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찬바람 속에는 어떤 기운이 깃들어 있다. 당산에 용줄을 감듯 온몸을 휘감는 바람, 바람은 나조차 몰랐던 오목가슴 속 응어리를 씻어내려는 듯 마구 달려든다. 어수선한 갈매기들, 달짝지근한 갯내음, 출렁이는 물여울. 사람들은 이따금 저 바다 앞에 저를 세워둘 필요가 있다 싶다.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면’ 불어오는 바람, 우쭐대는 어선, 펼쳐진 바다, 방파제 따라 걷다 마른세수를 해도 좋겠다 싶다.

언젠가 만난 전어 잡이 어부 박정관씨는 그랬다. “잘 잽힐(잡힐) 때가 있고, 안 잽힐 때가 있제. 오늘 안 잽혔다고 한숨 쉬믄(쉬면) 바다에서 어찌 산단가. 오늘 안 잽혔어도 내일 물정 맞으믄(맞으면) 잡는 것이제….” ‘물정’은 ‘바다의 운’ 같은 것.

ⓒ장흥군청 엄길섭 제공남포 바닷가는 앞바다에 소나무 몇 그루 있는 작은 섬을 달처럼 띄워놓았다.
찬바람에 굴 익어가는 포구
- 장흥 남포

전남 장흥군 남포는 겨울이라 더 생기 가득한 바닷가 포구다. 겨울 닥치면 종일 굴만 까고 있는 마을. 선외기 몇 척 흔들리는 작은 포구. ‘갯것 잘하는 며느리는 쳐도, 술 잘 담그는 며느리는 치지 않는다’는 갯가 속담이 그대로인 포구 마을. ‘정남진’으로 더 알려진 장흥 용산면 상발리 남포.

물가에 거둬들인 굴이 망에 담겨 차곡차곡 있다. 남포 사람들은 그 굴망 끄집어내는 것이 시한(겨울)에 해야 할 일이다. 집 마당에서, 바람막이로 만든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볕 나고 바람 없는 날은 선창에서 굴 까는 일이 중하다. 오종종 앉아, 물살 쏠리듯 밀리듯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굴을 깐다. 느긋하게 얘기 나눠도 조새(굴 까는 갈고리) 쥔 손놀림은 ‘누가 빠르냐’ 시합이다.

이 굴 맛보려고 많은 사람이 남포를 들어선다. 남포는 아름다운 바다를 품고 있다.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바닷가는 앞바다에 소나무 몇 그루 고즈넉한 작은 섬을 달처럼 띄워놓았다. 소의 등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소등섬’. 바닷물이 밀리면 그곳으로 가는 길이 난다. 사람들은 소등섬까지 걸어갔다가 연기 피어나는 굴 구이집으로 간다.

ⓒ김창헌자연산인 남포굴은 씨알이 굵지 않지만 무척 달보드레하다.
굴은 톡톡 튄다. 황토로 만든 화덕에 참나무 장작으로 굴 구이를 한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굴 익기를 기다린다. 의자는 그물 가라앉지 않도록 바다에 띄우는 스티로폼 부표. 안성맞춤이다. 참나무 타는 매운 내가 좋다. 강한 불기운에 굴은 금세 입을 벌린다. 면장갑 낀 손들이 분주하다.

남포 굴은 씨알이 굵지 않다. 자연산 굴이다. 바다에 돌을 넣어 굴 포자가 자연스레 엉기게 하여 길러낸다. ‘투하식’이라 한다. 남포마을이 갯바닥에 굴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 부칠 땅 없는 갯마을은 ‘벌이’가 필요했다. 바다에 돌을 넣어 굴을 키우자는 계획은 당시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차지고 차진 뻘, 돌만 집어넣으면 바다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시월 보름사리부터 섣달 보름까지 굴 뜨는 작업을 한다. 마을 사람들 공동 작업이다. 한 집에 한 사람만 나와 굴을 뜰 수 있다는 어촌계 약속이 있다.

“달보드레하제. 진짜배기인 게, 장흥장·관산장·강진장 갖고 가면 호랭이(호랑이) 무섭게 폴리네(팔리네).” 남포 사람 김금순 할머니가 말하는 남포 굴 맛이다.

