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4일 현병철 인권위 위원장실이 있는 13층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인권‧시민단체들의 모임인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인권시민단체 긴급 대책회의’는 결국 현병철 위원장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7층 민원실을 차고앉았다. 이들은 매일 오후 7시 인권위 앞에서 촛불을 든다.

현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인권‧시민단체들 뿐만이 아니다. 11월1일에는 문경란‧유남영 상임위원 두 사람이 임기 말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동반 사퇴를 선언했다. 11월8일에는 전직 인권위원장과 인권위원들까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정치권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현 위원장의 사퇴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같은 인권위의 불행은 2009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이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을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인권과 관련한 경력이 전무한 현 위원장이 수장을 맡은 후 인권위는 침묵을 거듭했다. 민간인 사찰, 용산참사, MBC 〈PD수첩〉 수사를 비롯해 이포보에서 4대강 반대 농성을 벌이던 환경운동가의 인권침해 긴급구제 요청과 강제철거에 반대해 농성하던 홍대 두리반의 단전 사태에 대해서도 인권위는 입을 굳게 닫았다. 예외적으로 목소리를 낸 적도 있긴 했다. ‘북한인권법안에 대한 의견 제출’이었다. 

ⓒ시사IN 안희태11월4일 인권위 앞에서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내부는 들끓었다. 2001년 인권위 출범 전 설립기획단 실무를 맡았던 김형완 전 인권정책과장은 올해 8월 사직서를 제출했다.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어 사직한다”는 변을 내놓았다. 김 전 인권정책과장과 함께 인권위 설립 때부터 헌신했던 남규선 시민교육팀장은 지난해 4월 행정안전부의 인권위 21% 인력 축소안에 따라 짐을 싸야 했다.

파행은 계속됐다. 결국 상임위원들은 지난 10월25일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상정된 ‘국가인권위원회 운영규칙 일부 개정안’에서 폭발했다. 개정안은 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하고 상임위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인권해체위’라는 오명 속에서도 ‘공항 알몸 투시기 설치 금지 권고’ ‘양천경찰서 직권 조사 권고’ 등 현안이 터질 때마다 고군분투해 온 상임위원들의 역할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결국 11월1일 문경란‧유남영 상임위원이 동반 사퇴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들었다. 차관급 상임위원 세 명 중 두 명이 사퇴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은 사임의 변을 통해 “인권위가 ‘고사(枯死) 상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두 명의 상임위원이 사퇴했지만, 문경란 상임위원의 사퇴는 특히 주목받았다. 문 상임위원이 2008년 한나라당 추천 몫으로 임명됐기 때문이었다. 11월1일 한때 한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1위는 ‘문경란 사퇴’였다. 

아래는 11월5일 진행한 문경란 상임위원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임기가 내년 2월이면 끝난다. 굳이 사퇴한 이유는?
언젠가는 끝날 임기였다. 그러나 현 인권위가 왜곡과 파행의 길로 가는 걸 지켜보면서 임기를 채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간담회, 상임위, 전원위 안건 상정 등 공식적‧비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많이 해 왔다. 그러나 위원장의 지시를 받는 사무처가 옴쭉달싹을 안 한다. 대표적인 게 총리실 민간인 사찰이었다. 그 뿐 아니다. MBC 〈PD수첩〉, 박원순 변호사 건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고,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권이다. 이런 사안에 대해 인권위가 침묵 한다면 인권위가 존재할 근거는 무엇인가.

ⓒ시사IN 윤무영문경란 상임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운영규칙 일부 개정안’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사퇴촉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일인데, 상임위원의 손발을 묶었다고 보면 된다. 단순히 위원장과 상임위원이 권한 다툼을 하거나 집안 싸움을 하는 게 아니다. 일부에서 ‘내홍’이라고 보도하던데, 본질은 인권위에서 상임위원들의 역할이 무엇이냐를 따져봐야 한다. 상임위원들은 공권력을 감시하고, 공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침해하는지 비판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개정안은 이런 역할을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상임위원이 갖고 있는 의결권까지 제한해 버리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싶었다.

