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교수(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와 정승일 정책위원(복지국가소사이어티)은 2005년 〈쾌도난마 한국 경제〉라는 대담집을 낸 바 있다. 신자유주의와 참여정부를 격렬히 비판한 이 책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변에 추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뒤 장하준 교수는 영국에 머물며 연구 활동과 개발도상국 정부 컨설팅 등에 전념하며 〈나쁜 사마리아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책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정승일 위원은 대안연대회의·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 학술·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한국 경제와 복지 문제 등에 천착해왔다.

이 두 사람이 2010년 말 〈시사IN〉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6년 전 사회를 보았던 이종태 기자(당시 〈말〉 편집장)가 다시 진행을 맡았다. 대담은 최근 ‘장하준의 정체’를 폭로한 보수 언론의 칼럼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시사IN 백승기장하준 교수와 정승일 박사.


사회: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가지〉)가 대중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자 보수 성향 신문들이 많이 놀란 모양이다. 최근 ‘장하준, 알고 보니 좌파’라는 식의 칼럼을 쏟아냈다. 어떤 분은 〈…23가지〉를 빗댄 ‘좌파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제목으로 ‘좌파는 기업가를 악당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어떤 분은 당신들(장하준·정승일)의 대담집(〈쾌도난마 한국 경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좌우되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5년이 있었다’고 쓴 적이 있다(모두 유쾌하게 웃음).

정승일:그랬다면 복지 지출을 엄청나게 늘렸을 거고, 한·미 FTA 협상도 없었을 거다.

장하준:기업가는 악당? 이런 이야기 한 적 없다. 그분은 아마 ‘좌파는 반기업, 장하준은 좌파. 그러니 기업가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장 교수는 한국 기업의 성장을 위해 재벌 상속을 용인하자고 주장했다가 진보 진영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제 주류니 비주류니, 좌파니 우파니 이런 이야기는 그만 좀 하면 좋겠다. 내가 장난 비슷하게 하는 말이 ‘스탈린이 보면 다 우파고, 히틀러가 보면 다 좌파’인데, 그거 상대적 개념이다. 한국에서 ‘좌파’니 ‘비주류’니 하는 거는 그냥 욕하고 싶어 그러는 거고, 이젠 신경 안 쓴다.

“기업가는 악당이란 말 한 적 없다”

정승일:사실 우리 정체성은 뚜렷하다.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시장근본주의는 비판한다. 그리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조절된 시장’을 지향한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논의 지형이 문제 아니겠는가. 보수는 대체로 신자유주의자들인데도 (시장 논리를 따르지 않았던) 박정희와 재벌을 옹호한다. 앞뒤가 안 맞는다. 진보도 마찬가지인데, 경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사실상 시장근본주의를 옹호해온 경향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경제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집권한 권력이 시장을 조절하고 시장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장하준:사실 한·미 FTA를 지지하면서 박정희 좋아하면 문제다. 박정희 때는 자유무역이 싫었는데 최근 들어와 갑자기 좋아졌다는 건가. 이런 분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뭔지 모른다. 한·미 FTA 반대한다는 좌파가 시장에 권력 넘겨주는 걸 좋아하고 박수치고 그런 면도 있었다.

사회:〈…23가지〉는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래서 이 책의 대중적 성공을 둘러싸고 ‘한국이 복지 포퓰리즘으로 가는 거 아니냐’며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들도 있다.

정승일:복지를 포퓰리즘이라 말하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이다. 그렇다면 유럽의 수십 개 나라들은 모두 포퓰리즘 국가들이니 일찌감치 망했어야 하지 않나.

 

 

ⓒ청와대제공국내 재벌의 대명사인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왼쪽)과 이건희 삼성 회장.