남포마을이 알려진 데는 임권택 감독이 제작한 영화 〈축제〉의 힘도 크다. 남포의 잔잔한 풍경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임권택 감독과 영화의 원작을 쓴 장흥 출신 소설가 이청준은 영화를 촬영할 마땅한 장소를 찾기 위해 남쪽 해안을 다 더트고 다녔다. 두 사람은 어느 날 남포를 찾았고, 그 즉시 결정했다. 오목한 해변과 정자나무가 있는 집, 소등섬. 영화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정자나무는 지난 태풍에 쓰러졌지만 소등섬은 여전히 미끈한 길을 내어주고 있다. 



파도와 갯돌이 1만년 동안 나눈 사랑
-완도 정도리 구계등

환한 바닷가다. 마을을 지키는 방풍림, 어둑신한 숲을 건너면 바다가, 하늘이 환하게 열린다. 전남 완도군 정도리 구계등은 살며시 다녀오기 좋은 바닷가다.

등 맞대고 얼굴 맞댄 갯돌들. 얼마나 부대끼며 살고 나면 저렇게 둥글어질까. 얼마만큼 파도에 휩쓸려야 저런 한 세상 이룰 수 있을까. 물속으로 ‘아홉 계단’을 이뤘다. 그래서 구계등(九階燈)이다. 바닷속 깊은 데까지 갯돌들이 모여 산다.

구계등 갯돌은 바윗돌과 파도가 1만여 년 동안 나눈 사랑이다.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으면서 100m 이상 내려갔던 바닷물이 올라왔다. 이때 함께 밀려 올라온 바위들이 태풍과 해일에 깨지고 파도에 구르고 굴렀다. 갯돌처럼 둥그렇게 앉아 바다를 본다. 다르르르, 데그르르. 몽돌 구르는 소리가 그래, 그래, 그래, 마음을 다 받아준다. 겨울이라 바다는 더 짙푸르다. 멸치잡이 어부 박영준씨는 “봄여름 바다는 뜬물이고, 가을 겨울에는 물이 가라앉아 더 맑다. 맑은 물만 있어 시퍼렇다”라고 말한다.

ⓒ김창헌정도리 사람들은 구계등을 ‘짝지’라고 부른다. 큰비가 오거나 큰바람이 불려고 하면 이 짝지 울음소리(갯돌 구르는 소리)가 달라진다.
정도리 사람들은 구계등을 ‘짝지’ 또는 ‘짝개’라 부른다. ‘구계짝지’라고도 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러 온다고 ‘구경짝지’라고도 한다. 당숲 앞에 있는 바닷가라서 ‘당앞’이라고도 한다. 정도리에는 짝지가 두 개 있다. ‘큰 짝지’와 ‘작은 짝지’. 큰 짝지는 구계등이고 작은 짝지는 구계등 바로 왼쪽, 동백숲 아래 있다. 바둑알만 한 갯돌이 파도와 노는 아담한 곳이다.

일기예보가 없었던 시절 짝지 울음소리는 기상통보관 노릇을 했다. 큰비가 오거나 큰바람이 불려고 하면 갯돌 구르는 소리가 달라진다. 구르륵 구르륵, 데르륵 데르륵, 드글드글…. 마을 사람들 다 들리도록 운다. 사람들은 ‘짝지가 운다’ ‘당앞에가 운다’고 말한다. 짝지가 울면 바다에 안 나간다. 바다가 조용하고 바람이 없어도 짝지가 울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큰 놀이 일어난다.

구계등에는 다도해국립공원 사람들이 꾸민 ‘시인의 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시집도 읽고 구계등 생태 공부도 할 수 있는 곳.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글을 모은 책자에는 아홉 계단을 이룬 갯돌처럼 종이 한 장 한 장 위에 추억이 쌓여 있다. 2007년 연인이 남긴 사연. “우리 서로를 알게 된 지 벌써 12년, 서로를 사랑하게 된 지 벌써 3년. 처음 이곳에서 사랑을 싹 틔웠는데 다시 오니 새롭네. 이곳에서 처음 사랑을 느꼈을 때처럼 항상 변치 말고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자.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해… ♡.”

2008년 봄에 이곳을 다녀간 한 사람은 정양 시인의 시 〈토막말〉의 한 구절을 인용해 종이 가득 썼다. 시 속의 ‘정순’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바꿨다. “너 생각나 여기에 왔어. 여기에 오니까 네가 더 생각나… 해연아 보고자퍼서 죽껏다.”

기자명 김창헌 (전라도닷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