 봉행됐다. 문경 봉암사에서 동안거 중인 전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이날 49재를 직접 봉행하기 위해 잠시 봉은사에 들렀다. 생전에 리영희 교수는 명진 스님과 각별한 인연이었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 미망인 윤영자씨와 명진 스님이 행사 전 30여 분에 걸쳐 나눈 환담을 중계한다.   

명진 스님: 교수님과 저는 서울공고 동문입니다. 서울공고 후배들이 모교가 낳은 2대 인물로 교수님과 저를 꼽는다는 말을 들었지요(웃음). 제가 천일기도 할 때 리영희 교수님께서 찾아오셨기에 “제게 듣기 싫은 말씀 좀 많이 해 주세요”라고 청했더니 교수님은 “세상이 쉽지 않은데 너무 자신감이 넘친다. 너무 자신만만한 게 걱정이다”라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런 사이인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참석도 못해 너무 가슴 아파서 울었습니다. 문경 봉암사에서 함께 결제하는 스님들께 ‘교수님 장례식도 못나가게 하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라고 했더니 스님들이 ‘그럼 49재 때 갔다 오시라’고 해서 이번에 나온 것입니다.

리선생 미망인: 봄이면 우리 집으로 나물을 보내주시고 재작년에는 배추까지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봉암사에 거처하시기는 어떻습니까. 날 풀리면 제가 봉암사로 찾아가 뵐께요.

명진 스님: 거처하는 데 아무 불편 없습니다. 봄에 한번 바람 쐬러 오시지요.

리선생 미망인: 우리집 양반이 광주 5․18 묘지에 묻혔다니까 많은 분들이 “그래야지…많은 사람들이 리 선생의 뜻을 따르다 그곳에 묻혔는데 그리로 가셔야지” 라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시사IN 조남진고 리영희선생 49재가 22일 오전 서울 봉은사 법왕루에서 진행된 가운데 조계종 문경 봉암사에서 동안거 중인 명진스님이 참석해 리영희선생의 부인인 윤영자씨와 대화하고 있다.

명진 스님: 1986년도에 제가 성동구치소에서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 리교수님 책을 처음 접하고 벼락 맞은 줄 알았어요. 저도 그 책보고 신세 버린 사람 중 하납니다(웃음). 생전에 선생님께서는 자별하고 특별하게 저를 대하셨어요. 1988년 교수님이 성수동 2층집에 사실 때 강연을 요청 드리러 처음으로 찾아가 뵈었지요. 당신이 한국전쟁 당시 설악산 군대 복무하실 적에 낙산사 경판을 불지르려던 것을 필사적으로 만류해 구했다고 하시더군요. 대구지검장으로 있는 김진태 검사가 그 이야기를 해줘서 제가 일부러 선생님을 찾아 뵈었어요. 그때 선생님은 엘란트라 승용차를 사서 막 운전을 배우셨다며 앞으로 사모님 태우고 강원도 구경을 갈 수 있다고 좋아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낙산사 주지스님에 연락해 리영희 선생이 가실테니 각별히 모시라고 했어요. 다녀오신 선생님은 “주지에게 회도 얻어먹고 잘 지내다 왔다”고 하시더군요(웃음).

리선생 미망인: 네, 그때 낙산 비치호텔인가에서 잘 쉬고 왔습니다.

명진 스님: 제 1000일 기도가 끝나고 회향할 때 리 교수님이 찾아오셔서 평생 지니고 쓰시던 만년필을 선물로 주고 가셨어요. 그 펜으로 〈전환시대의 논리〉며 〈우상과 이성〉 등을 쓰셨다니 그렇게 감개무량한 선물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선생님이 주신 만년필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사인해달라는 분들한테 폼 내고 있습니다(웃음).

리선생 미망인: 그 양반은 평생 만년필과 펜으로만 글을 쓰셨어요. 그때 명진 스님한테 가려는데 마땅한 선물이 없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평생 아끼던 만년필을 드리면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명진 스님: 선생님은 평생 감옥을 5번씩이나 가셨지만 그거야 선생이 원하신 삶을 살다 가신 것인데, 그 뒷바라지 하신 사모님의 세월은 또 얼마나 기막혔을까요. 교수님이야 당신 하고 싶은, 원하는 삶을 사셨지만 사모님이 뭔 죄냐고.. 허허... 사모님 안 계셨더라면 선생님이 어떻게 그런 훌륭한 사상을 글로 전파하셨을까 생각됩니다. 투병하실 동안 마지막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저를 알아는 보시더군요. 말씀은 못하시고. 작년 11월 제가 훌쩍 문경으로 내려갔다가 이번에 리교수님 49재 봉행하러 온다니까 봉은사 신도분들도 저를 보겠다고 오늘 49재에 대거 온답니다.

ⓒ시사IN 조남진
리선생 미망인: 우리집 양반은 스님께 되로 주고 말로 받으셨군요(웃음). 신도들이 원하는데 봉은사로 다시 오셔야지요?

명진 스님: 봉암사에서 결재 마치고 나면 그 문제는 총무원과 협상을 해야겠지만 대한민국에 절도 많은데 어디로 가면 어떻습니까. 운수낙자라고 해서 떠도는 달이지요. 주지는 청산이고, 우리같이 걸망지고 떠도는 중은 백운이라 합니다. 지금은 제가 백운이 되어 걸망지고 산천을 떠도는 거지요. 오늘로 봉은사를 떠난 지 두 달인데 돌아와보니 물건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뒀군요(웃음). 1월3일 반결제일에 400여명의 신도가 문경까지 찾아와 울고불고 하는 걸 보며 제가 이 정부로부터 강남에서 몰아내야 할 좌파라고 찍혔지만 인기는 아직도 남아있는 돌연변이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는 2012년 대선 나가야 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합니다만... 허허

리선생 미망인: 대선 나가신다면 제가 기필코 막겠습니다(웃음)

명진 스님: 이 동네 자체가 주지만 좌파지 우파동네 아닙니까.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어요. 1월3일에도 강남 신도 400명이 봉암사로 내려왔기에 제가 불교 이야기는 않고 MB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강남사람도 갈수록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것 같더군요. 봉은사 앞 동네 주민들 여론조사를 해보면 반MB 응답이 70%가 넘는데 소망교회 앞에서 해본 여론조사는 반MB가 18%로 나오더군요(웃음).

리선생 미망인: 이번 49재는 봉은사가 주관하는 거지요?

명진 스님: 봉은사에서 하지만, 제가 주관해서 제사를 올리는 방식입니다. 원래대로라면 극락 가시라고 빌어드려야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리영희 교수님이 당장 혼자만 극락 가시길 바라지 않습니다. 극락이 뭔가요. 지옥은 숟가락이 서로 부딪쳐 밥을 못먹고 싸우고 있는 곳이고, 극락은 긴 숟가락으로 서로의 입에 밥을 넣어주며 행복해하는 그런 곳이었다지요. 선생님이 바란 세상은 서로간에 위해주고 신뢰하는 극락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내 입에만 밥 들어가는 이기심이 가득찬 세상 아닌가요. 저는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처럼 형형한 눈길로 이 세상을 지켜보다 꾸짖는 무서운 스승이 되어 세상이 바뀌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좀더 늘어날 때까지 눈감지 말아주십사하고 부탁하고픈 심정입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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