장하준:포퓰리즘도 어떻게 보면 그냥 욕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낙인만 잘 찍으면 논쟁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나. 복지국가가 정말 그토록 나쁜 제도라면, 스웨덴·핀란드 같은 나라가 미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복지란 것은 원래 우파가 체제를 보전하는 차원에서 시작하고, 좌파가 확대시킨 거다. 이를 좌파 정책 운운하는 것부터 틀렸다. 유치한 색깔 논쟁 수준으로 가는 거다.

사회:어떤 언론인은 포퓰리즘이 여권으로 확산되어 박근혜 의원까지 복지에 물들었다고 불평이 대단하다. 이분에 따르면 박근혜 의원이 장하준 선생과 접촉 중이라던데 사실인가.

장하준:완전히 헛소문이다. 박근혜 의원은 만나본 적도 없다. 이 정당은 좋고, 저 정당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과 별로 접촉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물론 토론회 같은 데서 만난 적은 있으나 단둘이 대면한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 어드바이스하는 종류의 일은 생각도 않고 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것은, 우리가 〈쾌도난마 한국 경제〉에서 사회적 대타협이나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때 많은 분이 웃었다. 한국에 복지국가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른바 우파 진영에 있는 분들마저 복지가 다음 선거의 화두가 될 거라고 하지 않는가.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재벌들, 성장 추동하는 메커니즘 많이 약화

사회:〈쾌도난마 한국 경제〉에서 두 분은 해외 투기자본으로부터 ‘대기업 집단의 경영권 안정’을 강조했는데, 이 논리가 ‘재벌 옹호’로 비쳐져서 많은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제 자본을 대변하는 유력 투자자들이 한국 대기업들의 기업 지배구조가 불투명하다고 비판했는데, 요즘엔 비판 안 한다. 지금도 재벌 가문이 적은 지분으로 산하 계열사들을 꽉 쥐고 있는데도 말이다.

정승일:예전의 한국 대기업들은 주가와 배당금에 크게 신경 안 쓰고 장기 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글로벌 펀드 입장에서는 돈을 벌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래서 ‘한국 재벌 나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거다.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들도 주가 올리느라 정신없고 배당금도 많이 준다. 더욱이 한국 주식에 투자하면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으니, 글로벌 펀드들이 더 이상 재벌의 지배구조에 관심이 없어진 거다.

장하준:재벌들이 주주자본주의(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기업 경영 관행과 시스템을 의미) 논리에 많이 순응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을 안 한다. 과거에 비해 배당 많이 주고 자사주 매입(기업이 자기 회사 주식을 사들여 폐기하는 행위. 총 주식 수가 줄어들면서 주가가 오른다. 주주에게는 이롭지만, 그만큼 잠재적 투자와 고용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도 많이 하니 불평할 이유가 없다. 재벌들 자신도 금융자본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재벌들의 금융자본화라니? 무슨 뜻인가.

장하준:제조업을 귀찮아하면서 금융 산업으로 진출하는 거다. 동부·동원·동양 등 비교적 작은 재벌 중 일부가 금융 그룹으로 크겠다고 하고, 심지어 삼성도 그룹을 전자 부문과 금융 부문으로 쪼개서 먹고살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투자 않고 배당 많이 하면서 기업 스스로를 갉아먹는 주주자본주의 논리가 침투되면, 점점 더 제조업을 멀리하고 ‘금융해서 쉽게 돈 벌자’가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경제에서 성장 엔진이 사라지는 거다.

 

 

 

 

 

ⓒ시사IN 조남진현대차 울산공장 노동자들이 지난 11월23일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회:한국 재벌 대기업들에게 장점이 있다면 적극적 투자와 진취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재벌들에게 그나마 후한 평가를 했던 거다. 이런 긍정적 측면들이 사라졌다고 보는가.

정승일: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서비스업보다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해왔고, 일부 제조업 부문에서 아직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문제는 재벌들이 과거에 비해 성장을 추동하는 메커니즘이 많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재벌 3세라고 하는, 새로 등장하는 경영진들에게는 장기 플랜을 세우고 밀고 나가는 능력도 없어 보인다. 이들이 서비스업에나 진출하려고 하니 문제가 커진다.

