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에게 정치적 ‘독약’이 될지도 모를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최상위 부유층 2%에 대한 감세를 철폐하겠다는 공약을 과감히 내던지고 공화당과 손잡은 것이다. 부유층 감세 철폐는 겨우 2년 전 대선 유세 당시 오바마의 핵심 선거공약이었다.

오바마의 이 같은 충격적인 ‘변절’을 놓고 우군인 범민주계에서는 분노와 배신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의 대항마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벌써부터 유력한 민주당 인사들 사이에 흘러나올 정도다. 범민주계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에 대패한 직후에도 오바마는 부유층의 감세 문제에 대해서만은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이것이 고작 한 달여 만에 식언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공화당과의 타협이 중산층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라며 변명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민주당 사람은 별로 없다. 반면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경기 부양안과 의료보험 개혁안 등 핵심 국내 현안을 놓고 행정부와 날카롭게 대치하던 공화당은 국정 주도권을 쥐었다며 의기양양하다.  

ⓒAP Photo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은 오바마 대통령(왼쪽)의 감세 연장 타협안을 지지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과 이번에 합의한 감세안은 전임 부시 행정부의 유산으로 올 연말에 시효가 만료될 운명이었다. 연장하지 않을 경우 모든 소득 계층의 세금이 내년부터 껑충 뛸 수밖에 없어 오바마로서도 공화당과 어떤 식으로든 타협안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특히 그가 최상위 부유층에 대한 감세 철폐에 반대한다는 공화당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만일 타협이 안 돼 감세안의 시효가 이달 말로 만료될 경우 결국 최상위층 때문에 중산층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고, 이는 2012년 대선 때 자신의 재선 가도에 ‘정치적 핵폭탄’이 돼 날아올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우군인 민주당의 따가운 비판을 의식하면서도 “감세안에 중산층이 볼모로 잡혀 피해를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면서 타협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오바마의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 민주당 인사는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과 끝까지 맞서보지도 못한 채 백기를 들었다며 분개한다. 만일 오바마가 중간선거 이전에 상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의 힘을 업고 원안대로 감세안을 밀어붙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특히 최상위 부유층의 전유물인 상속세를 전혀 건드리지 못한 것이 민주당 인사들을 가장 분노하게 만들었다. 오바마 감세안에 따르면, 최상위 부유층은 상속액이 100만 달러를 넘을 경우 55%에 이르는 세금을 낼 판이었다.

그러나 오바마가 입장을 바꾼 이후 상속세는 기존 감세안에 따라 상속액이 500만 달러 이상일 때에만 적용하게 되었으며, 세금도 35%에 불과하다. 또 오바마의 애초 감세안에 따르면 연 수입이 56만4000달러 이상인 최상위 1%는 1년에 고작 2만8000달러 감세 혜택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의 입장 변화 이후 이들은 기존 감세안에 따라 종전처럼 7만 달러까지 감세 혜택을 받게 됐다. 최상위 부유층이 증권 투자 등으로 벌어들인 돈에 매기는 자본이득세도 중산층 세율보다 훨씬 낮은 15%에 머무를 전망이다.

ⓒGetty Images‘부자 감세’에 반대하는 뉴욕 시민들이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바마 대체할 대항마까지 공개 거론

이번 감세안에는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9%가 넘는 고실업률로 고생하는 실업자를 위해 570억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 혜택이 연장되고, 중산층의 감세 혜택분도 약 210억 달러에 달한다. 결과적으로 감세 혜택이 늘어나면서 앞으로 2년간 약 9000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적자가 발생하지만,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를 일종의 ‘경기부양책’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감세안이 분명 긍정적 효과가 있는데도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과 타협의 길을 택한 것을 놓고 현재 우군인 범민주계는 찬반 양론으로 엇갈려 있다. 한쪽에서는 남은 2년간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타협이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고위 관리를 지냈고 현재 온건 민주당 옹호 단체인 ‘제3의 길’의 매트 베넷 부회장은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번 타협은 오바마 대통령이 나머지 재임 2년간 진전하기 위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일련의 고통스러운 타협 가운데 첫 번째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불가피론은 현 단계에서는 소수이며 오히려 현재의 정서는 분노와 배신감이 더 강하다. 친민주당 단체인 ‘미국 진보민주당원’의 노먼  솔로몬 회장은 “이처럼 중대한 세금 문제와 관련해 공화당 손을 들어줌으로써 오바마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진보의 기반에 상당한 피해를 끼쳤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바마가 이번 일이 자신의 재선 전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라고  질타했다.

범민주계에 영향력이 있는 논객들이 공화당과의 타협 건을 계기로 오바마의 대항마론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유대계 잡지인 ‘티쿤’의 마이클 러너 편집장은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기고문에서 “다가올 민주당 대선 예비선거는 오바마의 좌향좌를 강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목청을 높였다. 오바마가 이를 거부하면 다른 대항마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신랄한 비판은 민권 지도자 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측근이던 클래런스 존스에게서 나왔다. 그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게 도전한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때가 왔다고 본다”라고 〈뉴욕 타임스〉에서 말했다. 이런 가운데 대선 예비선거의 첫  관문인 아이오와 주에서는 ‘진보변화운동위원회’라는 친민주당 조직이 반 오바마 텔레비전 광고를 시작했다. 이 광고는 오바마 대통령이 자신의 대선 공약을 저버리고 공화당과 타협해 부유층의 감세 철폐 약속을 깼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오바마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여론조사 결과 국민 10명 가운데 약 7명이 이번 감세안에 대체로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오바마가 지지 기반인 민주당으로부터 ‘변절자’라는 오명을 감수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공화당과 타협하는 정치를 해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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