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즈의 대모’ 박성연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50년 넘게 노래를 불렀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부를 수 있을까 매일 연구하는 사람. 노래하는 게 너무 좋아서, 계속 노래하고 싶어서 박씨가 직접 차린 재즈클럽 ‘야누스’가 문을 연 지도 어느덧 32년이 흘렀다. 야누스는 시작의 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카페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세월 따라 몸도 많이 쇠약해졌다. 다리가 불편한 듯 조심조심 걸었지만 무대에 서는 순간 마법처럼 말짱해진다. 관객을 압도하는 목소리에 숨죽이고 있던 손님들은 박씨의 노래가 끝나는 순간 함성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것은 곧 한국 재즈의 역사다.

박씨는 최근 1세대 재즈 뮤지션 중 한 사람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에 출연했다. 재즈평론가 남무성씨가 연출한 이 영화는 1년여에 걸쳐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앞니가 빠져 트럼펫을 더 이상 불 수 없게 되자 후배에게 자신의 트럼펫을 물려주고 고향으로 내려간 강대관, “거장이 아니라, 거지다. 그렇지만 부자가 부럽지 않다”라는 퍼커션의 류복성, 그리고 이판근·조상국·이동기·김수열…. 한국 재즈의 역사가 스크린에 오롯이 담겼다.

그러나 1시간30분 남짓한 영화가 다 담지 못한 이야기도 남아 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재즈 가수 말로가 야누스를 찾았다.

ⓒ시사IN 안희태

ⓒ시사IN 안희태재즈 가수 말로는 "영화 속에서 외롭고 괴로울 때면 난 블루스를 더 잘 부르게 될 거야 하고 생각하는 박성연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다.
말로
(말):영화를 봤는데, 선생님들 음악에 대한 철학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간하면 잘 안 나오는 깊은 얘기들이더라.

박성연(박):며칠 전에 이판근 선생님(재즈 연구가)을 만났는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걸 빠뜨렸다”라고 말하시더라. 야누스가 32년 동안 정기공연을 300회 가까이 했는데, 그건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라고. 우리들 정기연주회 하는 동안 밖에서 최루탄이 막 터져도 모르고 노래하고 그랬다. 한국에서 재즈 하는 사람치고 야누스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영화 속에서 “외롭고 괴로울 때면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난 블루스를 더 잘 부르게 되겠구나”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나이트클럽이나 이런 데서 내가 하고 싶은 재즈를 부르면 웬만하면 잘렸다. 그러다보니 설 무대가 없었고, 재즈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속으로 말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자유롭게 재즈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을 위해서 야누스도 냈다고 들었다.

:1978년 신촌에 처음 열었는데 내 방에 있던 악기고 뭐고 다 들고 왔다. 야누스를 차려놓았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혼자 노래를 부른다(웃음). 간혹 술 마시는 손님이 행패를 부릴 때도 있었고, 별일 다 있었다. 사람 모아서 정기 공연 하려고 어떤 때는 전화를 하루에 60통씩 하기도 했다. 내 돈 들여 팸플릿 찍고, 우편으로 붙이고…. 힘들었는데 정말 신나서 했다.

:신촌 시절 이후에 혜화동을 거쳐 서초동 교대 근처에 자리 잡기까지 모두 다섯 번 이사를 했다. 운영의 어려움은 없나. 사실 우리 같은 보컬에게는 야누스처럼 매일 설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다.

:가끔 자신이 없어질 때도 있다. 가족들은 모두 이제 그만두라고 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걸 안 하면 병원 가는 거밖에 더 있겠나? 그랬다가는 정말 얼마 못 살 것 같더라. 그리고 나는 수요일이면 말로를 만난다, 이런 기대가 있거든(말로는 매주 수요일 야누스 무대에 선다). 젊은 사람들의 음악을 들어보고, 그리고 나도 또 그들하고 함께 노래하고. 그런 게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준다.

:내가 처음 재즈를 공부할 때가 1990년대 초인데, 그때도 악보가 없어서 고생했다. 그런데 1세대 선생님들은 얼마나 고생하셨겠나.

ⓒ시사IN 안희태50년 넘게 노래를 부른 박성연씨는 "발성을 터득한 건 채 10년이 안 되었다. 무대에 서려고 여전히 매일 연습한다"라고 말했다.
:공부할 데도, 물어볼 데도 없고, 참 갑갑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다 손으로 일일이 채보해서 악보를 만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괜찮지. 그리고 좀 고생스러워도 악보를 따면서 또 공부를 하게 된다. 요새 친구들은 그런 걸 귀찮게 여기는 거 같지만.

:어쩌다 재즈를 하게 되셨나.

:처음엔 재즈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들었다. 오빠가 미8군 PX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나한테 라디오 하나를 갖다 줬다. AFKN, 거기서 나오는 노래들이 그렇게 좋더라. 그렇게 듣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미8군 무대에서 오디션을 보게 됐다. 합격했는데, 여기는 3개월에 한 번씩 오디션 비슷하게 봐서 무대 레퍼토리를 바꾼다. 음악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뒤늦게 작곡과에 입학했다.

:선생님이 직접 쓴 ‘물안개’가 참 좋다. 목소리 톤이 소복하다고 해야 하나.

:작곡한 건 그거 말고도 여러 개 있다(웃음). 하루에 하나씩 작곡하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는데, 참 엉망이었다. 지금은 다 버렸다.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목소리는 관계 없는 거 같다. 50년 가까이 노래했지만 내가 발성을 터득한 건 채 10년이 안 되었다. 무대에 서려고 여전히 매일 연습한다.

:평생 재즈에 인생을 걸었다는 것, 그게 후배들한테는 위안이 많이 된다.

:나는 음악에 인생을 걸지 않았다. 음악이 나한테 인생을 주었고, 나를 살게 만들어줬다. 그러니까 고맙다. 가끔 나보고 무대에서 죽으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한테는 그게 덕담이다.

:저도 무대에서 죽고 싶다(웃음).

:나는 폼생폼사다. 집 앞 슈퍼에 나가도 반소매나 슬리퍼 차림으로 가본 적이 없다. 늘 예쁘게 꾸미지만, 그래도 제일 예쁜 때는 내가 무대에 설 때니까… 무대에서 죽고 싶다.

:선생님을 보면 선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재즈를 지키려는.

:나는 재즈를 지키려고 했던 적이 없다. 무슨 특별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재즈를 사랑하는 거다. 살면서 이것만큼 좋은 게 없었으니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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