장하준:관심 있는 사업이 금융업 아니면 음식물, 유통업….

정승일:방송. 그래서 미디어 장악하려 하고, 각종 관련 규제나 풀어달라고 하고…. 

장하준:묶어서 서비스업이다.

정승일:문제는 금융 등 서비스업으로는 전체 국민경제가 발전하기 힘들다는 거다. 서비스업은 대부분 수출이 아니라 국내에서 경쟁해야 하지 않나. 세계시장에서 경쟁(수출)해야 하는 제조업은 기술혁신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경쟁하는 서비스업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은 규제 완화와 로비다. 그래서 기업들이 기술혁신보다는 정경 유착으로 기울기 쉽다. 최근 터진 태광산업 로비사건이라든가, 건설 비리 등이 징후다. 이명박 정부가 그쪽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장하준:더 크게 보면 그동안 금융 허브론자들이 이야기해온 금융 혁신, 선진 금융기법, 금융업 생산성 향상 등도 사실은 규제 완화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이른바 통화주의 화폐 정책의 대부라는 폴 볼커(FRB 전 의장) 같은 사람이 “지난 50년 동안의 금융 혁신 중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것은 현금 자동인출기밖에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좌파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금융의 핵심 중 핵심 인물이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은행이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그것은 기술혁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규제 완화에 따른 거다. 더욱이 서비스업은 제조업과 달리 생산성 올리기가 굉장히 힘들다.

금융위기에 살아남은 나라들의 공통점

정승일:더욱이 서비스업은 많은 경우 노동생산성이 떨어져야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가장 대표적 서비스업인 레저산업의 경우, 스키 강사나 안전요원, 엔터테이너가 많아져야 소비자들이 서비스의 질을 느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과정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창출된다.

장하준:이른바 서비스업 생산성 향상이라는 것은 서비스업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가기 쉽다. 극명한 사례가 바로 미국과 영국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가게에 종업원이 없다. 구두 한 켤레 사려면 고객이 차례표를  뽑은 뒤 20~30분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구두는 좀 싸게 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기다린 시간을 감안하면, 결국 (종업원 고용) 비용을 소비자가 다 부담한 거니까 구두가 싼 게 아니다.

사회:‘통큰치킨’은 어떻게 봐야 하나. 최근 대기업이 동네 치킨집의 2분의 1 내지 3분의 1 가격에 통닭을 공급한다고 해서 시끄러웠다.

장하준:물론 (시장 논리로 보면) 롯데가 통닭을 싼값에 팔아서 소비자들이 이익을 보는 대신 주변 소자영업자들이 모두 망하는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일본 같은 나라는 규제로 소농이나 소상인을 보호해서 사회 평등을 유지한 바 있다. 사회주의와 체제 경쟁을 해야 하는데 남미처럼 불평등해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대형 유통업체가 어떤 지역에 들어가려면 그 지역 소자영업자들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대점포법이 있었다.

사회:소비자 선택권 문제는 어떻게 되나. 왜 소비자들이 손해를 봐야 하느냐는 거다.

장하준:소비자 선택권으로 보면 오히려 대점포법을 실시한 일본이 훨씬 우수하다.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도 똑같은 가게에서 나온 체인점 음식을 사먹어야 하지만, 일본에는 몇 대째 내려오는 수공업적인 가게들이 굉장히 많다. 가격은 어쩔 수 없다. 소비자가 그런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데, 해당 가게에서 장인 정신을 가지고 만든 음식을 먹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자기 돈만 아까워하고 남의 노력은 아까워하지 않는가. 소비자들이 싸게 먹을 수 있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소자영업자들의 생계가 파괴된다면, 국가는 이에 대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기업 구조조정이나 일부 소자영업종의 몰락 때마다 보상 문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경쟁과 구조조정 때문에 어떤 사람은 얻고 어떤 사람은 잃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보장되고 일정하게 재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 그래서 복지국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 문제에 대한 ‘일괄 타결 국가’인 거다.

