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 감독은 지난 4월 자선축구 행사로 모은 돈 3억1000만원을 포함해 그동안 11억원을 기부했다. 배우 문근영씨는 지난 8년간 8억5000만원을 익명으로 낸 ‘기부 천사’였다. 개그우먼 김미화씨는 얼마 전 기업 강습료와 광고료로 받은 돈 1400만원을 고스란히 냈다.

이들만이 아니다. 은퇴한 어느 세무공무원은 88세 생일을 맞아 5000만원을 기부했다. 서울에 사는 86세 할머니는 최근 교통사고로 받은 보험금 600만원을 기부한 것도 모자라 전세보증금 500만원까지 유산 기부하기로 했다.

ⓒ뉴시스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겨울 ‘사랑의 온도탑’을 제작한다며 1000만원을 지출했으나, 과거 사용한 온도탑을 재활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수많은 장삼이사의 가슴 뭉클한 정성이 쌓이고 쌓여 매년 수천억원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공동모금회)로 들어온다. 2009년에만 해도 공동모금회는 3678억원이라는 돈을 모았다. 이 돈으로 저소득층 지원에 1328억원, 아동·청소년 지원에 612억원, 새터민 정착 지원사업에 274억원 등을 지출해왔다고 공동모금회 측은 밝혔다. 정성이 모이는 까닭은 자명하다. 자신이 기부한 돈이 좋은 일에 투명하게 쓰일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을 배반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애주 한나라당 의원(비례대표)이 이번 국정감사에서 밝힌 내용은 이렇다.

술집 등에서 공금 3300만원 탕진

공동모금회 경기지회 사무처장으로 일했던 ㄱ씨는 2009년 1월부터 2010년 4월까지 1년3개월 동안 유흥주점과 술집·식당 등에서 법인카드로 3300만원을 썼다. 웬만한 직장인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 과정에서 ㄱ씨는 거짓으로 서류를 꾸몄다. 기자간담회를 연다고 해놓고 143만원을 허위 청구했고, 내부 회의를 연다며 기관운영비를 청구한 게 126만원이었다.

가장 빈번하게 조작한 건 기부 참여 단체들과의 만남이었다. ㄱ씨가 1년3개월 동안 기부 참여 단체 관계자와 만난 횟수는 모두 112회. 그 과정에서 식사·술 등 접대비로 쓴 돈이 3054만원에 달한다. 사흘에 한 번꼴로 기부 참여 단체와 만나 향응을 제공했다고 허위 보고한 것이다. 주말에 쓴 돈도 411만원에 달했다. 주머닛돈이 쌈짓돈이었던 셈이다.

비위는 ㄱ씨만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공동모금회 경기지회는 2006년부터 올해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9000만원 규모의 인테리어 공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공사를 맡은 업체가 이 단체 총무팀장의 사촌동생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산재보험료를 미납해 가압류 처분을 당한 부실 업체였다. 이 과정에서 경기지회는 하자보수 보증금 등을 받지 않는 등 구매 관련 법령을 위반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경기지회는 지난해 가수 ㅇ씨를 홍보대사로 위촉하면서 매일 출근한 것처럼 허위로 출근부를 만들어 월 90만원가량을 ‘급여’로 지급하기도 했다. 자원봉사 홍보대사가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둔갑한 것이다.

인천지회 내부감사 보고서. 캠페인 물품 구매 과정 등에서 비위 사실이 밝혀졌다.

이 같은 허위 보고가 가능했던 건 내부적으로 이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공동모금회의 경우 각 지회의 운영과 회계가 일정하게 독립되어 있어 실무자 중 최고 직급인 사무처장이 마음먹고 돈을 유용하려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경기지회처럼 사무처장과 총무팀장이 결탁할 경우 이를 적발할 방법이 없다. 공동모금회 중앙회에서 매년 감사를 실시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이번에 ㄱ씨의 공금 유용이 드러난 것도 지난 4월께 내부에서 누군가 이를 중앙회와 이애주 의원실에 제보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시사IN〉이 이애주 의원실로부터 입수한 공동모금회 내부 자료에는 새로운 비위 사실이 더 있었다. 공동모금회 인천지회는 2003년 모금 캠페인을 실시하면서 관련 물품 제작비용으로 297만원을 업체에 지급했으나 물품 100개 중 9개만 납품되었을 뿐, 나머지 91개는 납품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올해 6월 내부 감사에서 적발될 때까지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공동모금회 “그린카드 사용 등 자정 노력할 것”

매년 연말이면 거리에서 눈에 띄는 ‘사랑의 온도탑’ 제작 과정에서도 비위가 있었다. 인천지회는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1000만원을 들여 온도탑을 제작했다고 보고해왔으나, 이 온도탑은 2006년에 제작한 것을 계속 재활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만들지도 않은 온도탑 제작 비용으로 3000만원이 사라진 것이다. 돈을 받은 업체가 인천지회 사업부장과 사촌 관계라는 점도 밝혀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비위 사건의 사후 처리에도 문제가 있었다. 중앙회가 사건을 인지하고 내부 감사에 착수한 뒤인 지난 6월 경기지회 사무처장 ㄱ씨가 사표를 제출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을 뿐, 공동모금회는 형사 고발 등 아무런 외부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공동모금회 측은 ㄱ씨로부터 본인이 유용한 돈 3300만원을 모두 환수했으므로 사건을 일단락했다는 입장이다. 인천지회도 두 명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한 명은 사직, 한 명은 1개월 정직 처분에 그쳤다. 공동모금회 측은 “이 사건을 형사 고발할 경우 언론에 공개되어 모금 문화에 악영향을 미칠까 염려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애주 의원은 “공동모금회 외에도 많은 모금단체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사건을 형사 고발하지 않은 것은 이로 인해 공동모금회의 모금 실적이 떨어질까 염려해 은폐하려 한 것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서영일 공동모금회 감사실장은 “내부 변호사에게 자문한 결과 그 사람 자체를 법적으로 벌하는 것보다 유용한 돈을 환수하는 게 우선 중요하다고 판단해 별다른 법적 조처는 취하지 않았다. 사건 후 간부에게 지급하는 신용카드를 유흥주점에서 결제할 수 없는 그린카드로 교체하는 등 고도의 윤리적 잣대를 가지고 내부 문화를 개선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서 감사실장은 인천지회 등 새롭게 드러난 비위에 대해 “경기지회 사건 이후 내부감사를 통해 밝혀진 사건인 만큼 자정 노력이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998년 설립 당시 400억원의 정부 출연금을 받았고, 이후에도 매년 복권 수익금 30억원가량을 지원받는 유일한 법정 모금기관이다. 법에 의해 독점적 지위를 인정받은 만큼 굵직한 사회적 모금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동모금회가 전면에 나선다. 한 모금단체 관계자는 “최근 적십자사가 아이티 구호 성금을 유용한 사실이 알려지는 등 자칫 모금 문화 전반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계속 불거져 안타깝다. 모금 문화 전반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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