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겐 ‘희망’을, 신도들에겐 ‘실망’을
  • 주진우 기자
  • 호수 171
  • 승인 2010.12.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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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이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천주교 내부에 태풍이 휘몰아쳤다. 그동안 천주교는 한목소리로 ‘4대강 반대’를 외쳐왔는데, 왜 추기경은 모호한 발언을 했을까?
12월8일 국회에서 날치기로 예산이 처리되던 날, 정진석 추기경(79)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 했다. 오히려 (주교회의 성명은)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판단은 자연과학자들이 다루는 문제요, 토목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이지, 종교인들의 영역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 발언으로 천주교는 당장 내홍에 휩싸였다. ‘생명과 평화’는 천주교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다. 보수적이고 사회문제에 나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천주교 주교(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이것이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3월 천주교 주교단은 성명서를 내놓았다.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후손이 잘 되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신명기 30절).”

   
ⓒ뉴시스
정진석 추기경.
지난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시국 미사가 열렸다. 명동성당 본당에서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래 23년 만의 일이다. 6월에는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4대강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강 주교는 “주교단의 입장 표명은 하느님 백성들에게 드리는 주교들의 가르침이므로, 천주교 신자라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주교회의는 지난 10월 ‘4대강 사업은 대표적인 난개발’이라는 지침서를 내려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4대강 문제에 관해서는 천주교 내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간 주교회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 신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다. 1998년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 부임한 이래 명동성당에서는 사제단의 기도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2007년 사제단이 삼성 비자금 사건을 제기하자, 인사권을 쥔 서울대교구장은 사제단 고문 함세웅 신부를 보좌신부도 담당수녀도 없는 조그만 성당으로 발령 내기도 했다.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에게는 3년째 안식년을 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4대강 문제에 대해서만은 주교회의와 사제단 모두 한뜻이었다. 그런데 추기경이 주교회의의 합의와 결정을 무시한 발언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제단은 정 추기경의 발언이 ‘궤변’이라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동안 4대강 사업이 대표적 난개발이라고 거듭 밝혀왔던 주교회의 질타는 무엇이었나. 추기경의 과오는 2000년 교회 전통인 주교단의 ‘합의 정신’과 ‘단체성’을 깨뜨린 것이다.” 원로 사제 20여 명은 정 추기경에게 서울대교구장에서 용퇴하라고 촉구했다. 정 추기경은 75세가 정년인 서울대교구장 직을 4년이나 연장하고 있다.

정 추기경이 갑작스레 4대강 발언을 한 배경을 두고 천주교 내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교구의 한 신부는 “사적지 명동성당의 재개발을 허가하는 조건으로 추기경이 4대강 사업 반대 의사를 접은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 신부가 많다”라고 말했다. 12월3일 명동성당 주변에 12층과 9층 건물 두 채를 세우는 내용을 골자로 한 재개발 사업이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했다. 그동안 여섯 번이나 부결된 사안이었다.

   
ⓒ시사IN 조남진
12월13일 천주교 원로 사제 20여 명이 정진석 추기경의 4대강 관련 발언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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