 

 

 

ⓒXinhua마이크로 파이낸스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무하마드 유누스.


사회:결국 두 분은 여전히 한국이 제조업 강국의 길로 가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장하준:이번 위기에 상대적으로 덜 영향받은 나라들은 모두 제조업 강국이다. 금융 허브 한다며 들떴던 중소국들은 크게 당했다. 아이슬란드·아일랜드·라트비아·두바이…. 한국도 리먼브러더스를 샀다면 이 대열에 들어갔을 거다. 금융 주도 경제를 운영하면서 탈산업화한다던 영국·미국도 큰 타격을 입었다. 누누이 이야기해왔지만, 경제성장의 궁극적 동력은 기술혁신과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다. 그리고 생산성 향상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부문이 바로 제조업이다. 서비스업은 생산성 향상이 어려울 뿐 아니라 국제 교역도 힘들어, 서비스업에 치중하다보면 국제수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3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하며 금융산업 기반을 만든 영국도 서비스 부문 흑자로 제조 부문 적자를 겨우 메우는 수준이다. 미국도 서비스 교역 부문의 흑자가 GDP 대비 1% 정도인데, 제조업 부문의 적자는 4%다. 나머지 3%는 빚으로 메우고 있다. 한국이 의료산업 수출로 돈 벌겠다며 이를 위해 ‘의료 상업화’를 운운하지만, 사실 이 부문에서 벌 수 있는 돈은 규모 자체가 매우 작다.

정승일:의료 상업화로 벌 수 있는 돈보다, 이 때문에 국민건강보험 체계가 붕괴되면서 국민들의 삶이 악화되는 불이익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미 FTA로 규제를 완화해 서비스업을 발전시키겠다고 한다. 서비스업으로 내수시장도 키우겠다고 한다(서비스업을 발전시키려면 규제를 완화해 이 부문에서 돈을 벌 수 있게 해야 하고, 그래야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져 일자리가 창출되고 내수가 커진다는 논리. 의료 상업화 혹은 건강보험 민영화 논쟁이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복지 부문의 공공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방법이 내수시장을 키우는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의 보험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민간보험 가입자가 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짙게 느낀다는 증거다. 더욱이 소득이 별로 늘지 않는 서민들까지 점점 더 많은 소득을 민간 보험사에 납부해야 하고 이로 인해 국내 소비가 줄면서 내수시장이 위축된다. 민간 보험이 아니라 국가 복지가 발전한다면, 역으로 국내 소비가 늘면서 내수시장이 활성화되어 국민경제가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사회:대기업 이야기를 하다가 서비스업 이야기로 빠졌으니 다시 돌아가겠다. 〈쾌도난마 한국 경제〉에서 ‘재벌과 사회의 대타협’을 주장한 바 있는데 지금 생각은 어떤가.

정승일:논의 지형이 많이 바뀌었다. 당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재벌들이 열심히 투자하고, 이를 통해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재벌 경영권을 보장하는 대신 이들이 더 많은 세금과 장기 투자를 책임지도록 해서 국민들 삶의 질을 높이자고 했다.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가 타협이었고, 당시 비교적 진보 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회적 대타협론’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명박 정부하에서 재벌들은 사회적 대타협 같은 거 안 해도 정부가 재벌들의 경영권을 알아서 보장해준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으로는 청년 실업 등 총체적인 삶의 불안정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제는 수단에 불과한 사회적 대타협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인 총체적 국가 비전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서구 재벌 3·4세들, 경영 개입 안 해

장하준:그때 재벌들에게는 큰 약점이 있었다. 해외 자본(사모펀드 등)들이 재벌들의 소유 지배권을 위협하거나, 심지어 뒤흔들기만 해도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재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환경에 적응했다. 심지어 재벌들도 금융적 편법을 많이 사용하고, 이런 편법이 들통 나는 경우, 부친이 법적 처벌을 감수하면서도 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로 기틀을 확보해 마음을 놓고 있는 것 같다. 더욱이 국제 금융시장도 그때만큼 한국을 딱 찍어 공략하려는 분위기는 아니다. 또한 현대차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재벌 그룹들은 자사의 제조업에 대한 애착보다 ‘적당히 금융해서 먹고살자’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것 같다. 이렇게 재벌들에게 아쉬웠던 시절이 지나갔으니 아마 타협 따위는 하려 들지 않을 거다. 하지만 대타협이라는 정신 자체는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마침 3세 상속 이야기를 하셨다.