인권위 폐지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국가기관이 갖는 의미도 생각해야 한다. 다만 현재의 인권위는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인권위의 독립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는 독립성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하나의 대안으로 헌법기구화 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헌법기구로 만들면 헌법재판소나 감사원처럼 확실한 독립성이 보장된다. 인권위원을 선정하는 문제 역시 제도적으로 정비를 해야 한다. 이를테면 위원회 법에 인권위원 중 30%를 여성위원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어느 인권위원이 치마만 입었지 ‘젠더 마인드’가 전혀 없다면 여성을 임명하는 의미가 없어지는 셈이다. 인권위원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검증과정이 공개적이고 투명해야 한다. 

인권·시민단체들이 인권위 점거농성을 하는 등 현 위원장 사퇴 요구가 거세다.
단체들이 애정을 가지고 인권위를 지켜보고 모니터링도 하고 비판도 많이 하고 그랬다. 어떤 경우엔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체로는 몸에 좋은 쓴 소리라고 생각했다. 상당부분 그 비판이 타당하고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거 같다. 위원장뿐 아니라 정치권이나 관계자들이 인권위의 설립취지가 뭔지, 원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관심을 갖고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 취지에 비춰볼 때 요즘 상황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한 번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위원장의 거취를 말하는 건 부적절하다.

임기 중 스포츠 인권‧미혼모 학습권 등 새로운 의제를 발굴해 왔다. 사퇴에 아쉬움이 많을 것 같은데.
인권위에서 상임위원을 맡아 일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럽고 보람된 일이다. 정말 신나게 일했다. 인권위 동료들도 밥벌이 이상으로 일을 정성스럽게 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조직도 드물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즘 인권위 상황은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다. 국제사회에서 한국 인권위는 잘하는 모델의 하나였다. 그런데 위원장 한 명 바뀌었다고 이렇게까지 역행을 하니 나로서는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 추천 몫으로 임명 된 상임위원이 사퇴함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 중에 인권이 빠진 나라는 없다. 인권은 보수의 것이기도 하고 진보의 것이기도 해야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인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건 보수라고 할 수도 없다. 인권은 좌파의 전유물도 아니고 모두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위원장은 어떤 사안을 판단할 때 인권의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권력기관의 불편한 심기를 갖고 판단을 하니 문제제기를 안할 수 없었다. 인권위원은 추천기관으로부터, 또 정파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인권위의 독립성만큼이나 인권위원들의 독립성이 중요한 이유다. ‘문경란 사퇴’가 검색어 1위가 될 게 아니고 ‘인권위의 위기’가 국민 관심사 1위가 됐으면 좋겠다. 

〈사임의 변 요약〉

유남영(노무현 전 대통령 추천)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에 소극적이면서 행사 및 이벤트에 치중하거나 집권세력의 구미를 맞추는 사안이나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데에 주력하는 행태를 보여 집권세력과 긴장도 협력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후진국 국가인권기구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이름과 무늬 뿐인 국가인권기구를 일컬어 인권침해가 없음을 증명하는 형식적인 제도로만 작용하는 ‘알리바이 기구(alibi institution)’라고 부릅니다. 

지난 2009년 7월 현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위원회가 과연 어디까지 가는지, 추락의 바닥은 어디인지를 지켜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근본적으로 현 집권세력의 인권에 대한 무관심과 경시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가깝게는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이 임명되는 과정에서 위원회법 제5조 제2항의 자격요건(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깡그리 무시된 데에 그 까닭이 있습니다.”

문경란(한나라당 추천)

“최근의 상황은 안타까움과 슬픔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2009년 4월 인권위의 적극적인 역할에 제동을 걸기 위한 직제 축소가 강행된 이후 다수의 동료들이 인권위를 떠났습니다. 직무의 효율성을 조직 개편의 표면적 사유로 내걸었지만, 그 근거와 절차를 지금도 납득키 어렵기에 당시 동료들의 퇴직은 부당하고 강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대해 쓴소리를 하라는 소임은 인권위 탄생 이유이고 존립의 근거입니다. 인권위가 독립성을 외쳐대는 것도 바로 위원회의 독립성이야말로 인권지킴이의 소임을 다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자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권위라면 당연히 목소리를 내야 할 사안에 침묵하고 외면한 사안들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인권상황을 후퇴시키는데 인권위의 부작위가 한몫하고 있는 셈입니다. 인권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진보‧보수의 대립이라는 말조차 사치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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