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눈치 보며 춤추는 검찰의 칼
  • 주진우 기자
  • 호수 173
  • 승인 2011.01.1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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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은 검찰의 기업 사정이 부활한 해였다. 특히 한화그룹·태광그룹 수사에 나선 서부지검의 칼날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현 정권 실세와 관련 있는 기업가들에게는 그 칼날이 한없이 무뎠다.
전직 직원으로부터 차명계좌 다섯 개를 제출받으면서 검찰의 한화 수사는 시작되었다. 지난해 9월16일 한화그룹 본사를 시작으로 검찰은 계열사 10여 곳을 압수수색했다. 김승연 회장 등 그룹 관계자 100여 명을 700여 차례 소환·조사했다. 검찰 수사에는 고강도·전방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검찰은 한화그룹이 위장 계열사 ‘한유통’ ‘웰롭’ ‘부평판지’ 등을 통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하고, 위장 계열사 부채 3500억원을 한화그룹 계열사가 변제한 혐의를 찾아냈다. 또 계열사 한화S&C 주식을 헐값에 김승연 회장의 장남 동관씨(한화그룹 회장실 차장)에게 넘긴 혐의도 밝혀냈다.

그러나 12월1일 한화그룹의 금고지기 홍동옥 여천NCC 사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검찰 수사가 헝클어져버렸다. 2002년부터 그룹 재무팀장을 맡은 홍씨는 차명계좌 348개를 통해 비자금 수천억원을 관리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수사팀은 홍씨를 구속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이 “도주 우려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고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힌 만큼 구속 수사는 어려워 보인다. 수사팀은 12월30일 김승연 회장을 세 번째 소환했지만 수사의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있다. 서부지검의 한 관계자는 “김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판단은 법원에 맡기는 식으로 갈 것 같다. 오너를 세 번이나 부르고 영장을 청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 아니냐”라고 말했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회장과 임원을 계속해서 불러대는 통에 신년 사업계획을 하나도 세우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뉴시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12월15일 서울 서부지검에 두 번째 소환되었다. 김 회장은 “이건 조금 심한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태광그룹 수사도 해를 넘겼다. 서부지검은 지난해 10월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과 모친 이선애 상무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속도를 냈다. 이선애 태광그룹 상무의 은행 대여금고 두 곳을 뒤지기도 했다. 이 회장의 외아들 현준군에 대한 편법 증여 의혹,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 큐릭스 인수를 위한 태광의 정관계 로비 의혹, 청와대 행정관 및 방송통신위원회 성접대 사건, 쌍용화재 인수 관련 특혜 의혹 등 쏟아져 나온 의혹은 산이 되었다.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태광 로비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태광 수사는 게이트급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한화·태광 수사 1월 말께 종결될 듯

검찰의 강한 압박에 태광 측은 불만을 토로했다. 한 태광그룹 관계자는 “검찰이 언론에 회장 얼굴을 팔아 망신을 주었다. 계속되는 압수수색과 참고인 조사로 업무가 마비됐고 내년 사업 구상과 인사가 틀어진 상태다”라고 말했다. 종합편성채널 진출에 사활을 건 태광그룹의 운명을 가른 것도 검찰 수사였다. 한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자금력·투자 의향 등에서 태광은 가장 좋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로 오너가 구속될 수 있다는 점이 태광의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라고 말했다.

태광그룹 수사는 그룹의 2인자 오용일 부회장이 소환된 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권 로비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나온 게 없다. 이 회장에 대한 직접 조사마저 계속 늦춰지고 있는 형편이다. 대검찰청의 한 관계자는 “이호진 회장 혹은 모친 이선애 상무 중 한 명을 구속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정몽구·정의선 부자 중 한 명을 처리했던 현대차 사건의 전례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대기업 비리를 파헤치고 막대한 비자금을 찾아낸 사건인데도 여론은 검찰에 호의적이지 않다. 대다수 언론은 검찰이 무능하고 무리한 수사를 벌인다며 질타하고 있다. 검찰에 불려가며 “이건 조금 심한 것 아니냐”라고 말한 김승연 회장을 두둔하는 기사도 많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금 검찰은 기업 괴롭히기·죽이기 수사를 하고 있다. 한화나 태광이 아무리 비자금을 만들었어도 삼성에 비하면 적은 것 아닌가. 전례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서부지검 남기춘 검사장은 검찰 게시판에 이런 글을 남겼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보다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수사가 더 어려운 것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 기사보다 ‘살아 있는 재벌’에 대한 비판 기사가 더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검찰이 받는 비난은 자초한 부분이 크다는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은 산 권력에는 약하고, 죽은 권력에 가혹한 모습을 보이는 습성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서부지검은 굉장히 열심히 수사하고 있다. 오너를 여러 번 불렀다고 무리한 수사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서울지검에서 정권 실세에 대한 수사가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비해, 서부지검이 정석으로 수사하다 돌을 맞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전직 검찰 고위 관계자는 “검찰의 신뢰 회복이 먼저다. 삼성·효성 수사 등에서 검찰이 보여준 느슨한 태도를 보고 다른 기업들이 검찰의 지적에 승복하려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시사IN 포토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은 계열사인 흥국생명(위는 흥국생명 본관)의 계좌로 비자금을 조직적으로 관리한 의혹이 있다.
지난 12월23일 서울지검 특수1부는 이명박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현 정권 실세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구속 기소했다. 당초 ‘권력형 게이트’로 지목됐던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 연임을 위한 청와대 로비와는 무관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천 회장 개인비리로 마무리한 것이다. 검찰은 천 회장이 참여정부 시절에는 로비에 성공했으나, 현 정권 출범 후에 한 청탁은 모두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쉽게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다. 천 회장은 검찰 수사가 시작된 지난해 8월 도피성 외유에 나섰다가 3개월여 만에 귀국했다. 귀국한 날 바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다가 12월1일 검찰에 출두했고 10여 일 만에 수사가 마무리됐다.

12월24일에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맏아들인 조현준 효성 사장이 회사 돈을 빼돌려 미국의 고가 콘도를 사들인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회사 돈 44억여 원을 빼돌린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의 늑장 수사로 공소시효가 만료돼 면소 판결을 받았다.

12월29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는 신한은행 수사에서 비자금 3억원이 유력 인사에게 전달된 정황을 밝혔지만 그 대상을 밝혀내지 못했다. 권력 실세에게 돈이 건너가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정권 실세와 친분이 두터운 라응찬 전 회장은 204억원 비자금을 보유하고, 회사 돈 2억원을 자신의 변호사 비용으로 사용한 사실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지만 수사 중반에 일찌감치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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