정승일:서구나 일본의 경우는 3, 4세가 넘어가면서 오너 패밀리가 사실상 일상적 경영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서 이사회 명부에 이름만 남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도 지분 확보는 되니까 넓은 의미의 경영권, 즉 기업 통제권(corporate control)은 행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재벌 3, 4세들이 직접 일상적 경영 결정까지 주도하려 드니 기업들 안팎에서 큰 우려가 제기된다. 경영권 상속의 공정성 여부 등 윤리적 문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과 실적이다. 왜 아랫사람들에게는 이른바 ‘능력주의’ ‘실적주의’를 요구하면서, 오너 패밀리에게는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가?

 

 

 

 

ⓒAP Photo클린턴(왼쪽), 블레어(오른쪽) 노선의 철학은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장하준:삼성 등 대기업 집단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업들이다. 그래서 누가 이런 기업 집단을 지휘하느냐는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동네 가게라면 둘째 자식이든 셋째 자식이든 누구에게 줘도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기업의 상속은 국가 운이 달린 상속이다. 사회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충분한 거다. “왜 우리 집안일인데 너희가 간섭하느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아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게 재벌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 나라가 지금 부모 때문에 잘되고 잘못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정승일:3세 경영 혹은 재벌 경영의 진짜 문제는, 재벌 가문이 산하 계열사 전체를 사실상 지배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삼성의 전략기획실이 부활했고, 앞으로는 3세가 이를 통해 그룹 계열사들 모두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략기획실은 법률(회사법)적으로 규정된 조직이 아니며, 이에 따라 법률적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3세와 전략기획실의) 법률적 책임을 분명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그래야 재벌 후계자들이 쓸데없이 계열사에 개입한다거나 무분별한 경영을 안 하게 된다. 책임질 자신이 없으면 경영 일선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벨기에의 로젠블룸(Rosenblum) 판례법이 좋은 사례다. 벨기에도 대기업의 90% 정도가 기업 그룹 계열사다. 이런 기업 집단의 최상층에는 거대한 순수지주회사(다른 기업들의 지분을 갖고 지배할 목적으로 설립되는 회사)가 있다. 그리고 이 순수지주회사는 금융감독 기구의 감독을 받는다. 즉, 벨기에의 금융감독 당국은 대기업 그룹의 ‘전략기획실’이랄 수 있는 순수지주회사에게 분기별로 전체 그룹의 재무 및 경영 상황을 보고받고, 사장 등 이사 선임을 할 때 거부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감독 당국 뒤에는 국회가 있다. 우리도 재벌 후계자 문제를 가지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모색해야 한다.

사회:주제를 바꾸겠다. 정승일 박사가 계신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2010년 ‘보편적 복지’라는 화두를 던졌다. 무상급식 운동과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도 활발히 벌어졌고.

‘가난한 사람들만의 복지’는 지속 어려워

정승일:보편적 복지의 정신은, 갑부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시민이 복지를 기본적 인권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 특히 발달했다. 현대적 인권 개념에는 부합하지만, 비용이 조금 더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조세 및 재정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반대자들은 ‘돈이 없어서 굶는 아이들만 도와주면 되는 거지 왜 갑부 아들까지 지원해야 하나’라며 비판한다.

