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전부터 ‘무늬만 IT 강국’인 한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초고속 인터넷망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깔려 있지만 해외와는 고립되어 있고, 새로운 혁신도 나오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구글·페이스북·트위터 등이 차례로 등장해 기존 강자인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글로벌 인터넷 서비스의 무덤’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외 서비스들이 맥을 못 추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해외 인터넷 회사들이 한국 시장에는 그렇게 신경을 못 쓴 탓도 있다. 대개는 중국·일본 시장 진출에 에너지를 쏟고, 상대적으로 품만 많이 들면서 시장이 작은 한국은 중시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한국의 인터넷 경쟁력이 뛰어나 외국 업체가 못 들어오는 것이라고 오판한 경우도 많았다. 삼성전자·LG전자 같은 세계적인 글로벌 휴대전화 메이커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덤으로 모바일 강국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역동적인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일찍이 접한 나는 이와 같은 상황이 엄청 답답했다. 어정쩡한 크기의 한국 시장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한국 인터넷 업체들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했으면 싶었다.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해서 이겨야 한국 인터넷의 수준도 더불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일부 온라인 게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외의 벽이 높았다.

한국인의 기질로 충분히 가능

ⓒ삼성전자 제공아이폰의 자극이 없었다면 국내 기업이 갤럭시 탭(위)을 개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미국을 필두로 세계 모바일 시장은 엄청나게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2007년 가을, 나는 실리콘밸리 출장을 다녀오면서 변화를 실감했다. 이미 그때부터 실리콘밸리에서는 블랙베리 아니면 아이폰이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이폰은커녕 스마트폰 보급률이 제로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아이폰 도입을 놓고 섣부른 판단으로 지리한 씨름을 벌이는 동안 언론에서는 ‘아이폰, 벌거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내놓았다. 걱정이 많이 들었다.

2009년 초 미국 보스턴으로 옮긴 뒤 블랙베리, 아이폰 3GS를 차례로 쓰면서 ‘모바일 혁명’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이폰이 빨리 한국에서 출시되어야 다들 모바일 혁명에 눈을 뜨고 자극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아이폰 출시가 늦어졌다. ‘이대로는 한국이 세계적 모바일 트렌드에서 낙오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이미 모바일 강국이었지만, 1년 먼저 아이폰을 받아들인 일본도 큰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드디어 2009년 11월 아이폰이 한국에서 발매되었다. 그로부터 1년. 한국은 세계가 놀랄 만한 빠른 신기술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이폰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고, 이에 자극받은 삼성도 재빨리 전열을 정비해 구글 안드로이드폰 갤럭시S로 반격에 나섰다. 삼성은 아이폰과 격투를 벌이며 받은 자극에 힘입어 이번에는 아이패드 대항마 ‘갤럭시탭’을 개발해냈고, 전 세계 테크 얼리어답터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더 나아가 구글과 함께 ‘넥서스S’라는 가장 앞선 안드로이드폰을 개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폰이 한국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면 삼성이 이렇게 빨리 따라붙었을지 의문이다.

어쨌든 한국의 빠른 신기술 적응 능력은 세계 최고다. 나는 얼마 전 MIT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두고 보라. 몇 년 안에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최고 국가는 한국이 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신기술 테스트베드(광통신 시험대)로 한국을 주목하라는 얘기였다. 〈창업국가〉로 알려진 이스라엘에 얼마 전 출장을 다녀왔지만, 한국만큼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빠르게 열광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페이스북·트위터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그와 같은 글로벌 서비스가 인기를 끌면 곧 그에 맞장을 뜨는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다. 글로벌 서비스와 경쟁하면서 키운 맷집으로 언젠가 세계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억센 기질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기자명 임정욱 (라이코스 CEO)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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