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 성공 비결은? 복지와 신자유주의
  • 이종태 기자
  • 호수 174
  • 승인 2011.01.2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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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명예롭게 퇴진한 브라질 ‘좌파’ 대통령 룰라는 ‘정통파 신자유주의자’로 평가된다. 그는 어떻게 빈부 격차를 줄이고, 수출을 늘릴 수 있었을까? DJ·노무현과도 비교되는 룰라의 정책 탐구.
브라질 최초의 ‘노동계급 출신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87% 지지율’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명예롭게 퇴임했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보수 세력은 룰라를 자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마음껏 활용해왔다. 보수 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룰라는 ‘정통 시장경제 해법’으로 성공했다”라고 주장한다. 진보 세력은 룰라로부터 노동자 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발견했다. 다만 룰라가 국유화 등 본격적 좌파 정책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전임자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전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나라를 망쳐놓은 탓으로 보기도 했다. 카르도주가 너무 많은 외채와 재정적자를 남긴 탓에 룰라가 좌파 정책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는 것.

룰라는 전임 대통령 카르도주의 후계자

그러나 경제 정책에 관한 한 룰라는 카르도주의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룰라의 8년 임기는 카르도주의 경제 노선에 반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한 시기였던 것이다.

   
ⓒAP Photo
1월1일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오른쪽)이 지우마 호세프 신임 대통령을 포옹하고 있다.
1995년, 카르도주가 집권한 이 해에 브라질은 ‘남미 외채 위기’(1980년대)의 여파로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 있었다. 1993년 인플레이션율은 3000%에 가까웠다. 좌파 경제학자 출신인 카르도주는 1970년대 종속이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당시 그는 ‘중심부(선진국)의 착취 때문에 주변부 국가인 브라질이 영원히 발전할 수 없으며, 대안은 세계자본주의 체제로부터의 이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통 신자유주의자’로 180도 변신한 카르도주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야말로 화끈한 해법을 동원한다.

예컨대 인플레이션은 브라질의 통화 가치와 금리가 낮고 정부가 많은 돈을 풀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통화가치와 금리를 올리고 재정도 긴축하면 된다고 본 것이다. 카르도주는 브라질 통화인 레알화(BRL) 가치를 달러와 1대1로 고정시켰는데(고정환율제), 이는 레알화 가치를 브라질 경제의 ‘실력’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금리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높였다.

이는 외자 유치 전략이기도 했다. 외국 투자자 처지에서, 브라질 레알화는 비싼 데다 안정적이고(달러 가치에 고정되어 있으므로), 높은 금리까지 보장된다. 이에 더해 카르도주는 외국인이 레알화를 자유롭게 사고팔며 브라질 기업을 거래할 수 있도록 외환·자본 시장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외자만 많이 들어오면 수출 경쟁력 및 국제수지 향상, 첨단기술 및 선진 경영기법 전파 등으로 장기 경제성장이 보장된다고 카르도주는 믿었다. 외자를 성장 동력으로 본 전형적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카르도주의 정책은 실제 효과가 있었다. 브라질 통화인 레알화가 고평가된 덕분에 수입품 가격이 크게 내렸고, 이에 따라 인플레이션율이 두 자릿수에서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시민들의 구매력이 크게 개선되면서 절대빈곤 인구가 일시적으로 900만명이나 줄기도 했다. 그러나 카르도주의 ‘황금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플레이션 퇴치 및 외자 유치의 정책수단(통화 고평가, 고금리, 재정긴축)들이 부메랑이 되어 브라질 경제의 질곡으로 변했다. 예를 들면, 고평가된 레알화는 브라질 수출품의 가격을 올려 신발·의류·자동차 등 국내 산업을 불황에 빠뜨렸다. 고금리는 산업투자를 크게 줄였다. 재정긴축은 내수는 물론 인프라(도로·전기 등 사회 기간시설) 투자까지 위축시키면서 민간 기업의 경영의욕을 꺾었다.

   
브라질 주민들이 빈민 복지정책인 ‘보우사 파밀리아’ 급여를 받기 위해 지역 사무실에 서 있다.
무역흑자 매년 100억~400억 달러 기록

설상가상으로 1997~1998년 동아시아와 러시아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브라질 경제의 성장 동력인 외자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외자를 다시 끌어오려면 금리를 더 올려야 하는데, 이는 국민경제를 더욱 악화시켜 자본 이탈을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터였다. 카르도주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1998년 브라질은 결국 국가부도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카르도주는 1998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등으로부터 400억 달러 구제금융을 받은 뒤 경제 노선을 일부 수정한다. 먼저 달러와 1대1 비율로 레알화 가치를 고정시켰던 정책(고정환율제)을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레알화 가치는 대폭 절하된다. IMF 빚을 갚기 위해 수출을 촉진한다. 브라질 좌파 경제학자 파브리치오 아우구스토는 카르도주의 ‘신노선’을 룰라가 계승해서 더욱 강화했다고 평가한다.