장하준: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용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들이 무상급식 받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낙인효과도 비용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이 이런 일로 받는 상처는 의외로 크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강에 온갖 토목공사 할 돈은 있다면서, 애들 가슴에 멍들게 하는 데 앞장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정승일:사회공동체의 신뢰가 깨지는 것도 경제학적으로는 큰 비용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애들 급식비는 줄이면서 오페라하우스 등 한강 예술섬 사업에는 수천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고 한다. 지금 배고픈 아이들은 나중에 자라서도 그 오페라하우스를 이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하우스로 상징되는 부유층에 대한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할 것이다. 미래의 사회적 갈등 비용이 엄청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비용은 왜 계상하지 않는가?

장하준:보편적 복지를 해야 하는 다른 이유도 있다. 물론 완벽한 보편적 복지를 실시하긴 힘들지만, 상당수 국가가 어떻게든 보편적 복지를 많은 부문에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가 의료·음식 등 인간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보장해줘야 하며, 이는 ‘인간의 권리’라는 정치·사회적 신념을 일상화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해야 정책에 정당성이나 지속 가능성이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복지 혜택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하면 복지는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못난 사람이 받는 것’이란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에서 복지가 인기 없는 이유가 뭐냐.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 혜택 받는 선별적 복지이기 때문에, 부자들이 ‘왜 우리가 세금 내서 보기 싫은 가난한 흑인들 돈 대줘야 하는 거야’라고 여론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결국 보편적 복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재정과 증세 아닌가.

정승일:섣부른 증세는 시민 반발만 일으킬 것이다. 자신이 내는 세금이 자신을 위해 사용되며, 자기 삶의 개선에 쓰인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험과 경험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첫 단계에는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과 대기업에만 증세하되 대다수 국민에게 획기적인 복지 혜택을 늘려야 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에게 복지국가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체험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증세가 나에게도 유리하다’는 신뢰가 차츰차츰 확산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좀 더 넓은 소득계층으로 세수 기반을 늘려나갈 수 있다.

사회:그러나 심지어 진보·개혁 진영 일각에서도 보편적 복지를 비판하는 분들이 있다.

정승일:복지국가보다 ‘공정성’이라는 가치의 확립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다. 경쟁에서 반칙하지 않고 절차를 어기지 않고 제대로 된 질서를 지키는 절차적 공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복지국가란 절차적 공정성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공정성, 적극적인 공정성을 실현하자는 거다.

장하준:기본적으로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때 절차적 공정성은 당연히 이뤄야 하는 것으로 전제된 것이 아닐까. 공정성과 복지를 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전제하고, ‘이것도 안 됐는데 왜 복지냐?’ 하는 이분법은 정말 곤란하다. 그리고 절차적 공정성만으로는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 내가 〈…23가지〉에서 그런 비유를 썼다. 달리기할 때 누구는 앞에서 누구는 뒤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똑같은 조건에서 뛰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논리(절차적 공정)다. 그러나 똑같이 뛰긴 뛰었는데 어떤 사람은 다리가 하나고, 다른 사람은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다고 치자. 여기서 1등했다고 정말 잘난 사람인가. 그러니까 경쟁을 할 수 있는 기본적 조건, 즉 부모의 소득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한다는 거다. 어느 정도 최소 수준이 보장되지 않으면 경쟁도 불가능하다.

사회:영국 노동당의 블레어 정부가 절차적 공정성을 강하게 주장한 바 있다. 영국은 어땠나.

장하준:블레어 정부의 복지 노선은 규제 완화로 부자들 돈 많이 벌게 해주고, 그 대신 세금을 걷어 어린이들 탁아 시설, 가난한 동네의 학교 등에 투자해서 기회 균등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겠다는 것이다. 예컨대 달리기하는데 어떤 애는 다리가 하나고 어떤 애는 다리가 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다리 하나인 애한테 의족을 달아주는 등 지원해준다는 거다. 하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조건을 누릴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집안 살림이 불안하니까 공부할 의욕도 없고 부모들이 공부를 도와줄 수도 없다.

