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건으로 경색된 남북 관계가 빠르게 유턴하고 있다. 북한이 9월 초 우리 정부에 수해 복구를 위한 쌀과 시멘트 등 기자재 지원을 요청하면서부터다. 북한은 이 같은 요청을 하면서 억류 중이던 대승호 선원을 송환하는 조처를 취했다. 이어 북한 적십자사는 추석을 맞아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했고, 이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 접촉이 개성에서 열렸다. 한국적십자는 수해 피해가 심각한 신의주 지역에 대한 긴급 구호를 위해 쌀과 시멘트 등 100억원 상당의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북한의 대화 공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남북 군사 실무회담 제의로 이어졌다. 북한은 군사 실무회담을 9월24일 우리 측 평화의집에서 열자고 하면서 의제로 ‘쌍방 간 군사적 합의 이행에 따른 현안 문제’를 제시했다. 우리 국방부는 회담을 9월30일에 열 것과 ‘천안함 피격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처’ 등으로 의제를 수정 제의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그동안 남북 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내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를 거론하지 않았다. 나아가 국방부는 조만간 발행될 〈2010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 같은 변화의 계기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에 이어 석 달 만인 8월26일 중국을 재차 방문했다.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의 주된 목표는 6자회담 재개였다. 후진타오 주석과의 창춘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6자회담의 조속 재개를 희망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견지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라고 밝혔다. 이는 곧 북·미 대화 재개를 간절히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북한의 입장은 같은 날 억류 미국인 곰즈의 석방을 위해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과 중국을 통해 미국 측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한편 미국 내에서도 지난달 초 클린턴 국무장관이 고위급 회의 소집을 지시하고 대북 정책과 관련한 ‘신선한 대안(fresh options)’을 점검해보도록 했으며, 여기에는 과거에 검토하지 않았던 다른 대안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후 보즈워스 특별대표가 9월12일 서울을 방문했다. 보즈워스의 서울 방문 자체가 대화 재개 신호로 주목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즈워스는 외교부 고위 관리와 면담한 뒤 “북한과 머지않은 시점에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낙관한다”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보즈워스의 방한은 천안함 사건에 발이 묶인 북핵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제 선(先)천안함 사건, 후(後)6자회담 구도에서 방향을 전환하려는 것이다. 천안함 문제는 한국이 판단해서 남북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겨두고 북핵 문제 해결은 중국과 협력하여 천안함 사건 이전 국면으로 6자회담을 돌려놓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도 대북 강경 정책 지속하기 어려운 처지

문제는 남북 관계이다. 미국 처지에서 보면 6자회담이 진전되려면 한국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 남북 관계 개선 없이는 북·미 대화도 6자회담도 진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사례에서 보듯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병행 진전이 북한 핵문제 해결에 바람직한 구조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핵 없는 세계’ 건설을 위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미국으로서는 대북 강경 정책을 계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북한이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의 조속 재개를 요구하고, 중국도 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정세 아래서 미국은 당연히 대화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압박 일변도에서 대화를 병행하려는 것이다. 북한이 일련의 대남 대화 공세를 전개하는 것도 이 같은 기류 변화에 적극 부응하려는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우리가 그동안 제안해온 것인데, 이를 이례적으로 북한이 제의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군사회담 제의도 예상을 깬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도, 군사회담도 우리가 거부하기 어려우리라 판단하고 제의한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도 G20 정상회의의 안정적 개최를 위해서는 남북 관계를 일정 정도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미국 내의 기류를 보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한·미 공조의 기반 위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대북 정책을 추진해 나가려면 이제 남북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남북 대화와 6자회담의 병행을 결단해야 한다. 냉전의 긴 터널에서 벗어날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 통일세는 그 다음이다.

기자명 이봉조 (전 통일부 차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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