2003년 임기를 시작한 룰라는 카르도주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던 ‘과격한 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브라질을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더 깊고 더 양호하게 편입시키는 길을 선택한다. 룰라는 월스트리트 출신 엔리케 메이렐레스를 중앙은행 총재로 기용하는가 하면, 외환·자본 시장의 개방 및 자유화를 더 심화시켰다. 개인이나 기업이 국내 은행에서 무제한으로 달러를 사서 해외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고,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세율도 크게 낮췄다. 또한 임기 내내 금리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은 10% 내외로 유지했다. 레알화 가치도 1999년 변동환율제 도입으로 크게 떨어진 뒤 줄곧 빠른 속도로 절상되었다. 외자 유치를 위해 국내 산업을 희생시켰던 카르도주 노선이 유연한 형태로 계속된 것이다.

카르도주와 가장 큰 차이는 룰라 임기 동안 수출 실적(과 경상수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 무역흑자는 매년 100억~4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수출 내용은 그리 좋지 않다. 수출품이 주로 농업·광업 등 원자재 부문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 한마디로 레알화 가치는 카르도주 당시에 비해 떨어지고, 2003~2008년의 세계적 호황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에 수출 실적이 개선된 것이다. 이에 반해 중급이나 고급 기술이 필요한 제조업 상품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는, 일종의 ‘탈산업화’ 현상이 진행 중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브라질을 방문해 룰라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가이 버튼 교수(런던 정경대학)는 2000년대 들어 브라질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3.2%로, 같은 브릭스(BRICs) 국가인 중국·인도(7~10%)보다 크게 낮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브라질과 반대로 저금리-통화 저평가 정책을 사용했기에 국내 제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 브라질 경제는 삽시간에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룰라의 임기 8년 동안 2000만여 명이 빈곤층에서 벗어나는 등 빈부 격차가 빠르게 시정된 것은 사실이다. 2006년 재집권 이후에는 4~5%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세계 경제위기에서 가장 빨리 탈출한 나라도 브라질이었다.

버튼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이 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서 ‘경제 자유주의’의 한계를 보완한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가족 수당’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가 있다. 보우사 파밀리아는 정부가 빈곤 가정에 현금을 지급하는 대신 부모가 의무적으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제도다. 어린이 예방접종도 현금 지급의 조건이다. 단기적으로는 음식·의류 등 빈곤층의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어린이들의 학습권과 건강을 보호해서 인적 자본을 육성하겠다는 의도다. 어린이 1인당 22레알(약 1만5000원)을 지급하는데 3인(66레알)까지 지원이 가능하다. 또한 극빈층에게는 월 68레알(약 4만6000원)을 추가 지급한다. 룰라 집권 이전까지 하위 60%가 국민소득의 4%밖에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한 브라질에는 가구당 월소득이 50레알 이하인 지역도 많으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2006년 현재 1200만 가구(4400만명)가 이 제도로 혜택을 받고 있는데, 내수를 늘린다는 면에서 일종의 경제정책이기도 하다.

인프라(사회간접시설) 투자를 크게 늘린 것도 룰라 정부의 공로다. 브라질은 한국과 반대로 인프라가 지나치게 부족한 나라다. 그러나 카르도주 시대에는 재정긴축으로 인프라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룰라는 2007년 ‘경제성장 가속화 프로그램(PAC)’을 개시한다. 4년 동안 교통·에너지·위생·주거 따위 인프라에 5040억 레알(약 337조원)을 투자하는 대규모 개발 계획이다. 이에 따라 룰라 정부는 경제성장률이 매년 1% 정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룰라 집권 2기의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룰라와 노무현, 급진적 신자유주의 개혁 추진

대다수 해외 전문가들은 브라질의 새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역시 룰라와 비슷한 노선을 걸으리라 본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사회정책으로는 복지 강화와 대규모 인프라 투자이다.

룰라에서 호세프로 이어지는 브라질의 정책 기조는 큰 틀에서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선과 비슷하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외환·자본 시장 자유화 및 개방, 무역 자유화(예컨대 한·미 FTA) 등 급진적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복지 강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국내 ‘당파싸움’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보면, 그 공과야 어떻든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화 계보’의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지구적 대세’에 자기 나라를 적응시키기 위해 사용한 정책 수단은 상당히 보편적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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