정승일:영국 노동당 정부도 노무현 정부처럼 금융자본주의를 추진했다. 증세는커녕 부자 감세로 빈부격차를 더 심화시켰다. 이에 더해 과거에 대거 확보했던 공동 임대주택을 민간에 매각하는 등 주거복지 혜택도 많이 없앴다. 주거 불안, 임대료 상승, 부모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노동시장 불안정…. 토니 블레어는 이런 상황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기회의 평등’이라는 슬로건으로 육아와 교육에 ‘올인’했다.

장하준:그런 사회불안의 원인 중 하나가 블레어 정부의 금융자본주의 정책이었다. 말하자면 한쪽에선 문제를 양산하면서 이를 완화시킨다고 반창고를 붙인 거다.

정승일:미국의 클린턴이랑 오바마도 똑같다.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의 경제 장관들은 월스트리트 쪽 사람들이다. 월가 금융자본주의의 최종 결과인 흑인 등 저소득층의 빈곤화 문제는 도외시한 채 오직 공교육 약화만 고민하면서 이쪽 예산만 늘리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기회의 평등만 보장하면 된다’는 건 이른바 자유주의 논리이다. 자유시장은 누구나 다 공평하게 들어와 경쟁하는 공정한 체제인데, 다만 ‘어린이 교육’의 공평성은 보장 못하니까 교육에 관한 한 정부가 개입해서 모두가 무상교육을 받게 하자는 식이다. 문제는 무상교육만 이야기하고 주거보장, 소득보장, 노후보장 등의 문제는 나 몰라라 하는 데 있다.

국내 자영업 지원금이 문제인 까닭

장하준:진짜 자유주의자들은 그런 이야기도 안 한다. 프리드먼 같은 사람은 부모들이 열심히 돈 벌어서 비싼 학교에 애들을 보내서 공부 잘하면, 이런 현상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잘나가는 사람들 발목 잡는 거란다. 오바마와 블레어는 그래도 양반이다.

사회:그러나 기존의 후한 복지제도에 시민들이 의존해서 근로 의욕이 약해졌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지 않나? 클린턴·블레어 노선의 철학은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자활 의지’를 강조하는 정책을 펴는데, 그 사례 중 하나로 마이크로 파이낸스가 있다. 빈곤층의 ‘개인’들에게 소액의 창업자금을 빌려줘서 자활시키는 아이디어다.

장하준:크로아티아의 경우 마이크로 파이낸스로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줬다. 정부가 지원하니까 낮은 이자가 가능했다. 농민들이 소를 한 마리 더 사서 우유를 생산해서 팔았고 돈도 벌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이크로 파이낸스가 확장되고, 모든 농민이 소를 더 사고 우유를 더 생산하다보니 우유값이 폭락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이 빚만 더 지게 된 사태가 있었다. 캄보디아에도 마이크로 파이낸스가 많이 퍼져 있는데 길에서 국수 파는 사람이 국수 사 먹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농담이 생길 정도다. 처음 몇 명은 성공하지만 나중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아져 생계 유지가 안 된다. 물론 개인은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에게 맡기면 해결된다’는 철학 자체가 이데올로기이고, 이념적 접근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집단 혹은 집단에 축적된 지식과 사회적 제도도 매우 중요한 거다. 개인과 집단의 능력을 함께 키워줘야 한다. 그래서 덴마크·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은 개인이 아니라 협동조합 같은 곳을 지원한다.

정승일:한국에도 마이크로 파이낸스가 있지만 정부가 주는 자영업 지원금이 많다. 서울신용보증재단 등 지역 신용보증재단을 통해 나가는 융자보증 지원금이 1년에 수조원이다. 피자집, 미장원 등 차리는 데 1000만~5000만원을 지원한다. 이 자금이 외환위기 이후 크게 늘었는데, 부도율이 30%가 넘어 심각한 상태이다. 더구나 매년 수만명에 이르는 창업 자영업자에게 자금을 뿌리다보니 심사도 제대로 안 한다. 이런 돈은 창업하라고 빌려주기보다 차라리 그냥 생계비 지원금으로 무상으로 주는 것이 낫다. 이런 융자자금 받아 음식점, 미용실을 차리니 이런 업체들이 더 많아져서 장사가 더 안 된다. 신용불량자만 더욱 양산하고 있다 .

장하준:‘마이크로 파이낸스 같은 제도가 있는데도 가난하다면 본인의 책임’이라는 식의 논리가 성행할 수도 있다.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마이크로 파이낸스를 실시하는 대신 복지예산을 삭감해버린다. 좋은 제도지만, 정부가 기본 책임을 방기하게 하는 핑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승일:조금 전에 덴마크 협동조합 이야기를 하셨는데,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유기농 협동조합 등을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협동조합은 그 안에 축적된 능력과 제도가 있고, 규모의 경제도 있다. 나름 생산량을 조절해서 과잉 생산으로 인한 가격 폭락을 막을 수 있고 브랜드 파워를 가져 시장 경쟁력도 발휘할 수 있다.

장하준:가족을 위해 과감한 아이디어로 창업하고 열심히 일하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한 나라일수록 많다. 그런데도 빈곤을 극복하기 힘든 이유는 개인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협동과 조직이 안 되는 것이 원인이다. 그러므로 개인만 돕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조직적 협동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사회:내년 경제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

장하준:불확실한 요인이 너무 많아서 예측하기 힘들다. 미국 상업용 부동산 거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경제위기 본격화 여부 등이 중요한 문제다. 또 지켜봐야 할 문제는, 지금 선진국에서 금리 낮추고 돈 풀면서, 그 돈이 투기성 자본으로 한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엄청나게 유입되고 있다.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국경 간 자본 이동을 한없이 옹호하던) IMF마저 최근에는 ‘자본 통제’하라고 권할 정도이다. 지금 우리나라 주가지수가 2000까지 오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 선진국의 돈이 넘어온 것이다. 이렇게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자산 버블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 등이 유입되는 외자에 세금을 매기는 등 자본 통제에 나선 것이다.

사회: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들이 개선되지 않았다고 보는 건가.

장하준:그렇다. 거품이 한쪽에서 꺼진 대신 다른 쪽에서 부풀어오르고 있는 거다. 각국 정부들은 근본적 해결을 피하고, 금융기관에 돈을 푸는 식으로 문제를 덮었다. 그런데 이 돈이 그 나라의 중소기업 등 생산적 부문에 투자되어 일자리를 늘리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고, 더 높은 이윤을 찾아 개도국으로 몰리며 새로운 거품을 만들고 있다.

정승일:전 세계 선진국들에서 내수는 별로 창출되지 않고 있고, 금융시장 불안은 현재진행형이며 금융 버블도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각국 정부는 규제 강화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고 복지재정 지출 확대로 내수시장을 키워야 했다. 요즘은 거꾸로 가고 있다. 재정 적자를 핑계로 복지 지출을 줄여 내수가 줄어드니, 수출만 늘리려고 한다. 수출 확대를 위해 자국 통화가치를 경쟁적으로 낮추려는 환율 전쟁이 일어난다. 그나마 국가 개입주의가 강한 중국·인도·브라질 같은 나라의 내수시장은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지역으로의 수출이 늘어나 글로벌 경제 침체가 완화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여전히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을 보면 2011년 경제는 매우 불안하다. 각국 정부들, 특히 선진국 정부들이 부자 증세에 나서야 하며, 동시에 재정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복지 지출을 늘려 내수를 확장해야 한다. 동시에 소득 재분배를 통해 내수시장이 대폭 회복되는 것이 글로벌 경제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의 경우, 비정규직 처우를 크게 개선하고, 복지국가 체제를 대폭 확충하는 것 외에는 날로 악화되는 수출과 내수 간의 갭(gap)을 메울 방법이 없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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